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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9월30일 목요일 12 (제177호) 기획 조선말 영남 지역에는 다양한 성향을 지닌 학맥이 존재하면서학파 간의 대립과 갈등이 이어지고 있었다.그 러나 19세기 후반에 이르자 상호학술교류 를통해치열한토론을하거나다른학파의학설을겸취(兼取)하는새로운현상이일어나게되는데,바로이러 한흐름의정점에만성박치복선생이있었 다.선생은함안 출신으로 정재 유치명(定齋柳致明,1777∼1861)문하에 수학하여 퇴계학맥을계승하였고,다 시성재 허전(性齋許傳,1797~1886)의문 하에서성호이익의학맥을전수받았다.그리고삼가(三嘉.합천)에서오랫동안강학하여경상우도(낙동강우 측지역으로주로中西경남일대)의학문을 일으키는데선도적역할을하였다.16권분량의『만성문집』을남겼는데그가운데『대동속악부(大東俗樂府)』 가들어있다.『대동속악부(大東俗樂府)』는 총28편으로구성되어있는데,조선왕조의창업과치세,충절과효열,비정(秕政)과폐습(弊習)에대한비판,명 (明)에대한자세등이담겨있어당시조선 왕조의실상과유자(儒者)들의역사의식을엿볼수있는좋은자료가된다.그래서이번호에서는만성선생의 생애와『대동속악부(大東俗樂府)』에 대 해 소개해보기로한다.만성 박치복(晩醒 朴致馥)은 1824년 경남 함안 군 안인리(현, 산인면 내인리)에서 태어났다. 자 (字)는 훈경(薰卿)이고 호(號)는 만성(晩醒)이 다. 본관은 밀양(밀성)으로 밀성대군 후손 12중 조의한분인영동정공(諱元光)의후예이다. 영동정공의 7세손으로 조선 초 경상좌도 도절 제사를 지낸 휘 언충(彦忠)이 고려 말 개성에서 밀양으로 옮겨와 살다가 그의 증손 참군공 휘 경 현(景玄)이 함안으로 이거한 후, 그의 자손들이 함안을 중심으로 뿌리를 내리게 되었다. 참군공 이 밀양에서 함안으로 이거한 연유는 절제사공의 아우 사재감정공 휘 홍신(弘信)의 외손자인 점필 재 김종직( 탕畢齋 金宗直)이 무오사화(戊午士 禍)에 연루되어 부관참시(剖棺斬屍)당하는 참극 을 당하자 화(禍)를 모면하기 위해 함안의 궁벽 한곳으로피신했던것이다. 참군공의 현손 동천(桐川) 오(旿)는 유헌 정황 (遊軒 丁煌)과 구암 이정(龜巖 李楨)의 문하에서 수학하여 성리학에 조예가 깊어 많은 선비들로부 터 추앙을 받았고, 사후 형조판서에 증직되고, 여 양서원(廬陽書院) 배향되었다. 동천공은 임진왜 란이 터지자 함안에서 창의하여 의병을 아들, 진 영(震英)에게 물려주어 1592년 4월 김해성(金海 城)에 침입한 왜적(倭賊)을 막도록 하고, 단성 (丹城) 현감 대소헌 조종도(大笑軒 趙宗道)의 임 소로달려가의병을규합하였다. 공의 아들 광서(匡西) 진영(震英)은 의병을 이 끌고 김해성으로 달려가 왜적과 결사항전 하였으 나, 중과부적(衆寡不敵)으로 성(城)이 함락되자 구사일생(九死一生)으로 탈출하여 함안으로 돌 아와 군수 유숭인(柳崇仁)과 재차 의병을 모집하 였다. 왜적이 당항포 해전에서 패해 함안과 의령 (宜寧)을 거쳐 전라도로 진격하고자 하였으나 함 안을 사수(死守)하여 적의 진로를 차단하는데 성 공하였다. 이때 전라좌수 이순신(李舜臣) 장군이 광서를 불러 치하하고, 함안은 지형이 낮아 왜적 과 싸우기에 불리하니, 관군에 편입하여 왜적을 물리치는데, 일조(一助)할 것을 당부하였다. 이 에 따라 초유사 김성일(金誠一) 밑에 잠시 머물 다 도원수 권율(權慄) 장군의 휘하에 종군하여 수많은전공을세웠다. 광서는 전란 후 논공행상에서 선무원종2등 공 신에 오르고, 관직에 나아가 조선의 서북방을 방 어하는 장수로 크게 활약하였다. 당시 황해도 방 어사로 재임할 시, 1623년 이괄(李适)이 난을 일 으켜, 인조(仁祖)는 공주(公州)로 파천(播遷)하 는 지경에 이르렀다. 이때 광서는 별장으로 출전 하여 반란군 진영의 이윤서(李胤緖)장군을 회유 하여 병졸 3천여 명과 더불어 투항토록 하고, 아 들 임룡(任龍)을 시켜 한양(漢陽)의 외각인 동교 (東橋)에 관군을 매복시키고, 궁궐에 난입한 반 란군을 유인하여 대파하였다. 이로 인해 난을 진 압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여 부자가 함께 진 무 원 종 1 등 공 신 에 오 르 는 영 예 를 안 게 되 었 다 . 그러나 잠시 벼슬살이를 하다 그만두고, 낙향 하여 평소 좋아하던 독서와 후학 양성에 몰두하 였다. 그러던 중 병자호란이 발발하자 근왕(勤 王)하고자 향병(鄕兵)을 모아 아들 임룡과 남한 산성을 향하던 중 조령(鳥嶺)에서 오랑캐와 화의 (和議)했다는 소식을 듣고 비분통곡하다 다시 향 리로 돌아와서는 독서와 거문고를 벗 삼아 여생 을보냈다. 그는 국가와 민족을 위하여 선비정신을 발휘하 여 살신성인(殺身成仁)의 자세로 활약한 공으로 자헌대부에 증직되었고,효종(孝宗)때 숭정대부 판돈녕부사 겸 오위도총부 도총관에 추증되고, 정조(正祖) 때 존주록(尊周錄)에 등재되었다. 당 시 정조가 직접 적은 봉안문(奉安文)에 “병란(丙 亂 ) 때 영 남 에 서 의 ( 義 )를 지 킨 자 는 동 계 정 온 (桐溪 鄭蘊)과 광서 박진영(匡西 朴震英)이 있을 뿐이라”라고 극찬하였다. 고종(高宗) 때 무숙(武 肅)이라는 시호가 내려지고, 대보단(大報壇)에 배향되었으며,국불천위(國不遷位)에봉해졌다. 무숙공 광서선생의 7대손이 바로 만성선생이다. 종가에 만권루(萬卷樓)라는 서고(書庫)가 있는데 그 유례는 다음과 같다. 무인(武人)이었으나 항상 금 서(琴書)를 벗 삼 은 무숙 공의 아 들 임룡 (任龍)은 효종 재위 청(靑)나라와 러시아 전쟁 시에 조선 파 병군 부원수로 참전하여 큰 공(功)을 세워, 청나라 황제의 요청으로 가선대부(嘉善大夫) 병조참지에 오르게 되고,다섯 수레의 서적을 청나라 황제로부 터직접선물로받게되었다.일찍벼슬길에서물러 나 미수 허목 (眉 쑴 許穆)의 문하에 들어가 학문을 강마(講磨)하였으며, 공이 소장하던 서적을 종가 로 옮 겨와 서 고를 지 어 이를 보 관하 게 되었 는데 이 것이 만권루의 기원(起源)이 되었다.(조선시대 서 적 일 만 권 의 분 량은 지 금의 십만 권 이상 으로 한산 할 수 있 는 방대 한 량이 다 .) 만성공의 조부 휘 형천(馨天)은 진사시에 장원 하였고, 부친 오려공 준번(俊蕃)은 학식과 문장 으로 당시 추중(推重)을 받아 고을과 도(道)의 천거를 받았다. 문집이 있고 성재 허전 선생이 행 장을 지었다. 조모 이씨(李氏) 부인은 학문에 능 해 직접 효경(孝經)과 충경(忠經)을 만성과 그의 아우매옥치회(梅屋致晦)에게가르쳤다. 모친 곽씨(郭氏)부인은 7세 때 혼자 있는데 집 에 불이 나자 신주(神主-위패)부터 싸서 피신하 는 영특함을 보였다. 만성이 학문적으로 대성한 것은 본인의 자질과 노력의 결과이겠지만, 이같 이 가정의 학문적 분위기에도 힘입은 바 컸음을 알수있다. 9세 때 칠서(七書) 읽기를 마쳤는데도 조모 이 씨 부인이 회초리로 독려하였다. 10여 세 때에 백 일장에 장원하였는데, 사방에서 그 시를 전하여 외웠다. 이를 보고 조모가 당황한 얼굴로 “우리 집 애를 망치는구나!”라고 신동의 재능을 경계하 였다. 그 후 향리의 선비들이 한천재(寒泉齋)에 모여 글을 읽는다는 소문을 듣고 책을 가지고 빨 리 한천재로 가라고 분부했다.한천재는 집에서 7 리 떨어져 있었는데, 정월 초하룻날 집을 떠나 섣 달 그믐날에야 돌아오게 하는 학문 연마장이었 다. 이렇게 하기를 7년 동안 『논어(論語)』와 『춘 추(春秋)』 등을 일만 번 읽었다고 한다. 선생의 학문바탕은이미이때이루어졌다. 그때 고을의 어른인 안효순(安孝淳)이란 분이 악양루(岳陽樓)를 막 지었는데, 특히 경치가 빼 어났다. 안공이 이 정자를 만성 선생에게 주어 관 리하게 하고 싶어, 한때 충익공(忠翼公) 곽재우 선생이 창암정을 지어 이를 어진 사람에게 준 사 례를 은근히 이야기했더니, 선생이 이를 듣고 곧 바로 자리 구석으로 가서 받기를 사양하는 「사수 취여론(辭受取予論」을 지어 올렸다. 안공(安公) 이 이를 보고 어리둥절하며 “아마도 내 정자는 썩 고말겠구나!”라고탄식했다. 1845년 22세 때 대책(對策)으로 향시(鄕試)에 급제했다. 선생은 총각의 신분으로 대평(大坪:안 동 임동면에 있는 마을)으로 가서 정재 유치명 선 생께 속수(束脩)의 예를 올렸다. 유선생은 만성 의 심지(心志)를 시험해 보고는 크게 탄복하고 장려하면서 사서(四書)에 중심을 두되 침잠(沈 潛)하여 인심과 도심을 정밀히 구분하는 공부에 힘쓰도록독려했다. 丙午(1846)년에 조모 상을 당하고 己酉(1849) 년에 모친상을 당하고,癸丑(1853)년에 부친상을 당하였다. 전후의 상(喪)에 예법을 다하니 사람 들이그의순수한효성에감복하였다. 庚申(1860)년에 가족 을 이끌 고, 경 남 합 천 삼가 현(三嘉縣)의 황매산(黃梅山)으로 들어갔다. 원근 에서 배우려는 사람들이 많이 모여들어 시냇가 집 에는 수 용할 수가 없게 되자 , 백련 암(白蓮菴)의 옛 터에다 백련재(白鍊齋)를 지었다. 당시 백련재에 거처 하면 서 학업 을 닦는 사 람이 수 백 명 이나 되 었 다. 『소학(小學)』으로 학문의 바탕을 삼은 점필재 ( 탕畢齋:金宗直)선생의 정신을 본받아 「소학강규 (小學講規)」를만들어학생들을독려했다. 당시 백련재에는 단계 김인섭(端磎 金麟燮), 후산 허유(后山 許愈), 면우 곽종석( 뮐宇 郭 鍾 錫) 등이 와서 머무르며 강학(講學)하였고, 자동 이정모(紫東 李正摸), 물천 김진호(勿川 金鎭祜) 등이 경서(經書)를 들고 와 질문하였는데 이때의 문답(問答) 내용을 기록한 책이 곧 『백련재강록 (白鍊齋講錄)』이다. 辛酉(1861)년 9월에 스승 정재(柳致明)선생의 부음을 듣고 만사(挽詞)와 제문(祭文)을 지어 올 리며, 자신의 학문이 완성되기도 전에 스승을 잃 게됨을아쉬워하였다. 고종(高宗) 甲子(1864)년에 성재(性齋) 허전 (許傳)이 김해부사(金海府使)가 되었는데, 관아 에 공여당(公餘堂)을 열어 사방에서 배우러 오는 사람을 맞아들였다. 선생은 아우 매옥(梅屋)공과 함께 가서 뵈었다. 허 선생은 만성과 더불어 이야 기를 해보고는 “내가 많은 선비들을 만나보았지 만 그대 같은 사람은 아직 보지 못했다”고 감탄하 며 국사(國士: 나라 안에서 견줄 만한 사람이 없 는 아주 뛰어난 선비)로 칭송하였다.그리고는 자 신의 저서 『사의(士義)』와 『천민경덕설(天民敬 德設)』을내어주었다. 戊辰(1868)년 조정에서 학행과 경전에 능한 선 비를 추천하게 하였는데, 경상도관찰사 이삼현 (李參鉉)이 선생을 현량(賢良)으로 천거(薦擧) 하면서 “세상을 구제할 경륜과 나라를 윤택하게 할 문장(濟世經綸 潤國文章)”지닌 분이라고 칭 송하였다. 辛未(1871)년에 선생의 노력으로 칠대조(七大 祖) 광서(匡西)선생에게 무숙공이라는 시호가 내려지고 대보단에 배향되는 은전을 입게 되었 다. 이 해 고종 임금이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의 공 신 자손을 대상으로 한 일종의 과거시험인 충량 과(忠良科)를 실시했는데 주관 부서에서 과제 (科題)로 낸 것이 ‘개화신법(開化新法)’이었다. 선생은 과제가 자기 뜻(衛正斥邪)과는 다르다는 것을 알고는 분연히 답안지를 던져 버리고 나와 버렸다. 이에 이조판서 한장석(韓章錫)이 시험장 으로부터 달려와 “우리의 불찰로 공에게 죄인이 되었습니다.”라고고개를숙였다. 辛巳(1881)년에 성재(性齋) 허 선생(許先生)이 만성선생을 ‘임금을 도울 만한 인재’ 라고 조정에 천거하였으나 등용되지 못했다. 이듬해 진사시에 합격하니 59세였다. 당시 성균관 약장(約長)이 되 었는데, 유생들이 주색에 빠져 학업을 폐기하였으 므로 이에 만성 선생이 배우고 익히는 방안을 제시 하 여 학 문에 힘 쓰도 록 하였 다. 또한 뜻 을 같이 하는 관생(館生)들과 ‘반수계( 妙水契)’를 결성 하여 성 균관의기풍을바로잡는데힘을다하였다. 甲申(1884)년에 나라에서 의복제도를 변경하 라고 명령하기에 선생은 성균관의 여러 학생들을 거느리고 항의하는 상소를 하여 간쟁(諫諍)했지 만,국왕은 윤허(允許)하지 않았다.이에 권당(捲 堂)하고는 고향으로 돌아와 띠 집을 지어 소헌 (小軒)이라이름짓고거기에기거하였다. 丙戌(1886)년 여름에 성재(性齋)허 선생(許先 生)이 이질을 앓았기에 선생은 직접 나아가 병시 중을 들었다. 허 선생이 선생의 손을 잡고 작별하 며 말하기를 “성호 순암을 통해서 전해진 학맥이 그대에게 있으니 그대는 힘쓸지어다.”라고 당부 했다. 9월에 허 선생께서 졸하자 여러 선비들과 예법에맞게장례를치루었다. 丁亥(1887)년에 이조(吏曹)에서, 관찰사가 보 고한 것에 근거해서 선생의 학문의 실상을 아뢰 자,임금님께서 “내가 듣건대 그 사람은 애석하게 도 이미 늙었다 하니, 실직(實職)은 품계에 제한 이 있으니, 차함(借啣-이름만 주는 벼슬)을 주는 편이 좋겠다.”라고 하였다.그러나 다음날 서열에 의거하지 않고 발탁하여 의금부(義禁府) 도사 (都事)를 제수했다. 그 후 여러 번 참상직(參上 職)을 주어 서연(書筵-왕세자 교육기관)의 왕세 자 사부로 제수했으나 당파에 얽혀 많은 제지를 받았다. 그러나 선생은 이미 벼슬할 마음이 없었 기 때 문 에 이 에 연 연 치 않 고 오 직 제 자 들 의 교 육 에만마음을다할뿐이었다. 甲午(1894)년 여름, 병이 위독하였는데도 「이 기설(理氣說)」을 지어서 참된 학문을 어지럽히 는 무리들을 경계하였다. 아들 호선(祜善)과 제 자 김진호(金鎭祜), 김상순(金象洵)을 불러 이르 기를, “마지막 보내는 절차인 상례(喪禮)는 『주 자가례(朱子家禮)』와 『사의(士儀)』를 참고하여 쓰도록 하라”고 했다. 시자(侍者)에게 명하여 벽 에다 “存順沒寧 是曰事天-순리대로 살다 죽으니 편안하네.이를 일러 하늘을 섬긴다고 하네”를 적 도 록 했 다 . 임 종 에 임 해 다 른 말 은 없 고 다 만 “ 다 른 학문이 침범하여 유학(儒學)이 길을 잃었으니 근심스럽구나.”라는 말만 남겼다. 6월 4일 삼가현 (三嘉縣) 연동(淵洞)의 병촉실(炳燭室-만성의 서재)에서 세상을 떠니 춘추 71세였다. 강학지소 (講學地所) 인근 연동 신좌(辛坐)의 언덕에 안장 하였다. 이때는 청일전쟁(淸日戰爭)으로 나라 안 이 어지럽고 왕래가 차단되고 흉년으로 밥도 먹 지 못하는 형편이었는데도 만장을 지어 들고 와 서 제전(祭奠)을 드리는 사람이 줄을 이었다. 문 인(門人)들 가운데서 가마(加麻-상주 역할)한 사람이 수십 명이나 되었다. 다음 해에 사림에서 유집(遺集)을 간행하여 배포했다. 사후 20년 되 던 해인 癸丑(1913)년에 함안군(咸安郡) 대산면 (代山面) 용화산(龍華山) 해좌(亥坐), 무숙공 (武(肅公)묘소 아래로 이장했다.선생이 지은 책 으로는 『광서실기(匡書實記)』 , 『차록독서(讀書 箚錄)』, 『어류답문(語類答問)』, 『대동속악부(大 東俗樂府)』, 『시문(詩文)』 10여 권 등이 수록된 『만성문집』이있다. 『대동속악부(大東俗樂府)』는 1861년 만성 선 생 나 이 3 8 세 때 지 은 조 선 시 대 사 화 (史 話 ) 를 수 용하여 악부체시 형식을 빌려 쓴 영사악부(詠史 樂府)로서 총 28편으로 구성되어있다. 창작 동기 는 『대 동 악 부 』를 보 고 조 선 시대 역사가 빠져 있어서 이를 보충하려는 의도에서 였다. 따라서 『대동속악부 (大東俗樂府)』는 고조선시 대, 삼국시대, 고려시대의 역사를 담은 『대동악부』의 속편으로 조선시대 역사를 중심으로 창작된 것이다 하 겠다. 『대동속악부(大東俗樂府)』는 조선 왕정, 열행 (烈行), 충절, 학행, 효행 등과 관련된 사화를 수 용하여 포폄(褒貶-옳고 그름이나 선하고 악함을 판단함)을 노래한 한시(漢詩)로서 권선징악(勸 善懲惡)의 교훈성을 지니며, 문학성과 역사성을 아울러 지니고 있다. 28편 모두를 1편 3수의 편법 으로 구성하였으며, 장편의 서사성을 더하여 일 반 영사악부들이 지니는 문학성, 교훈성, 역사성 을 훨씬 뛰어넘어있다. 특히 1편 3수의 편법과 장 편서사시의 구성과 표현은 우리나라는 물론 중국 의 고악부에도 찾아볼 수 없는 새로운 양식이다. 이를 통해 만성선생의 학문과 문학적 재능을 바 탕으로 한 서사시의 다양한 변모, 풍요로운 표현, 연작시의새로운시도등을발견할수있다. 그리고 『대동속악부(大東俗樂府)』는 중국의 악부와는 달리 우리의 역사와 우리의 노래를 중 시한다는 만성선생의 주체적 역사의식이 투영된 작품이다. 여기서 우리는 조선 서민의 삶에 대한 애정, 조선사에 대한 포폄(褒貶)과 권선징악, 조 선 건국의 위대성 등을 엿볼 수 있다. 특히 『대동 속악부(大東俗樂府)』는 조선 후기에 많이 지어 진 영사악부들의 전통을 계승하면서도 새로운 모 습으로 변용된 악부사(樂府史)의 결론으로 평가 되고있다. 우선 형식적인 면에서 행수(行數)를 살펴보면, 지금까지 조사된 영사악부의 대부분이 10~30의 행수로 짧게 표현되어 있지만, 만성의 『대동속악 부(大東俗樂府)』는 10행 정도의 작품은 없고, 20 ~30행이 3작품, 31~40행이 2작품, 41~50행이 8작 품, 51~60행이 2작품, 61~70행이 3작품, 71~80행 이 3작품, 91행 이상이 4작품이다. 특히 ‘보은금 (報恩錦)’이라는 작품은 무려 273행으로 구성되 어있다. 이렇게 만성이 많은 행수로 작품을 지은 것은 그의 작품에 나타난 역사적 사실이 널리 알 려지지 않은 새로운 것이기 때문에 이에 대한 구 체적인 설명이 필요했을 뿐만 아니라 그의 문학 적인재능때문이었다. 만성선생 『대동속악부(大東俗樂府)』의 구법 (句法)은 한 수(數)의 시 속에 사언(四言), 오언 (五言), 칠언(七言) 따위를 혼용한 잡언(雜言) 형식을 취하고 있다. 또한 다른 류의 <해동악부> 와는 달리 각 편의 전면에 기록되어 있는 소서(小 序)가 극히 소략한 반면, 그 뒤의 시적 내용이 풍 부한 특징을 지니고 있다. 수록된 총 28편의 시를 제목,행수,내용순으로개괄하면다음과같다. 1)徒海家(도해가, 27행) 태조가 등극하기 전 민심의동요가일어났던일을다룸. 2)定朝鮮(정조선, 22행) 태조가 권근 등을 보 내어 중국 황제로부터 ‘조선’이라고 국호를 받아 온 일 을 다 룸 . 3)海州黍(해주서, 70행) 세종 때 박연과 장영 실이아악보를지은일을다룸. 4)御天龍(어천룡, 49행) 세종 때 선왕들의 업 적을모아용비어천가를지었던일을다룸. 5)塚上薇(총상미, 36행) 단종에게 충절을 지킨 의성 수령 김계면의 무덤가에 고사리가 돋아난 일을다룸. 6)舜셤셤 (순사사, 95행) 성종이 대궐문 밖으로 행차하자 백성들이 몰려들어 환영하니 왕이 말 위에서일어나춤을추며기뻐한일을다룸. 7)蕩春臺(탕춘대, 69행) 喬桐主(교동주)가 採 紅使(채홍사)를 보내어 사방의 미인들을 불러모 아탕춘대에서음탕하게논일을다룸. 8)進白粥(진백죽, 81행), 중종반정 때 단경왕 후가 폐위되었으나 원망하지 않고, 중종 행차 때 손수흰죽을끓어진상한일을다룸. 9)山谷넒(선곡구,98행)선곡의 늙은 할머니가 대 소헌(大笑軒)조종도의죽음을애통한일을다룸. 10)祭田雨(제전우) 함안의 가난한 효자 潘氏 (반씨)가 심한 가뭄에 성심을 다해 제사를 올리 자 비 가 내 린 일 을 다 룸 . 11)戒桃花(계도화)퇴계선생이 청량산 아래에 정 사를지어소일하면서<청량산가>를지은일을다룸. 12)少徵星(소징성, 28행) 남명 조식 선생이 도 가 행해지지 않음을 알고 만년에 頭流山(두류산) 에들어가은거한일을다룸. 13) 春遊詞(춘유사, 50행) 하곡( 谷) 허봉 ( 許 )이 평양 부벽루 아래에서 술에 취해 춘유 사를지은일을다룸. 14)素沙괍(소 사건 , 83행) 정유 재란 때 왜구 가 수 사에서明과조선의연합군에대패한일을다룸. 15) 關顯聖(관현성, 97행) <징비록>에 천장이 전쟁에서 여러 번 신(神)의 도움으로 이긴 일을 다룸. 16)柳氏婦(유씨부, 40행) 임진왜란 때 곽흘이 죽자 부인인 유(柳)씨가 숲속에서 목메어 죽은 일을다룸. 17)論介巖(논개암, 84행) 임진왜란 때 진양(진 주)이 함락되자 논개가 촉석루에서 왜장을 끌어 안고남강에빠져죽은일을다룸. 18)報恩錦(보은금, 273행) 선조 때 의주의 역 인(驛人) 홍순언이 기생이 된 명(明)나라 환관의 딸을구해준일을다룸. 19)僧泛汎(승범사, 52행), 강화를 논의할 때 왜 구가 계속 침입하자 승려 사명대사 유정(惟政)을 보내해결한일을다룸. 20)柳下將(유하장, 60행) 광해군 때 선천 군수 김응하가 패하자 굴복하지 아니하고 버드나무 아 래에서스스로목숨을끊은일을다룸. 21) 后妃諫(후비간, 44행) 광해군 때 비(妃) 유 (柳)씨가 상소를 올려 인목대비를 복위시키고자 하였으나,왕이이를허락하지않은일을다룸. 22)龍乘雲(용승운, 48행) 광해군 때 정명공주 (貞明公主)가 나이 16세로 갖은 고초를 당하다가 계해년에복위된일을다룸. 23)行琴引(행금인, 42행) 인조 때 한 노인이 남 한산성으로 오랑캐가 침입했음을 가야금연주를 통해알린일을다룸. 24)裂書哭(열서곡, 72행) 병자호란 때 김상헌 (金尙憲)이 화친서(和親書)에 황제 폐하라는 글 자가있는것을보고찢어버린일을다룸. 25)大明松(대명송, 27행) 명(明)나라가 망한 후 동계 선생이 우거하며 손수 소나무를 심고 감 상한일을다룸. 26)金壯士(금장사, 39행) 봉림대군이 심양의 관군 김여준(金汝峻)의 용맹과 절의를 숭상하다 가 왕 위 에 오 른 후 그 를 불 렀 으 나 이 미 죽 었 던 일 을다룸. 27)夕陽樓(석양루, 50행) 효종과 인평대군과 의돈독한우애를다룸. 28) 大報壇(대보단, 75행) 영조가 면류관을 쓰 고 친 히 제 사 지 낸 일 을 다 룸 . 마지막으로 『대동속악부(大東俗樂府)』28편을 제재(題材)별로 분류해 보면 조선왕조의 창업과 치세를 찬양한 것이 7편, 충절, 효열을 흠상(欽 尙)한 것이 13편, 비정(秕政)과 폐습(弊習)을 비 판한 것이 4편, 명(明)에 대한 자세를 드러낸 것 이 4편이다. 이를 통해 보건대, 만성선생은 비록 영남 재야의 한 선비에 불과했지만 19세기 말 서 구열강들의 침입 속에 조선의 자긍심을 내세우고 위정척사의 입장에서 흩트려진 유학을 정립하여 올바른 윤리의식과 본심의 회복을 통해 국난을 극복하려는 의지를 몸소 실천한 선비정신의 표상 이라하겠다. 만성박치복선생과 대동속악부(大東 續樂府) 선조 유지를찾아븣 선생의가계와생애 만성집(晩惺集),1925년간행한18권과부록2권의목판본(경상대문천각소장) 경남합천군가회면연동마을입구의유허비. 대동속악부(大東續樂府) 만성 박치복의 대동속악부 대동속악부의 형식과구성 맺음말븣▶11면으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