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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9월30일 목요일 11 (제177호) 독자마당 사람이 태어나서 감옥에 들어가는 일처럼 불행한 일은 없습니다. 감옥보다 더 무섭고 고통스러운 곳은 지옥입니다.그래서 다산은 말합니다. 지옥이야 사람이 죽은 뒤에 가는 곳이지만, 살아 있는 동안에 가는 감옥은 지 옥과 비교되기 때문에 ‘양계(陽界)의 귀부 (鬼府)’라고 말하여 감옥은 산 사람의 지옥 이라고 했습니다. 지옥과 감옥 다음으로 힘 들고 고통스러운 일은 귀양살이입니다.창살 없는 감옥이 바로 유배살이기 때문에 산사람 이 당하는 고통과 불행은 감옥 다음으로 유 배살이입니다. 다산은 감옥에 갇히기도 했지만 참으로 긴 긴 유배살이를 했습니다. 그런 불행과 고통 의 세월에도 다산은 결코 좌절하거나 낙망하 지 않고, 학문이라는 대업에 생을 걸고 노력 한 결과 세상에서 우러러보는 대학자로 우뚝 서기에 이르렀습니다. 감옥살이를 해 본 사 람이면 알 수 있는 일이지만, 감옥 생활도 초 창기의 생활이 참으로 힘들기 마련입니다. 아무리 고통스럽고 힘든 생활이지만 세월이 약이라고 시간이 지나다 보면 고통과 불행이 심신에 익혀지면서 다소 견디는 힘을 얻을 수 있기 때문에, 징역이 조금 풀린다는 말로 세월의 고마움을 말하기도 합니다. 다산의 일 생 을 살 펴 보 면 강 진 유 배 살 이 중 에 서 도 가 장 힘들고 고통스러운 때는 유배 초기의 주 막집 생활이었다고 여겨집니다.낯설던 초기 인데다, 불편한 일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지 만 다산의 의지는 참으로 강해서, 그런 불편 과 고통을 쉽게 이겨내면서 자신의 삶을 성 찰하며 새로운 학문의 길을 걸을 수 있었습 니다.다산은정말로대단한분이었습니다. “「사의재」란 내가 강진에서 귀양살며 거 처하던 방이다. 생각은 마땅히 맑아야 하니 맑지 못하면 곧바로 맑게 해야 한다. 용모는 마 땅 히 엄 숙 해 야 하 니 엄 숙 하 지 못 하 면 곧 바 로 엄숙함이 엉기도록 해야 한다. 언어는 마 땅히 과묵해야 하니 말이 많다면 곧바로 그 치게 해야 한다. 동작은 마땅히 후중해야 하 니 후중하지 못하다면 곧바로 더디게 해야 한 다 . 이 런 이 유 로 그 방 의 이 름 을 네 가 지 를 마땅히 해야 할 방[四宜之齋]이라고 했다. 마땅함이란 의(義)에 맞도록 하는 것이니 의 로 규제함이다.…자신을 성찰하려는 까닭에 서 지은 이름이다.(「四宜齋記」)”라고 하고 는 1803년 11월 10일이라는 지은 날짜까지 기록하였습니다. 유배 초기 절망과 좌절에서 헤어나기 어렵던 시절, 어떤 어려 움과 고통 속에 살아가더라도 인간됨과 인간 의 품위를 잃지 않고 곧고 바른 선비로서 살 아가겠다는 자신의 다짐이었습니다. 선비다 운품격을갖추려면생각·용모·언어·동작등 최소한 네 가지만은 의에 맞도록 규제해야만 가능한 일이라는데 동의하지 않을 수 없습니 다. 대선이 가까워 오면서, 세상은 참으로 요 란합니다.대통령이 되겠다는 많은 예비후보 들은 날마다 남의 흠결은 과장되게 폭로하면 서 자신에 대한 성찰은 전혀 하지 않는 사람 이 많습니다. 엉뚱한 생각으로 남들의 비웃 음을 받고, 분노와 억울함으로 가득한 용모 를 보이며, 말이라면 모두 말이라고 여기고 막말과 야만적인 용어만 사용하여, 점잖지 못한 동작으로 일반인들을 실망시키는 경우 도많습니다. 그 처 럼 고 난 속 에 서 도 인 간 의 품 위 유 지 를 위해 성찰을 거듭하던 다산을 거울로 삼아, 네 가지에라도 품격 높은 행위를 하는 지도 자들을 보고 싶습니다. 남만 헐뜯고 비방하 며, 품위라고는 보여주지 않는 지도자들,「사 의재기」라도한번읽을것을권합니다. 생각·용모·언어·동작을바르게해야 박석무 <다산연구소이사장>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다는 말은, 사람은 다른 사람들과 관계를 맺고 산다는 말과 같 다. 혼자서 할 수 있는 일은 거의 없다. 어떤 일이든지, 이뤄내기 위해서는 다른 사람의 도움을 받던지 또는 다른 사람들과 협업이나 공동작업을해야한다. 사 람 들 과 관 계를 잘 맺기 위해 서는 두 가 지 가 필요하다. 하나는 ‘나’를 만들어 세워놔야 하 고, 또 하 나는 다른 사람 과의 관계 맺는 비결 을 익히는 일이다.서점에 가보면 자기계발 서 적 들이 차 고 넘친 다. 동 양학 의 진수 인 사서 삼 경도 기실은 자기계발 서적이다. 나를 만들어 세 우는 일과 사 람들 과 함 께하 는 비법 익 히는 방법들을설명하고있기때문이다. 나와사람들간의관계는크게3가지로나눠 볼수있다.첫째는일직선(線)관계이다.나와 사람들의 만남이, 의도하여 만나기보다는 집 단에 소속되다 보니 만나거나 또는 성향이 비 슷한 사람들끼리 알고 지내는 단순관계이다. 개인적인 성향이 긍정적인가 부정적인가, 적 극적인가 소극적인가, 계획적인가 즉흥적인 가에따라 관계 맺는 사람들이왼쪽또는 오른 쪽으로 그룹 지어진다. 혈연, 지연, 학연, 직장 연,군대연등도특별한경우가아니면대개선 (線) 관 계이 다. 사 람들 에게 가 장 많은 관 계가 선관계이며의도하는성과창출은거의없다. 평면(面) 관계는 나와 어떤 사람들이 선 (線)관계를 넘어 특별히 의도된 목표의식을 갖고 그 목표를 추구 하며 힘을 모으는 관 계이다. 이 경우는 성 과창출이 있으며, 구 성원 간에 목표의식 이 강하면 강할수록 성과창출은 더 커진 다, 세 번째 관계는 입 체(體)관계이다.평면적인 성과창출을 넘어 입체적인 성과창출을 거두려는 관계이다.여 기에는 개인적인 성향과 목표의식 외에 세 번째 변수로 인문정신이 추가된다.구성원들 이 감사하고 위하고 상생하는 마음과 열정과 믿음, 확신이 강하면 강할수록 더 큰 입체적 인 성과창출을 할 수 있다. 큰 기업을 일으키 거나 대대적인 국민운동을 주도하거나 나라 를 세우는 등의 일은 개인적인 성향이나 목 표의식만으로는 안되고,구성원들 간에 강한 인문정신이 작용하여 상상력과 창의력의 바 탕이 만들어지고, 열정과 믿음, 확신이 만들 어져야대업을이룰수가있기때문이다. 사람은 누구나 성공하기를 원한다.어떻게 해야 성공할 수 있는가? 성공은 성과창출이 다. 일직선(線)관계를 넘어 평면(面)관계가 되어야 성과를 창출할 수 있고, 평면(面)관 계보다는 입체(體)관계가 더 큰 성과를 창출 할 수 있다. 여기에서 중요한 포인트는 무엇 일까? 바로 ‘나’다. 나의 개인적인 성향과 나 의 목표의식과 나의 인문정신이 관계의 수준 을결정하기때문이다. 평면(面)관 계에서는 목표의식이 중요한 데,대학(大學)의 물유본말 사유종시 지소선 후 즉근도의 (物有本末 事有終始 知所先後 則近道矣)를 염두에 두면 좋다.本은 그 일의 근 본 (뿌 리 )이 고 末 은 그 일 의 수 단 (가 지 와 잎)이다.本(근본)을 이루려는 방법이 末(수 단)이기에, 어떤 수단(末)을 취하기 위해서 는 각 수단들을 비교해야 하는데, 그 수단들 을 분석하는 방법이 바로 사유종시이다. 각 수단별로 마침(終)의 상태, 즉 구체적인 목 표치와 달성 방법을 미리 강구한 연후에 일 을 시작(始)한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먼저 해 야 할 일 과 나 중 에 해 야 할 일 의 선 후 관 계 를 잘 살펴(知所先後)중요하고도 시급한 일 부터처리하면완벽(道矣)하다는것이다. 입체(體)관계의 핵심은 인문정신이다. ‘나’의무늬(文)를잘갖춰야한다.명상과반 성을 일상화하여 상상력과 창의력의 기반을 강화하면서 위함의 사랑을 철저히 몸에 붙여 야 한다.말이 중요하다.말 한마디로 천냥 빚 을 갚기도 하지만 불구대천의 원수가 되기도 한다. 말은 사람의 품격을 재는 잣대이다. 품 격의 품(品)은 입구(口) 자 셋이 있고, 군자 의 군(君)은 다스릴 윤(尹) 아래에 입구( 口), 즉 입을 다스려야 군자다. 천수경도 첫 머리에 입으로 지은 업을 씻어내는 ‘정구업 진언(淨口業眞言)’이 나온다.나를 다스리고 상대를 위하는 인문정신이 충만해야 입체관 계를 만들고, 그래야 태어날 때 갖고 온 天命 을살아생전에실천할수있다. 나와사람들간의선(線)관계,면(面)관계,체(體)관계 박승주전여성가족부차관 학문의 길은 다른 길이 없다. 모르는 것이 있 으면 길가는 사람이라도 붙들고 물어야 한다.學 問之道無他. 有不識, 執塗之人而問之, 可也.(학 문지도무타, 유불식, 집도지인이문지, 가야) - 박지원(朴趾源, 1737~1805), 『연암집(燕巖集)』 권7별집「북학의서(北學議序)」 [해설]1781년(정조5)에 연암 박지원(潘南 人)은 초정 박제가(密城人)의 『북학의』에 서문 을 써 주면서 그 첫마디를 이렇게 시작했다. 박 제가는 1778년 이덕무와 함께 중국을 다녀왔다. 『북학의』는 그 견문의 기록이다. 박제가의 중국 전략보고서인 셈이다. 박지원은 그로부터 2년 뒤인 1780년에 중국을 다녀왔다. 그의 『열하일 기』는이후대표적인연행록으로전해졌다. 그러나 그 이전에 이미 두 사람은 중국을 배워 야 한다는 것에 의기투합했다.눈오는 날이나 비 오 는 날 에 도 , 술 을 먹 는 날 에 도 , 등 잔 불 이 다 할 때까지도 그칠 줄 모르고 토론을 거듭했다.그러 다가 연행에 참여한 것을 계기로 발전된 중국의 문물을 눈으로 직접 확인했다.비록 이민족의 왕 조인 청이라고 하더라도 배울만한 것이 있으면 배워야 한다는 생각에 일치했던 두 사람의 생각 은이첫마디에집약되었다. 박지원은 모르는 것이 있으면 종에게도 배워 야 하 며 글 자 하 나 라 도 더 안 다 면 그 에 게 배 워 야 한다고 했다. 자기가 남만 못하다고 해서 자 기보다 나은 사람에게 묻지 않는다면 평생 고루 한 채 로 어 쩔 줄 모 른 채 스 스 로 의 지 평 에 갇 혀 지내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박지원은 그런 상 황을 두고 “우물안 개구리, 밭 두더지” 마냥 자 기가 사는 곳을 제일이라고 여긴다고 하며, 객 관적인 세계인식이 미흡하여 누추한 것을 두고 검소한 것이라고 생각한다고 한탄했다. 박지원 의 생각에 그것은 이용후생의 기획이 빈약하고 배 우 고 물 을 줄 을 몰 라 생 긴 폐 단 에 불 과 한 것 이었다. 순임금은 시골 농부였다가 효제의 실천을 통 해요임금의발탁을받아일약 황제의 지위에 오 른 사람이다.맹자는 순이 농사짓고 질그릇 굽고 물고기 잡는 일을 하면서 황제가 될 수 있었던 것은 자기를 버리고 남을 따랐기 때문이라고 했 다. 남에게서 잘 배운 것이다. 공자의 제자들은 공자가 다양한 직무에 다재다능함을 찬탄했다. 공자는 자신이 젊은 시절 가난했기 때문에 이런 일들을 잘하게 된 것이라고 했다.박지원은 공자 의 막 일 도 아 마 순 임 금 이 했 던 그 런 일 일 것 이 라 여겼다. 그런데 순임금이나 공자같이 성스럽고 재능 있는 분들도 사물의 기술을 익히고 필요한 도구 를 만들자면 시간도 부족하고 지혜도 막힐 때가 있을 것이다. 그런데도 그분들이 성인이 될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일까?박지원은 남들에게잘 물어서배운것에지나지않는다고단언했다. 법이 훌륭하고 제도가 아름답다면 오랑캐에 게라도 나아가 배워야 한다고 주장하는 박지원 의 눈에 청나라는 단순한 오랑캐의 나라가 아니 었다.땅은 삼대 이래 한,당,송,명의 땅이며,백 성은 그런 시대의 유민이었다.여전히 삼대 이래 의 광대한 규모, 정미한 심법, 상당한 수준의 과 학기술과 찬란한 문장을 지닌 옛법을 보존한 나 라였다. 여느 조선의 지식인처럼 ‘청나라는 오랑캐의 나라’라는선입견에사로잡혀그들의외피를본 것이 아니라 여전히 ‘중화의 문명’을 간직하고 있 는 그 속살을 관찰한 것이다. 그러므로 박지원은 기꺼이 중국의 발전상을 배우자는 박제가의 주장 에 공감 하며 지 금 우 리는 북 학(北學)을 해 야 하며 청나라에물어야한다고주장했던것이다. 142년, 병자호란 이후 북벌하자는 주장에서?북 학의를 집필하는데 걸린 시간이다.?중국의 실체 를 제대로 인식하는데 이 정도의 시간이 필요했 다. 출처한국고전번역원(고전산책) 모르는것이있으면길가는사람이라도붙들고물어야 함영대(경상대학교한문학과부교수) 금년이 6·25전쟁이 일어 난지 71주년 이다. 그 때 누가보아도 대한민국이 망 하게 되어 있었다. 그 이유는 그때 한반 도는 미국의 “태평양 방위선” 밖에 위 치해 있었기 때문이다. 광복 후 남한에 주둔하고 있던 미군이 완전히 철수한 후 미국의 애치슨 국무장관은 1950년 1 월 “한반도 미국 태평양 방위선에서의 제외”발언이나왔다. 그래서 소련 스탈린이나 북한 김일성 이 남침을 해도 미군이 개입하지 않으 리라고 판단한 것이다. 그때 김일성은 한반도 무력공산화 통일을 위해 철저한 준비를했었다. 먼저 소련 스탈린의 허락과 지원을 받고, 건국한지 얼마 안 된 중 국 모 택 동 의 협력을 약속 받았다. 그리고 지상군 약 18만 명 항공기 200여대, 대포 400여 문,탱크 240여대 등의 막강한 화력으로 1950년 6월 25일 새벽 4시에 38선 전 지 역에서일제히남침을해왔다. 그 당시 대한민국의 형편은 남한 내 에 공산당과 친북세력의 준동(蠢動), 반 정 부 세 력 의 활동으로 국론은 사 분 오 렬 ( 四 分 五裂)되어 있었 고, 신생 이승만 정 부 의 국 방 은 한마디로 오합지 졸(烏合之卒) 상 태로 전투능력은 형편없었다. 북한 남 침 대비가 전혀 없었고, 전방 지휘관들 을 대거 교체하고 주말에 장병외출 휴 가를대대적으로내보내는형편이었다. 탱크 한 대도 없던 대한민국 전방부 대는 인민군의 강력한 화력 앞에 여지 없이 무너졌고, 결국 3일 후에 서울이 함락되고 말았다. 필자는 그때의 놀라 움은 지금도 잊을 수가 없다. 얼마 후에 경남 부산 일원만 남기고 전국이 북한 군에 점령당해 이제 대한민국은 지구상 에서 사라진 운명에 처했다. 김일성의 승리는 확실하게 보였다. 대한민국의 승률은5천분의1에불과했다. 그러나 대한민국은 “기적적으로” 안 망하고 살아남았다. 우리 애국가에 “하 느님이 보우하사 우리나라 만세”란 구 절이 있다. 그야말로 하 느님의 보우가 아이였다면대한민국이 살아 남을 수없 는 기적이 일어난 것이다. 이 기적은 천 우신조(天佑神助)가 아닐 수 없었다. 그 기적을 요약해 보면 다섯 가지로 요 약된다. 첫째는 미국 대통령 트루먼의 미군 참전 신속한 결심이다. 미국이 침공 당 한 것도 아니데 그렇게 빨리 미군의 한 반도 전쟁에 투입했다는 것은 그야말로 기적이다. 트루먼은 “미국 참전 결정” 에 10초도 안 걸렸다고 그의 회고록에 서 말 하 고 있 다 . 이 런 점 에 서 볼 때 서 울 에 “트루먼 로”를 정해도 된다고 생각 된다. 둘째는 유엔 상임이사국 회의에서 “유엔 참전” 결의할 때 소련대표는 이 사회에 중국 장개석 정부 국부군 대표 가 있음을 항의하기 위해 그해 1월부터 불참했다. 만일 그때 소련대표가 참석 하여 거부권을 행사했다면 유엔군 참전 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이는 대한민국 에게는 천우신조(天佑神助)가 아닐 수 없었다. 셋 째 는 그 때 미 군 이 가 까 운 일 본 에 주둔하고 있었다. 만일 미군이 본토에 서 함정으로 이동하려 했다면 이미 상 황은 종료되었을 것이다.그러나 2차 대 전 후 맥아더 사령부 휘하의 미군이 일 본에 주둔해 있었기 때문에 그해 7월 1 일 한반도 남단 부산으로 투입할 수 있 었던것이다. 넷째는 북한인민군이 서울을 점령한 후 약 1주일동안 이유 없이 지체했다는 점이다. 그때 김일성은 박헌영의 “인민 군이 남으로 침공하여 서울을 점령하기 만 하 면 남 한 내 각 처 에 서 북 에 동 조 하 는 좌경 인민들의 대대적인 봉기가 일 어난다. 그러면 우리가 싸우지 않아도 남반부는 스스로 무너진다.” 라는 말을 믿고, 서울에서 1주간을 기다렸다는 것 이다. 그 1주간의 시간이 결국 미군 및 유엔 연합군이 한반도에 진입하는 시간 을 벌어 주었고, 나아가 유엔군이 낙동 강교두보를만드는시간을준것이다. 다섯째는 한반도는 여름에 비가 많은 우기인 장마철이나 그 해의 여름은 대 체로 날씨가 계속 좋았다. 미군의 전투 기가 거의 매일 작전을 수행할 수 있었 다. 항공력이 약한 북한군은 강력한 미 군의 항공력에 무력화했다는 것이다. 김일성은 그 당시 미공군력이 무서워 소련에 갈 때에도 비행기를 타지 않을 정도로 비행기 공포증에시달렸다고 한 다. 6·25전쟁에서 맥아더 장군이 수행한 인천상륙작전은 몇 가지 의미를 갖고 있다.첫째는 인천상륙작전이 성공함으 로서 전쟁을 단축시켰고한국군이 공세 를 잡을 수 있었다.둘째는 귀신 잡는 해 병대를 인천상륙작전에 투입시켜 그 용 맹을 얻게 된 것, 셋째는 미 해병대와의 운명적 만남으로 해병대의 전투력을 높 였다. 또한 해병대의 사회적 인식을 아 울러 높였다. 이 이야기는 김일성 장군 이직접말한이야기다. 6·25 전쟁이 종전되자 1953년 10월 1 일 조인되고 그 이듬해 1954년 11월 18 일 발효된 “한미상호 방위조약(군사동 맹)”으로 한미동맹이 탄생됐다. 이 조 약은 대한민국 안보의 핵심이다. 이 조 약은 이승만 대통령의 대단한 공로다. 이승만 대통령은 휴전을 매듭짓고 대한 민국의 안보를 보장받기 위해 현재까지 이 동맹관계가 지속되어 한강의 기적도 이뤘고,자유민주주의와시장경제를통 한 세계 경제 순위 11위(2016년 기준) 를이룩했다. 그런데, 미국과 손을 잡은 덕과 박정 희 대통령의 경제개발 정책 덕에 대한 민국은 지구상에서 참으로 자랑스러운 나라가되었다. 한빛의메아리 박 희 학 븣숭덕전前참봉 (32)6·25전쟁때기적적으로살아난대한민국 뱚발뱞뱞행뱞뱞인:박순구 뱚취재편집:박상섭 뱚경영지원:박영일 기사제보븡광고신청븡구독안내 대표전화(053)588-7300 FAX(053)581-0067 뱚구독료년40,000 입금계좌:농협453013-55-000691 예금주:한빛신문 뱚뱜 42612 대구달서구달구벌대로1221(이곡동538-2)성창B/D5층 뱚뱜 본지는신문윤리강령및그실천요강을준수합니다 (2007년1월12일등록번호대구다-01225) 500만박씨성손의대변지 2007년1월24일창간(월간) 『대동속악부(大東俗樂府)』의 저자 만성 박 치복 선생은 조선말기 유림으로서 삶을 살아 간 인물이다. 초년에 가학(家學)을 통해 혜두 (慧竇)가 열리고, 약관의 나이에 고령과 달성 의 향시에 합격하였으나 위기지학(爲己之學) 에 뜻 을 두 어 위 인 지 학 ( 爲 人 之 學 ) 인 과 거 업 (科擧業)을 멀리하였다. 당대의 거유(巨儒) 석 학(碩學)을 찾아 학문의 성취를 기하였는바, 2 0대 초반에는 정재 유치명 선생에게,40대 초반 에는 성재 허전 선생에게 속수(束脩)의 예를 올렸다. 19세기 후반 상존(常存)하는 학맥의 대 립 과 갈 등 속 에 상 호 학 술 교 류 를 통 해 이 를 융합하려는 높은 학문정신을 보였으며 일생을 포의지사(布衣之士)로 마쳤으나, 선생은 당대 의 역사 현실을 외면하지 않는 지성인으로서 역 할 을 다 한 선 비 였 다 . 특 히 그 가 지 은 『 대 동 속악부(大東俗樂府)』는 이를 뒷받침해 주고 있다. 만성선생은 또한 예학(禮學)에 밝아 <愚溪禮 設(우계예설)> 서문에서 “충신(忠信)과 질소 (質素)는 예(禮)의 근본이요, 의문(儀文)과 제 도(制度)는예(禮)의말단이다. 그 근본을 헤아리지 않고 그 말단만 일삼는 것은 참으로 잘못이다.범과 표범의 아름다움은 단지 껍질로만 되는 것은 아니다. 요컨대 충신 (忠信)을 주로 하여 의문(儀文)을 익힌 연후에 비로소 문채가 훌륭한 군자가 된다.”라고 하였 다. 선생은 65세(고종25)에는 도탄에 빠진 민생 과 누란의 위기에 처한 국가의 형세를 극렬하게 고하는 ‘시폐소(時弊疎)’를 올린 바 있다. 『대동 속악부(大東俗樂府)』에서 조선왕조에 대한 자 긍심을 드러낸 것과시폐소를 올린것은 서로 모 순되지만 이 또한 충(忠)의 두 가지 모습이 아니 겠는가? 『대동속악부』는 1961년 이가원(李家源)의 『한국한문학사』 속에 최초로 소개된 이래 학계 를 중 심 으 로 여 러 편 의 다 양 한 연 구 논 문 이 발 표 되었다.앞으로도 많은 학자들의 심도 있는 연구 가요청된다. /출처 만성 박치복의 학문과 사상(경상대학교 남명학연구소), 만성 박치복의 대동속악부 연구 (백원철) /글 정리 박권곤(pkg119@naver.com),밀양박 씨영동정공파대종회간사 ▶12면븮만성박치복선생븯서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