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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10월31일 일요일 7 (제178호) 기 획 뱚▶6면에서이어짐 맺음말 어머니 상을 당하여 묘 옆에 여막 살이를 하면 서 아침저녁으로 호곡(號哭)하기를 처음 빈소를 차릴 때와 같이 하고 삼년을 마치기를 하루 같이 하니 정성이 동물까지 감동시켜 호랑이가 와서 지키는신기한일도있었다. 왕이 듣고 가상하게 여겨 특별히 이부시랑 지 제고 중추원사에 임명하였다. 985년에 한림학사 가 되어 삼한사기(三韓史記)를 편찬하기를 요청 하였다. 참지정사 정당문학으로 서경과 해서의 두 지역(道)의 민정을 조사하면서 의리가 아니면 취하지 않고 청렴결백하여 스스로 분수를 지키니 조야(朝野)에서청백리라고칭송하였다. 990년에 충효의 정문을 세우게 하고 곡식 일백 석, 은사 발 2,비단 60필을 하사하고 특별히 금자 광록대부를 제수했으나 사양하고 나아가지 않으 니 왕이 하교하기를 “박모(朴某)는 대대로 충효 를 이어받아 벼슬길의 영화에 생각이 없구나”하 였다. 1021년 10월 9일에 별세하니 향년이 71세이 었다. 왕 이 관 원 을 보 내 제 사 를 지 냈 는 데 그 제 문 속 에 븮박모는 사직(社稷)에 공로가 있으니 황하(黃 河)가 띠와 같이 좁아지고 태산이 숫돌처럼 작아 지더라도 잊을 수 없다.븯하였다. 벽상삼한삼중대 광 문하시중 평장사에 추증되고 시호는 문충(文 忠)이다. 문충공의 손자 휘 도덕(度德)의 호는 만취헌 (晩翠軒)으로 태사중서령 민헌공 최충의 사위다. 목종 무신년(1008년)에 태어났다. 덕종 계유년(1 033년)에 문과에 급제하여 합문지후가 되고 정종 병자(1036년)에 한림학사 정당문학 검교태부에 임명되었다. 갑신(甲申,1044년)에 이부상서 문하 시중 참지정사가 되고, 문종 갑오(甲午,1054년) 에 금자광록대부에 임명되었다. 갑진(甲辰, 1064 년)에 별세하니 왕이 조제(弔祭)를 내리고 정문 을 세우게 하였으며, 문효(文孝)라 시호를 내렸 으니, 공으로부터 경주박씨 기일세(起一世)하고 있다. 문효공은 아들(돈·암) 형제를 두었다. 장남 돈 은 문종 기유(己酉, 1069년)에 태어났다. 어머님 섬기기를 지극한 효성으로 하여 그 뜻을 즐겁게 하는 도리에 극진하였고, 우애에 더욱 돈독하여 또한 화목하고 편안한 풍도가 있었다. 조정에서 여러 차례 등용하려고 불렀으나 나아가지 않고 처사 곽여(郭與,고려전기 합문지후,홍주사,예부 원외랑 등을 역임한 관리)와 더불어 금주(金州, 경상남도 김해시의 고려시대 이름)에 숨어 살면 서 그 생활을 즐기는 가운데 생을 마쳤다.그의 아 들 황(璜)은 숙종 임오(壬午, 1102년)에 태어나 인종 병오(丙午,1126년)과거에 급제하여 이부시 랑 간의대부 중서시랑에 임명되었고, 을묘(乙卯, 1135년)에 사신으로서 금(金)나라에 가니 금나 라 임금이 말하기를 ‘너의 임금이 주색에 빠져 인 도를 돌보지 않아 짐(朕)이 폐하고자 하는데 어 떻겠는가?’하기로 공이 말하기를 “임금과 신하는 하늘과 땅과 같은 것이니 신(臣)은 비록 죽을지 언정명령을듣지못하겠습니다.”하였다. 금나라 임금이 크게 화를 내어 말하기를 ‘속국 의 배신(陪臣)으로서 천자의 명령을 따르지 않으 니 그 죄를 죽어도 용서하지 못하리라.’하고는 곧 형벌을 가했는데 굴복하지 않고 죽었다. 금나라 도 그 충성에 감동하여 호상(護喪)하여 고국으로 돌려보내니 왕이 분개하고 추모하면서 븮박모는 살 아 서 는 된 서 리 를 맞 아 도 굽 히 지 않 는 절 개 를 가졌고, 죽어서는 해를 꿰뚫는 충신이 되었으니 이는 그 선조 충렬공(휘 제상)의 남긴 가르침과 절개가 백대에 흘러내려온 것이 아니겠는가?븯하 고 비단 1백 단(段)과 쌀 2천석을 부의하였으며, 김부식에게 명하여 제문을 내리기를 븮마음속에 오로지 곧은 절개를 지녀 죽음을 당해도 변하지 않았고, 인륜(人倫)을 밝히고 도리를 다했으니 영원토록 그 의(義)를 기억하리라븯하고 왕례로 장사를 지냈다. 또 정려를 세우도록 명령하고 개 부의 동동삼사문하시중에 추증하고 문열(文烈) 이라시호를내렸다. 문열공의 아들 소( 쏟)의 호는 송국재(松菊齋), 인종 계묘(癸卯, 1123년)에 태어나 19세에 과거 에 급제하여 예문관 수찬으로 감찰어사에 옮긴 후 한림을 거쳐 집현전태학사로 승진하였고, 이 부시랑으로 옮겼다. 의종 때 대장군 박지순, 병마 사 김영석 등과 함께 강서의 도적을 토벌하고 돌 아와서 정당문학 겸 간관에 임명되었다. 그때 지 주사 정습명이 남들의 무고에 의하여 독약을 먹 고 자살하니 공은 성재대관 14인과 함께 조서(詔 書)를 받들지 않고 북을 울린 후 곧바로 물러났 다. 임금이 여러 차례 부르는 교지를 내렸으나 사 양하고 나가지를 않고 박지순과 더불어 산수를 돌아다니면서 시를 읊어 회포를 푸니 사람들이 븮탁행군자븯(卓行君子)라 불렀다. 문하평장사에 추증되고 월산군에 붕해지고 시호는 절효(節孝) 이다. 절효공의 아들 순(純)의 호는 석탄(石灘)으로 의종 경오(庚午,1150년)에 태어나 1174년 문과 을과에 급제하여 보문각 시제로 임용되고 여러 차례 옮겨 이부시랑이 되었으며, 좌승지 한림학 사 중추원사로 옮겼다. 남경유수로 나갔다가 돌 아와서 병부상서로 임명되고 정미(丁未,1187년) 에 공부상서에 제수되었는데 조원정이 상장군 석 인과 더불어 반역을 꾀하여 공이 형부상서 백임 지 등과 함께 보정문 밖에서 사로잡아 죽이니, 정 국공신으로책정되었는데공이일등이었다. 정사(丁巳,1197년)에 특별히 정당문학 검교태 부로 제수되고, 기미(己未,1199년)에 우복야 중 서시랑에 제수되었으며, 계림군(桂林君)에 봉해 졌다. 1225년 10월 15일에 별세하니 임금이 그 죽 음을 슬퍼하여 3일 동안 조회를 폐하였으며,관원 을 파견하여 제사를 지냈고, 문충(文忠)이라는 시호를내렸다. 문충공의 아들 희(希)는 음보(蔭補, 과거를 보 지 않고 조상의 덕으로 등용하는 제도)로 동궁위 가 되고,감찰어사에 임명되었다.경신(庚申,1260 년)에 종성부사로 나갔는데 물과 같은 맑은 행정 을 하니 아전이나 백성들이 감복해 따랐고, 남경 유수로 전근이 되니 백성들이 1년간 만 더 있게 해주기를 원해서 구임(舊任)에 머물렀다. 종성부 사때의선정으로백성들이거사비를세웠다. 부사공의 아들 종태(從台)는 무오(戊午, 1258 년)에 향시 진사에 합격하여 남경판관으로 나갔 다가 임기가 만료되어 가족들을 데리고 명주(溟 州,강원 강릉지역)로 돌아오니 당시의 이름난 선 비들이 다 모여서 본을 받았다. 충렬왕이 편전에 서 그 이름을 듣고 불러서 중서령에 임명했는데 벼슬을 버리고 동쪽으로 돌아오니 민부전서의 벼 슬을내렸다. 민부전서 휘 종태의 아들 연(演)은 충렬왕 정 해(丁亥, 1287년)에 태어나 신축(辛丑, 1301년) 에 익재 이제현과 더불어 문과에 급제했는데 두 사람의 나이가 15세이어서 임금이 가상하게 여겨 성균관에 들어가게 하고 예문관 겸열에 임명하였 다. 충열왕 때 사신 정가신·유청신과 함께 이현궁 에 들어가니 왕이 하교하기를 븮동성간에 혼인을 하지 않는 것은 천하에 두루 통하는 도리인데 하 물며 우리나라는 공부자(공자)를 도(道)를 행하 는 나라임에랴? 지금부터 이후로는 국내의 이름 있는 성씨 15가문에게 왕실과 대대로 통혼하기를 허락하겠다.븯하였는데 곧 시조왕의 후예 박씨와 경순왕의김씨등이다. 충숙왕 을묘(乙卯, 1315년)에 국자박사 겸 중 서사인에 임명되고 어사대부 전객령을 거쳐 충목 왕 정해(丁亥, 1347년)에 별세하였으니 향년 61 세이다.아들둘을두었으니원계·지계이다. 장자 원계는 경주박씨 세계를 이었고, 차남 지 계는강릉박씨의세계를이었다. 경주박씨의 세계를 이은 장자 원계(元桂)의 호 는 석뢰(石瀨)이다. 충선왕 계축(癸丑,1313년)에 태어나 충숙왕 경오(庚午, 1330년)에 학문에 힘 써 과거에 급제하여 합문지후에 임명되었고, 성 균관 박사를 거쳐 장령으로 옮겼으나 간관 신군 평과 함께 벼슬을 버리고 고향으로 돌아가서 곤 궁함을 견디면서 스스로 절개를 지켰다. 충혜왕 이 복위하자 신사(辛巳, 1341년)에 불려서 집의 에 임명되고 보문각 응교를 거쳐 예부전서로 전 근하였다. 충정왕 원년(1349년)에 보성군수에 임명되고 또 강진군수를 맡았다가 임기가 만료되어 금주 (현 김해)로 옮겼다. 공민왕 을미(乙未,1355년) 에 일찍이 강릉에 나아가 백성들을 위안하고 개 성부윤이 되었을 적에 다 같이 훌륭한 공적으로 소문이 났었는데 덕을 칭송하는 비(碑)를 세우니 왕이 말하기를 뷺지금 이 박모는 청렴과 근신으로 자신을 단속하고 인자(仁慈)로 백성을 위안하니 옛날의 훌륭한 관리에 대하여 부끄럽지 않다고 할 수 있다.뷻하고 불러들여 예문관 대제학에 임명 하였으며,정당문학에 옮겼다가 이부상서를 지냈 는데 갑인(甲寅,1374년)에 총애를 받던 환관(宦 官,내시) 최만생과 총애를 받던 신하 홍윤 등이 공민왕을 시해하고 신우(辛禑, 훗날 우왕)를 세 우니 포은 정몽주가 앞장서서 대의(大義)를 주창 하고 공의 형제 및 김구용,박상충 등 10여인과 더 불어 굳게 논쟁하였다. 포은은 언양현으로 귀양 가고 공은 강계부에 귀양갔으며, 박상충은 사형 을 당했다.공은 유배에서 풀려 돌아온 후 10년 동 안 자취를 감추고 나오지 않았는데 포은이 조정 에 추천하여 여러 차례 등용하려고 불렀으나 나 아가지 않았다. 공은 청렴하고 정의에 분개하는 마음을 가졌으며, 평탄할 때와 험준할 때에 한결 같은 절도를 지켰는데 이 사실이 여지승람 및 오 군(五郡)의 읍지. 고려사, 신군평전(申君平傳)에 전해진다. 아들 다섯을 두었는데 자신(自仁)·자의(自義) ·자례(自禮)·자지(自智)·자신(自信)으로 위로 인의예지 사형제는 기록이 전해지지 않고 다섯째 자신은 공민왕 무술(戊戌, 1358년)에 태어나 기 사(己巳,1389년)에 문과에 급제하여 검열에 임명 되고, 밀직이 되었다가 예문관 응교 겸 국자직학 을 지냈는데 조선이 개국함에 이르러 두문불출하 고 스스로 절개를 지키면서 양촌 권근, 호정 하륜 과 더불어 도의로서 사귀었다. 우의정 정탁이 힘 써 조정에 추천하여 여러 차례 불렀으나 나아가 지 않았다. 1419년 별세하니 우찬성에 추증되었 다. 아들 둘을 두었는데 장자 앙( 왑)은 세종29년에 사마시에 급제하였으며 1451년(조선 문종1)에 문과(文科)에 급제하였으며 홍문관(弘文館)의 저작(著作)을 지냈으나 계유정난(癸酉靖難)으 로 수양대군(首陽大君)이 어린 단종(端宗)을 쫓 아내고 왕위(王位)를 찬탈하자 이를 개탄하여 벼슬의 뜻을 버리고 매월당(梅月堂) 김시습(金 時習:생육신의 한사람)과 더불어 수양산(首陽 山)으로 들어가 교분이 두터운 충정공(忠貞公) 박심문(朴審門) 등과 함께 도의(道義)를 강론하 며 관리에 등용하려 불러도 나아가지 아니하고, 만년에 함안(咸安)에 복거(卜居)하여 절의를 지 켰다. 차남 근무(根茂)의 호는 춘파(春坡), 형 저작 공과 함안으로 옮겼다가 전남 강진으로 이거했다 가 차 남 형 손 (亨 孫 ) 을 데 리 고 진 도 로 옮 겨 영 재 교육에 힘쓰고, 해남에서 진도로 새롭게 개편되 는군의규모를설정하는데큰공을세웠다. 춘파공은 아들 숭지(崇地)·형손(亨孫)을 두었 는데 장자 숭지는 강진에 남고 차남 형손의 호 (號)는 부곡(富谷), 1442년(세종24)에 태어났다. 아버지 춘파공(휘 근무)와 함께 강진에서 진도로 이거하면서 후손들은 춘파공파 진도종중으로 세 계를이어오고있다. 부곡(富谷)공은 아들 3형제를 두었는데 일령 (一齡)·억령(億齡)·희령(希齡)이다. 장자 일령 (一齡)의 호는 은포(隱圃),세조 10년 을유(乙酉, 1465년)에 태어났다. 선조의 유풍을 이어받아 자 녀교육에힘썼다. 차남 억령(億齡)은 1469년 태어나 가문의 유풍 을 따랐으며, 그의 증손 계원(繼遠)과 현손 하배 (厦培)·수배(修培)가 각각무과에급제하면서 계 원은 선전관, 하배와 수배는 수문장으로 가문을 빛냈다. 부곡공의 셋째 희령(希齡)의 호는 석애(石崖) 성종 3년(壬辰,1472년)에 태어나 1510년 일어난 삼포왜란에 백의로서 참여하여 큰 공을 세우고 1 530년 8월 9일에 무과에 급제하여 순영중군(巡營 中軍, 각 도에 배치되어 관찰사를 보좌하던 정삼 품외관직)을지냈다. 석애공은 아들 넷을 두었는데 총린·총룡·총량· 총림이다. 장남 총룡은 음직으로 감찰이고, 그의 아들 대흠(大欽)은 1592년 임진왜란에 순절하니 음(陰)으로병부랑이다. 차남 총룡은 음(陰)으로 병조정랑으로 증직되 고, 아들 둘을 두었는데 장자 대해(大海)의 호는 소우(小愚),선조때통훈대부에가자되었다. 차남 대형(大泂)의 호는 운곡(雲谷)으로 타고 난 효자이다. 1532년 불행하게도 유복자로 태어 났는데 여섯 살 때에 어머니에게 물어 유복자임 을 알았다. 이 사실을 알고 나서 하늘을 울부짖으 며 피눈물을 흘리더니 이때부터 어육과 술, 담배 등을 입에 대지 않고 이른 새벽 늦은 밤에 아버지 묘소를 살피며 돌아가신 분 섬기기를 생존처럼 하였고, 어머니 공양하기에 몸을 가리지 않았다. 마 침 엄 동 을 만 나 어 머 님 이 감 기 에 들 어 약 과 침 이 무효한데 어머님이 숭어 먹기를 원하거늘 즉 시 남 천 다 리 밑 에 가 서 얼 음 을 깨 고 울 부 짖 으 니 홀연히 월척의 은비늘 고기가 뛰어 나와 갖고 돌 아와 공양하여 과연 병이 나으시니 효성이 하늘 에닿은것이다. 마침 그 무렵 순찰사 조상우가 이 고을에 당도 하여 안찰하다가 공의 사행을 듣고 불러 앉히고 다(茶)와 음식을 대접하니 공이 진미를 사양하고 소채류만 먹는지라 조공이 그 연유를 물은즉 공 께서 그 곡절을 개진하고 슬픈 눈물을 금치 못하 니 조공이 거짓 노한 듯 꾸짖어 말하기를 “어른이 주는 것을 감히 사양치 못한다는 예절을 네 듣지 못했더냐?”하이 공이 땅에 엎드려 울음으로 호소 하니 그 장면을 보고 듣는 사람 모두 다 감동하였 으니 출천의 효성이라 조공이 이 사실을 조정에 올려 특별히 정려가 내려지고, 가선대부에 가자 (加資)하니 선조 4년(1571년)이다. 효자 대형의 5대손 일표(日表)는 어버이 3년 상 시묘살이에 호랑이가 길을 인도했다는 효자로 가선대부에가자되었다. 석애공의 셋째 총량의 호는 신재(愼齋)이고 아 들 대춘(大春)은 통훈대부에 증직되는 등 효쟈효 부열녀가줄을잇는다. 동계(東桂)는 수직으로 가선대부에 가자되어 부인 진주소씨에게도 정부인의 은전을 내렸고, 동영(東英)의 처 죽산박씨는 효부이고, 응주(應 柱),봉흔(鳳欣)이효자로드러났다. 경주박씨 진도종중은 부곡공의 아들과 손자대 에 이르러 관직과 호를 따 각각 소문중을 형성하 며 120여 세대로 번성하였다.그러나 최근 세속에 따라 도시로 나가면서 숭조와 위선 사업에 소홀 해지고 있다. 판단하여 종원들의 결속을 위해 세 파(世派)구분을 떠나 대종중에서 일원화 하는 사 업을추진중에있다. 근세에 이르러 문중을 빛낸 인물로는 진도군 초 대 공의(公醫)를 지낸 봉흔(鳳欣, 1869~1905), 진 도초등학교를 설립하고 교장을 지낸 봉우(鳳瑀,1 872~1941), 진도중학교 초대,4대 교장을 역임한 윤규(胤奎,1901~1969), 광주 사세청 총무국장(청 장 서리)를 역임한 흥재(興在, 1905~1969), 제2대 국회의원에 출마하고 6븡25때 적에게 피살된 두재 (斗在,1909~1950),전라남도 장학관(현재 도교육 감)을 역임한 석주(錫周,1911~1982).목포세무서 장을 지낸 항춘(恒春,1914~1984), 진도해운운수 회사 사장을 지낸 병완( 빙浣,1920~1985), 구례·진 도 군수를 지낸 종평(鍾平, 1925~2008), 진도여자 중·고등학교를 설립 이사장을 지낸 봉갑(烽胛,19 39~ ),한국광업진흥공사사장을 지낸 문수(文洙, 1941~ ), 해남. 진도 민주공화당 위원장과 진도면 장(현 읍장)을 9년 역임한 재철(載澈,1923~2004), 치안본부(현 경찰청)직할 고속도로 순찰대장,광 주시내 5개 경찰서 정보과장을 역임하고 총경 퇴 직한 우성(釪成, 1941생), 축협조합장을 지낸 종 구(1941년 생), 현 진도 문화원장과 춘파공파 진 도종회장 주언(柱彦, 1945생), 한국 전통 무예 기 천문 문장(門長) 사규(1949생), 한국도로공사 호 남 지사장을 역임한 병철(秉澈, 1953생) 등 많은 후손들이 각계각층에서 두각을 보이고 있으며, 행정직 사무관급으로 퇴직한 종원들이 헤아릴 수 없으며, 특히 교육계에서 몸담아 교장으로 퇴직 한 종 원 들 이 많 아 입 향 6 0 0 여 년 을 이 어 온 토 호 성 씨로종중을빛내고있다. 경주박씨는 충절의 가문이라 할 수 있다. 신라 만고충신 관설당 박제상 선생은 왜놈에 맞서 충 절을 지켰고, 청허당(淸虛堂) 휘 광염(光廉)은 타고난 효자이자 청백리, 문열공 황(璜)은 금나 라에서 절의를 지키며 목숨을 내놓았다. 월산군 절효공(휘 소)는 고려 의종 때 뛰어난 행실을 가 진성현으로탁행군자(卓行君子)라불렸다. 조선조에 들어와 문목공(휘 원계)은 불사이군 하였으며, 저작공 앙과 춘파공 근무는 수양대군 의 왕위찬탈을 지켜보며 낙향하여 은거하는 등 충과효의명성을이어나갔다. 그리고 진도 입도 이후 대형은 출천의 효를 실 천하며 정려가 내려졌으니 이 또한 선조들이 대 대로 쌓아온 미덕(美德)의 유풍(遺風)이라 할 수 있겠다. 입향 600여년을 이어오는 동안 그 후손들은 지 역의 토호성씨로 자리 잡으면서 후학을 길러내기 위해 진도초등학교와 중고등학교를 설립하는 등 교 육 열 을 불 태 워 많 은 후 손 들 이 현 재 교 육 계 에 몸을담고있다. 특히 일본인들이 관설당 선조를 흠모하며 사당 (遺芳院)를 세워 향화를 받들고 있다는 것을 알 고 최초 입향한 고군면 벽파리 선영에 단을 세워 선조를 기리고 일제 강점기에는 진도읍 교동리 북상마을 언덕에 1938년 유방사를 세워 관설당을 비롯 문목공(휘 원계), 춘파공(휘 근무)의 위패 를 봉안하고 추원보본의 정성을 다하고 있어 귀 감이되고있다. 그리고 관설당 후예가 하나가 되도록 염원하고 있어그꿈이이루어지길함께염원해본다. 효자운곡공휘대형의정려 진도군군내면월가리342번지 역주동국신속삼강행실도(1617년(광해군9) 貢生朴大泂珍島郡人八歲喪其父執喪三年哀毁過禮服 굼 仍不食肉今上朝 門 공생박대형은진도군의사람이니.‘공냝’은‘ㆍ’의변동으로‘공생’이되었다.‘딘도〉진도’는구개음화를거치면서소리값이달라진 것이다. 여괡서레그아비죽거걖상낽자바삼년을슬허샹땪여녜도의넘게땪고거상벋고인땪여고기먹디아니땪니라금샹됴애졍문땪 시니라 번역문[대형집상-박대형이상례를치르다] 공생박대형은진도군사람이다.여덟살에그아비가죽거늘상사를치러삼년을슬퍼하며예법에넘게하고,거상을벋고인하여고 기를먹지아니하였다.금상때정문을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