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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11월30일 화요일 6 (제179호) 관향조 종친회 고려조 문하시랑을 역임한 휘 문길 공 (公)의 시향이 지난 4일 삼생리 묘역에 서 충민공·문익공 후손 주관으로 봉행 되었다. 이날 제향은 달근 충민공파 회장이 집 례를 맡은 가운데 초헌관 호근, 아헌관 은 죽 산 박 씨 택 수 공 종 중 한 수 전 회 장 , 종헌관 재활 현종이 각각 순서대로 헌작 하고유근축관이독축했다. 문하시랑공 휘 문길은 조적의 난을 평 정한 공으로 2등 공신에 책록된 휘 현계 의 아들이다. 그는 아들 둘을 두었는데 함흥차라로 유명한 휘 순(淳)과 문익공 휘 정(淨)을 두어 충민공파와 문익공파 의파조가되었다. 충민공의 후손들은 음성을 중심으로 의왕시 청계, 원주 등지에 세거하고 문 익공 후손들은 화성에 세거지를 두고 있 다. 한편 이날 제향에 죽산 박씨 문중의 한 수 전 택수공파회장이 참례하여 죽성대 군의 후예 박서장군과는 한 뿌리임을 과 시하고 애종을 나누어 제향이 더욱 빛났 다. 음성박씨문하시랑(휘문길)공시향 봉행 충민·문익공파주관 조선 세조때 단종의 복위를 꾀하다가 목숨을 잃은 박팽년, 성삼문, 하위지, 이 개, 유응부, 유성원 선생의 충절을 기리 기 위한 추향이 지난 달 31일 대구 달성 군하빈면묘리육신사에서봉행되었다. 이날 제향은 코로나19 확산방지를 위 해 당초 지역 유림행사로 예정하였으나 육신사보존회 주관으로 진행된 가운데 성규 집례관의 창홀에 따라 충정공 박팽 년 선생의 종손 완순(完淳)현종이 초헌 관으로 헌작하고 이어 대규, 종혁 아헌 관 종헌관을 맡아 헌작하고, 종우 축관 의독축으로40여분에걸쳐진행되었다. 육신사는 처음 충정공 박팽년 선생만 이 후손에 의해서 배향되어 오다가 선생 의 현손인 계창공이 선생의 제삿날에 여 섯 어른이 함께 사당문 밖에서 서성거리 는 꿈을 꾸었다. 잠에서 깨어 난 그는 깜 짝 놀라서 다시 다섯 분의 제물도 함께 차려 제사를 지냈다. 그 후부터 낙빈사 를 세 워 사 육 신 을 함 께 모 셔 제 사 를 지 냈는데 조선 고종3년(1866)흥선대원군 의 서원 철폐령으로 낙빈서원과 함께 훼 철되었다. 그 후 1924년 낙빈서원이 재 건되면서 다시 사육신을 이곳에 봉안하 게 되었다. 1974년과 1975년 사이에 충 효위인유적정화사업에따라정면5칸, 다포식 겹처마 팔짝지붕의 육신사를 건 립하게 되었다.그리고 1981년에는 외삼 문(外三門), 삼충각, 숭절당, 관리사, 담 장등을갖추었다. 최근 각급 교육청마다 인성교육에 적 극적으로 나선가운데 육신사를 배경으 로 한 대구 경북지역의 학생들이 충의정 신 인성체험에 참가하고 일반인들에게 도 많은 교훈을 전달할 장소로 꼽히고 있어 절의문을 지나면 자연스레 절의를 지킨충신들의삶을기리게된다. 그러나 최근 서울 노량진의 사육신 공 원에 김문기를 합사하면서 묘골의 육신 사가조명되고있다. 지난해 사육신공원의 불편한 진실을 말하다. ‘사육신 틈입사건, 책으로 엮은 최종 인 전 성씨연합 사무총장은 이를 두고 현대판 지록위마(指鹿爲馬)라고 규정 하고 다음과 같이 전하고 있어 사육신의 정신이 훼손되어서는 안 되기에 소개해 본다. ‘육신(六臣)’이란 용어를 최초로 사용 한 분은 남효온(南孝溫)이다.그가 지은 븮육신전븯(六臣傳)에 수록된 인물들이 박팽년·성삼문·하위지·이개·유성원· 유응부 등 여섯 분이란 것은 모두가 아 는 일이다. 그러나 ‘김문기’는 육신전에 아예포함되어있지않았으며,정조대왕 의 어정배식록에도 김문기는 육신(六 臣)에 해당되지 않는다. 다만 앞에서 예 시한 바와 같이 사육신보다 위차가 두 단계 높은 ‘삼중신(三 重臣)’에 포함되 어 있 다 . 이러한 역사적 사료에도 불구하고 김 문기의 후손들은 남효온의 육신전이 잘 못 기록되었다거나, 어정배식록의 편성 에도 오류가 있었다고 몰지각한 억설 (臆說)과 아전인수(我田引水)식 날조 된 역사 해석을 강변하면서 사실(史實) 을왜곡하고있는것이다. 나는 새도 떨어뜨린다는 유신독재정 권의 중앙정보부장 김재규가 김문기의 후손이다. 그가 그릇된 조상숭배의식을 바탕으로 국사편찬위원회에 부당한 압 력을 행사하여 사육신묘역에 자신의 조 상인 김문기의 산소와 위패를 무리하게 안치하는 만행을 저질렀던 것이다.사육 신(死六臣)이 사칠신(死七臣)으로 둔 갑한곡절의내막이다. 그래서 ‘7’을 ‘6’이라고 하는 바는, 오 랜 옛날 중국에서 진시황이 죽은 후, 간 신 조 고 (趙 高 ) 가 어 린 호 해 (胡 亥 ) 황 제 에게 ‘사슴’을 가리켜 ‘말’이라고 우겨댄 고사(故事)와무엇이다르단말인가! /박상섭 편집국장(parkss1012@hanmail. net) 단종절신사육신추향봉행 사육신의충절을기리기위한 추모제향이 지난 달 31일대구달성군하빈면육신사(숭정사)에서봉 행되었다.(사진앞줄왼쪽부터종헌관 종혁,아헌관 대규,초헌관 완순,집례성규,축관 종우順) 대구달성군육신사븣서울노량진에김문기합사는현대판지록위마(指鹿爲 馬) 제향광경,종우축관이 독축하고있다. 신라 경명왕의 아들 죽성대군 (휘 언립)과 그의 아들 충정공 (휘 기오)의 시향이 10월 마지막 주 목요일인 지난 달 28일 단소 가 있는 경기도 용인시 백암면 옥산리에서 대사헌공파,충현공 파, 문헌공파, 문정공파 등 전국 의 후손 4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두문동 영수 충현공(휘 문수)의 종손 정은 현종의 집례로 한국공 자학당 박홍영 총재, 대사헌공 후 박 태 륭 , 문 정 공 후 박 동 면 현 종이 각각 헌작하고 병건 축관의 독축으로 봉행된 가운데 문헌공 종손 우근, 전 일성왕 완식 참봉 이첨작관으로헌작했다. 이날 제향은 소파 임원진이 박 한수 회장의 인사와 참석종원 소 개로 시작된 가운데 한수 회장은 인사말에서 건강한 모습으로 뵙 게 되어 반갑다 지난 2년 동안 코 로나로 인해 얼마나 고생이 많았 습니까.원근거리를 막론하고 많 이 참석 감사하고 죽산박씨대종 회가 발전은 하루아침에 되는 것 아니라 적극 참여하여 질타도 해 주 고 격 려 도 해 줄 때 발 전 을 함 께 이루는 것이라며 성원을 당부 했다. 죽성대군과 그의 아들 충정공의 단비는 2013년 4월 준 공되었다. 준공이전 향화를 받들지 못했던 후손들의 심 정을 축문에 담아 준공에 대한 기쁨의 소회(素懷)를 표 출한바있어소개해본다. 븮왕 실 의 뛰 어 난 분 으 로 당 세 에 큰 공이 있 으 시 어 죽 주 땅에 봉작되시고 임금을 돕고 백성을 교화키셨으니 후손 이번영하였습니다.준수하고어진이가임금곁에서기밀 에참여하셨고,충성과효도절개의리로삼강오상의도를 진작시키셨습니다. 천년을 내려오면서 세상이 격심하게 변천하고 여러 번 의전란으로 분묘가 실전되어서 오랫동안 제사를 궐하였 으니 우러러 사모함이 민울하였습니다. 가까운 몇 해 간 에 겨우 향사하였는데, 앞서서 이끄는 후손이 있어 물력 을 헌 성 하 니 종 중 에 서 협 동 하 여 이 루 게 되 어 이 에 단 을 설 치하오니 거칠고 정밀치 못하오나 뒤에 모범으로 갖춤을 기다립니다. 현재의용인과 안성의땅이 옛적에 봉해진 지경으로 비 봉산오른편기슭에앞에는구봉산이있는데높은영좌를 같이하오니백대를길이의뢰합니다.준공식을펼치어함 께 음덕을 송축하오니 위의혼과 아래백이 물이 땅에 있 음과같으신데재계하고제수를올리오며감히그연유를 고합니다. 높으신 우리의 두 조상님은 강림하시어 흠향 하오소서븯 죽산박씨대종회는 단소준공을 계기로 창립되어 지금 에 이르고 있어 단소는 후손들의 화합을 이루는 계기가 되 었 고 구 심 점 역 할 을 할 뿐 만 아 니 라 자 부 심 을 심 어 주 고있어수시로많은후손들이찾고있기도하다. 죽성대군과아들충정공시향봉행 죽성대군과 그의아들충정공의시향이 지난 10월28일경기도용인시백암면옥산리단소에서봉행되었다. 한국공자학당박홍성초헌관으로헌작븣코로나19인해종친회침체되어걱정 박홍영초헌관 박태륭아헌관 박동면종헌관 경북 경산시 진량 에 세거지를 두고 있는밀양박씨규정 공 후 참 판 공 파 경 산문중신축년시향 이 지 난 1 0 일 입 향 조 요산공(휘 운달) 을 비롯한 조부 경 근당 휘 근손(根 孫), 아버지 지암공 휘 빈 (彬 ), 아 들 송 재공휘근손(謹遜),11일은손자정재공 휘번(蕃)증손죽고공휘응득(應得)등 양일에걸쳐봉행되었다. 이날 제향은 코로나 19확산방지를 위 해 정부 시책을 준수하며 묘역에서 순우 (적명 방무)본보 명예기자와 재균 요산 공 종중 회장이 번갈아 가며 집례를 보 면서 질서 정연하게 진행되었다. 특히 2 일차인 정재공과 죽고공 향사에는 처음 향사에 참례하는 젊은 후예들이 많아 어 른들을즐겁게했다. 경산문중은 요산공(휘 雲達)께서 “벼 슬은 나의 학문을 펼치고 나의 뜻을 행 하여 임금에게 충성하고 백성에게 은혜 를 베푸는 것이다. 그렇게 되지 않는다 면 내 가 좋 아 하 는 것 만 못 하 다 .”고 하 고 마침내 벼슬을 버리고 호서(湖西)의 청 주로 물러나 살면서 경전에 힘써서 그 앎을 지극히 하였고, 뒤에 또 다시 영남 의 자인현 대원리(현 진량읍 대원리)로 옮겨 은거하며 성리(性理)를 탐구하며 오직 책만을 가까이 해오면서 경산문중 의문호를열었다. 요산공은 성균생원(成均生員) 휘 빈 (彬)과 어머니 고흥 류씨(高興柳氏) 사 이에서 1491년 3월 12일 서울에서 태어 나 1516년 26살에 무과에 등제하여 여러 차례 승진하여 선전관사 포서별검 봉상 시주부(종6품)에 이르렀고 직분을 받듦 에 공정하게 처리했다.아첨하거나 물러 나는 태도가 전혀 없어 동료들이 모두 공경하면서꺼려했다. 경산에 입향 이후 지역의 거유(巨儒) 인 삼족당 김대유, 소요당 박하담 등과 도의지교(道義之交)를 맺고 시를 읊으 며후진을가르치셨다 조부 근손(根孫)은 봉사(奉事)를 지 냈고, 호(號)는 경근당(敬謹堂)이다.부 인 진성이씨는 부사 정(楨)의 따님으로 퇴계선생의왕고모이기도하다. 아들 송재공 휘 근손(謹遜)은 성균 생 원 으 로 4 남 을 두 었 는 데 장 남 총 (叢 ) 은 일찍 사망하였고, 차남 번(蕃)의 호는 정재(貞齋·威堂), 무과에 급제하여 태 천현감을 지냈고,아들 죽고공이 귀(貴) 하게 됨으로서 승정원좌승지 경연참찬 관에추증되었다. 장남 죽고공 휘 응득(應得,1578 ~1639)은 조선조에 충의(忠義)로 모범을 보이고, 숭정처사로 평생 을 의롭게 살아와 후세의 사표가 되었다. 글 읽기를 좋아하고 대의(大義) 를 통하여 언어(言語)와 동작(動 作)이어른과다를바없으며또래 아이들중에서도으뜸으로따르지 않은 이 없었다. 어버이를 섬김에 반드시말소리를부드럽게낯빛을 즐 겁 게 하 여 사 랑 과 공 경 이 함 께 갖 추 었 고,13세에 선고(先考)정재공께서 영면 하니 한 결 같이 가례(家禮)를 준수하였 다. 가학(家學)으로 학문을 깨우쳤고, 十四歲에 사월 유시번(沙月 柳時蕃)선 생 문하에 들어가 수학하고 이듬해 임진 왜란이 일어나자 어머니를 모시고 피란 하였다. 선조 30년(1597) 정유재란이 일어나 자 20歲가 되어 4월에 경상좌도 방어사 권응수에게 달려가 왜장 가등청정(加藤 淸正)에 맞서 화왕산성을 굳게 지켰으 며, 九月 공산성 전투, 十二月에는 울산 도산성의 왜군을 공격할 때 반구정(伴 鷗亭) 밑에서 많은 적을 화공할 때 힘을 다해 싸워, 선조31년(1598) 1월 효력부 위(정9품), 승의위사(承義副尉, 정8품) 에 제수되었다. 이는 전란에 쌓은 훈공 (勳功)인 것이다.난이 진압되자 집으로 돌아와 1599년(선조32) 사월 유시번 선 생에게다시가서수학하였고,1600년에 는 모당 손처눌(慕堂 孫處訥) 선생에게 수학하였다. 1606년(선조39) 29세에 무과에 급제 하여 권지훈련원참군(정7품, 權知訓鍊 院핫軍)이 되고 1608년 훈련원 주부, 16 10년(광해2) 선전관, 1613년(광해5) 부 사직(종5품), 1615년 사직, 1618년 용양 위 부호군(종4품)1615년 오위도총부경 력(종4품), 1621년 통훈대부 철산군수, 1625년(인조3) 벽동군수, 1631년 훈련 원부정(종3품), 1633(인조11) 절위장군 용양위상호군(정3품), 1634년(인조12) 가선대부(종2품)로 승차하여 3대 추증 의은전(恩典)이내려졌다. 1636년(인조14) 청나라 태종이 10만 대군으로 원정군을 조 직하여 일으킨 병 자호란에 인조 임금이 남한산성으로 들 어갈 때 공(公)은 임금을 호종하였으나 청군이 산성을 포위한지 45일 만에 주화 론에 따라 인조가 삼전도에서 굴욕적인 항복을 하자 공(公)은 주전(主戰)을 주 장하다 이에 미치지 못하자 벼슬을 버리 고 향리로 돌아와 평생을 숭정처사로 은 거하며 후진양성에 매진하다 3년 만인 1 639년(인조17) 己卯 七月 十九日 下世 하니 하늘이 무너진 듯 큰 슬픔이었다. 진량읍 신제동 산 三四번지 어머니 묘 아래 卯座에 안장되었으나 진량산업단 지조성에 편입되어 1918년 4월 진량읍 다문리 산31번지 선영으로 천묘하였다. 가정대부 병조참판 겸 동지의금부사 오 위도총부 부총관에 추증되었으며, 정부 인(貞夫人) 함종어씨(咸從魚氏)는 영 목(榮穆)의 따님이고, 계배(繼配)는 영 양최씨(永陽崔氏) 병직(炳直)의 따님 이다.五男을 두니 맏이는 종립(宗立)으 로 국담 박수춘(菊潭 朴壽春) 문하에서 수학하고 인조 5년 丁卯에 武科 등제하 여통훈대부사천현감이고,차자는종량 (宗亮), 삼남은 종희(宗熙), 사남은 종 복(種福), 오남은 종간(宗幹)인데 모두 가학덕을감추고벼슬하지아니하였다. 한편이번향사의제관은다음과같다. (초헌/아헌/종헌/집례븡축관順) △경근당-성균/순휘/정수/순일/재 정. △지암공-경호/대정/순봉/순일/병 규. △요산공-성균/명정/병목/재균/병 인. △송재공-송균/창균/병인/순우/병 제. △정재공-경호/재균/순구/순일/병 식 △죽고공-태정/순휘/문정/방무/채 정-이상 /박방무명예기자(경북 경산시지부) 규정공후참판공파경산문중시향봉 행 10일경근당·요산공·송재공,11일정재공·죽고공븣추진중인족보편찬적극동참 당부 참판공파경북 경산의요산공문중시향이 지난 10일과 11일양일에걸쳐진행된가운데입향조요산공시향후참석한 종원들이 한 자리에모였다. 2일차인11일정재공묘역에는처음참례하는젊은종원들이 많아문중의어른들을기쁘게한 가운데기념촬영을하고있다. 제향광경(송재공묘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