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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10월31일 일요일 8 (제178호) 종 합 지난 21일 경남도의회 본회의 5분 발언에서 기획행정위 원회 위원장 김영진 의원이 “국가 보물인 영남루 한복판에 밀성박씨 시조 단소라니 그것은 조선 총독부를 등에 업은 박춘금이박씨문중을만방에과시하고자세운일본식무덤 입니다.”라는엉뚱한괴담을쏟아내며철거를주장했다. 또,밀성대군단은 “밀양 무봉산 중턱에 세워져 있는 일본 신사와 직선거리로 열까지 맞추어 마치 일본 왕실과 신궁 을 향해 머리를 조아리는 모습입니다.”라며 제향 때 절하는 사진을 올려놓고 망발(妄發)을 지껄이며 300만 밀성인의 명예를 훼손하고 폄하하는 등 해서는 안 될 행동으로 일관 하고 있다. 특히 “밀성박씨 시조의 밀성대군 묘는 1922년 전까지는 몰랐으나 어떤 사람이 영남루를 산책하다 뼈 조 각을 발견한 후 영남루에 조상을 모실거냐 말 것이냐로 격 렬한 논쟁을 벌입니다.”라며 근거 없는 허무맹랑한 말로 현 혹하고있다. 이에 대종회에서는 이를 강력 규탄하고 법적조치를 강구 할 예정이다. 만일 박춘금이 대군단을 세우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면 단소를 세우고 기록을 남긴 ‘밀성대군단’ 사실록에 이름 석자라도 올라야 하는데 이마저도 기록되지 않았다. 또한 대종회에서는 당시 전국의 성손 1천 여 명이 모인 가운데 종의로서 세우게 되었음을 기록으로 전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김 의원은 “박춘금은 그때 박씨 문중의 최고 어른께 권총을 겨누고 영남루 앞마당에 시조단소를 세웁니다.”라고 주장는 등 구전으로도 전해지지 않은 것을 마치사실인냥지껄이고있음에경악하지않을수없다. 밀성대군단 사실록에 의하면 뷺1924년 임술 윤5월 13일에 큰 비가 쏟아지 듯하여 겉흙이 패인 뒤에 영남루 북쪽 뜰에 하나의 큰 묘자리 흔적이 있는지라 누 아래 있던 사람이 보 고서 달려가 부근에 사는 박씨에게 말하여 여러 사람이 와 서보니과연오래된묘자리라이에전군수박상일교리박 해철 주사 박태진 박장억 등이 들은 즉시 살펴보고 써 밀양 의 수로들이 자고로 전해오는 말이 밀성대군의 묘소가 영 남루 부근에 있다는 것이 과연 헛되고 허망한 소리가 아님 을이로써믿음직하다.뷻라며그곳에대군단을세웠다. 그러나 당시 단(壇)을 세울 때 교리 박해철 공의 주장과 대다수의 종인간의주장에타협하지못하고불화로이어졌 는데 교리공의 주장은 단에 휘(諱)자를 삽입하고 제단으로 해야한다는것이었다. 결국 영남루에 단소는 당초 대다수 종인들의 의견을 반 영 ‘密城大君之壇’으로 하여 영친왕 이강 공의 글씨로 세웠 고, 2년 뒤 세운 경덕단은 ‘密城大君諱彦 祭壇’으로 세 워졌는데 이를 두고 ‘밀성박씨 문중 대다수가 영남루 한복 판에 박춘금이 강압으로 세운 시조단소를 부당하다고 한 방증’이라 주장하는 등 터무니없는 망언으로 밀성대군 후 예의 명예를 훼손하고 직위를 이용해 경남도와 밀양시에 압력을가하는것은올바른행동이아니다. 그리고 김 의원의 터무니없는 일방적인 주장을 22일자 신문에 대서특필하고 있는 경남도민일보가 정론지인지 묻 고 싶으며, 구독하는 성손들의 현명한 판단이 요구된다.이 에 전국의 종원들은 경남도의회 김영진에게 강력 하여 전 국 밀성인의 단합된 힘을 보여줄 때가 아닌가 기대해 보면 서김의원의5분발언원문을실어본다. [김영진의원5분발언원문] 반갑습니다. 사랑스러운 343만 경남 도민여러분 경남도의회 기획 행정위원회위원장김영진의원입니다. 혹시 밀양에 있는 영남루를 방문해 보셨습니까? 영남 루는 평양의 부벽루 진주의 촉석루와 더불어 우리나라 3대 누각으로 손꼽힙니다. 영남루 현판에 있는 영남제일루 즉 영남의 가장 뛰어난 누각입니다. 국가보물 제147호인 영남루 마당 한 복판에 개인 성씨 문중 시조단소 가 세워져 있다는 사실은 아십니까? 뒤편은 영남루고 앞은 밀성박씨 시조를 모신 밀성대군 지단인데 일급 민족 반역자 박춘금이 알력으로 세운시조단소입니다. 앞은단소뒤는단군시조이래우리나라팔왕조시조의위패를모신 도문화재 117호 천진궁이지요 국가보물과 경남도문화재가 있는 국유 지 앞마당에 개인문중 시조단소가 버젓이 터 잡고 있다니 이해되십니 까. 1925년 건립 당시 단소와 비석을 세운자 그 이름 박춘금, 박춘금은 일본 제국의회충의원을두번지낸유일한 조선인으로 일본인보다더 뼈속일본인행세를하는토착 왜구며조선인에게가장잔인한 자였습 니다. 국가 보물인 영남루 한복판에 밀성박씨 시조 단소라니 그것은 조선총독부를등에업은박춘금이 박씨문중을만방에과시하고자세 운일본식무덤입니다.밀성박씨시조의밀성대군묘는1922년전까지 는 몰랐으나 어떤 사람이 영남루를 산책하다 뼈 조각을 발견한 후 영 남루에조상을모실거냐 말 것이냐로 격렬한 논쟁을벌입니다. 박춘금은그때박씨문중의최고어른께 권총을겨누고영남루 앞마 당에시조단소를세웁니다. 특히밀양무봉산중턱에세워져있는일본 신사와직선거리로 열까지맞추어마치일본 왕실과 신궁을향해머리 를 조아리는 모습입니다. 이런 낮 부끄러운 과거를 지금 밀성박씨 문 중에서 알고는 있을까요. 1923년 일본인과 일본군경이 조선인 노동 자6661명을학살한 간토대학살당시박춘금은조선인색출과 시신뒤 처리를 도맡았고, 일본군과 경찰들의 비호아래 한손 권총 옆구리 엔 칼을 찬 청부 해결사로 조선인 노동자에겐 잔인무도했기에 정치깡패 의 원조로 불립니다. 그가 조선에서는 일본인 농장에 조선인 노동 쟁 위와소작쟁위를무력집압시켰고, 그가소유한 천포광산은조선동포 를 모질게 혹사시켜 그렇게 번 돈을 조선 총독부에 갖다 바칩니다. 강 원도 정선에 있는 화암동굴 출구에 븮박춘금 단죄비븯가 서있고, 1945년 박춘금이 부민관에서벌였던일제매국연설에격분한 부민관 폭파의 거터는서울시의회앞에있습니다. 그런그는최고악질일급민족반 역자토착왜구로 전국에서원성이 빗발쳤습니다. 먼저밀성박씨문중에당부합니다. 1927년시조박해철과 박씨문중 의 어른들이 밀양시 무안면에 세운 만운재와 경덕단은 밀성박씨 문중 대다수가영남루 한복판에박춘금이 강압으로 세운시조단소를부당 하다고 한 방증입니다. 2002년에 밀양에 묻혀 져 있던 무덤은 파묘되 고 송덕비도 철거되었지만 영남루 앞마당에 세워진 박춘금이 알력으 로 세운시조단소이제결단해야되지않겠습니까. 밀양시에요청합니다.1945년해방된지가76년째이고또96년동안 국유지 안 마당에 밀성 박씨 시조단소가 지금까지 존재한 시시비비를 가려내십시오. 관행으로 계속 묵인 할 것인지 이제 똑바로 잡아야 할 것인지독립항쟁성지인밀양시답게옹골지게판단하십시오 경남도에도 요청합니다. 경남도 일제잔재 청산 조례안에 근거해서 국가보물과 경남문화재가 있는 국유지인 영남루 앞마당의 밀성대군 지단 실태를 조사해고 박씨문중과 밀양시의 결단에 따라 결정하던지 그것도아니면박춘금단죄비설치를촉구하십시오 평생을헌신하시고아주사랑했던박귀목, 사랑했던박귀목 내어머 니당신은자랑스런밀성박씨입니다.경청해주셔서감사합니다. 경남도의회 김영진의원망 언에경악 경남도민일보는 지난 22일자 신문에 김영진 도의원의 허무맹랑한 주 장을 그대로 옮기면서 공분을 사고 있다. 이에 즉각 정정보도를 할 수 있도록전국성손들의현명한 대처가요구된다. (경남도민일보홈페이지화면캡쳐) 밀양밀성대군단은조선총독부를등에업은박춘금이박씨 문중을만방에 과시하고자세운일본식무덤븣박춘금이대군단건립에관 여한기록없어, 망언에강력한법적조치와규탄조치할것 경남 산청군 신안면 진태마을 소재 신계서원 춘향이 지난 16일(9월 中丁) 봉행되었다. 신계서 원의 제례는 경남지역 유림주관으로 봉행된다. 타 지역과 달리 제례에 참석하는 유림인들은 각 자 도포를 지니고 다니며 천권(薦券)을 받은 제 관은 서원에서 제공하는 제복을 입는다. 제복은 삼베 도포와 사대, 유건, 행전 등이고, 제물은 4변 4두를놓는다. 제례는 오전 9시 집사 분정을 위한 개좌를 열 고, 원장으로부터 배향된 분들에 대한 업적과 삶 을 소개받고, 헌관들의 면면을 설명 받는다. 이후 제수(祭需)를 점검하여 엄격한 절차에 따라 제물 봉진과 진설을 한수 집례의 창홀에 따라 진행된 다. 이날 제례는 진주시 유도회 박종식 회장의 집 례로 시작되었으며,초헌관 이완규(李完圭)아헌 관 이병천(李秉千), 종헌관 오진환(吳晉煥) 유학 자가 각각 헌작하였으며, 축관은 밀성박씨 송은 공파 대종회장, 아당공파 종회장을 역임한 박응 상 회장이 독축하면서 40여분에 걸쳐 진행되었 다. 신계서원은 두문동 현인으로 불사이군의 충절 을 지킨 송은 박익 선생과 그의 아들 아당(諱 調), 졸당(諱 聰) 선생을 모신 서원으로 창건은 단성 (丹城)의 유림들과 단계(丹溪)에 살던 후손 상채 (後孫 尙采)와 그 외 운잉(雲仍)들의 협력으로 경영(經營)하기를 1836년(丙申 헌종2)에 시공 (始工)하여 1869년(己亥)에 工役)을 마쳤다. 이 때 간 사(幹事)는 후손 용진(龍振) 公이다. 규모 는 사 우 3 칸 , 강 당 5 칸 , 그 리 고 대 문 3 칸 , 서 재 3 칸 , 주고(酒庫)3칸,소루(小褸)4칸이다. 특히 제기 18점이 지방문화재 제135호로 지정 되어있어신계서원의제례는주목받는다. 송은 선생의 휘는 익(翊 : 1332~1398)이며 자는 태시(太始), 호는 송은(松隱)이다. 공민조에 급 제하여사재소감,예부시랑,중서령,예판 등 벼슬 을 했다. 이성계와 같이 남정북벌을 했다. 그러나 려말 국정이 쇠퇴하고 어지러워지자 벼슬을 버리 고 밀주 송계에 돌아와 정곳은,이목은,길야은 등 여러 선비들과 시국을 개탄하고 걱정하면서 문학 을즐기고토론하였다. 이성계가 등극한 후 송은 선생을 다섯 번이 나 불러 좌우정을 제수하려고 해도 끝내 나가지 않았다. 이들은 세칭 8은이라 했다. 시호는 충숙 (忠肅)이며 두문동 72현으로 경기도 파주의 고려 통일재전에 고려 충절신으로 배향되었고, 그 외 밀양 덕남사 청도 용강서원, 산청 신계서원, 창원 운암서원등에배향되어있다. 예조정랑 아당 박선생(禮曺正郞啞堂朴先 生)은 송은선생의 셋째로서 휘는 조(調) 자는 신 옹(愼翁)호는 아당(啞堂)이다. 3형제가 함께 수 학하여 진사에 오르고 효행으로 천거되어 벼슬은 예조정랑이다. 문장에 뛰어나 야은ㆍ춘정ㆍ독곡 선생 등과 상교하였으며 중년에 경남의령으로 이 거하여 아우 졸당공과 같이 산수간에서 만년을 보냈다. 이조참 판 졸당 박선생(吏曹參判拙堂朴先生) 은 송은 선생의 넷째로 휘는 총(聰), 자는 명옹 (瞑翁), 호는 졸당(拙堂)이다. 태종조에 진사에 오르고 효행으로 천거되어 벼슬이 호조정랑에 이 르렀다.줄후이조참판에증직되었다. /박순제명예기자(경남산청군지부) 신계서원(新溪書院)추향봉행 경남산청의신계서원추향이 9월중정(中丁)일인지난 16일정충사에서거행된가운데참례한 제관이 함께하고있다.(사 진왼쪽부터원임 정태은, 초헌관 이완규, 아헌관 이병천, 종헌관 오진환집례박종식, 축관 박응상, 내임 박순제(총무), 내 임 박승제(회장),해웅봉작순) 불사이군의충절을지킨송은박익선생과 그의아들아당(諱調),졸당(諱聰)선생기려 개좌장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