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page

2021년7월31일 토요일 2 (제175호) 기 획 밀성박씨충간공파인터넷족보 및족보편찬공고 밀성박씨충간공파대종회는2020년11월15일(음10.1.)정기총회족 보편찬결의에따라다음과같이세보편찬을추진중에있어 공고하오니종원여러분의관심과성원으로역사에길이남을훌륭한 족보를만들수있도록성원바랍니다. ☆수단접수기간:2021.7.1.~2021.12.31. ☆수단기준및작성요령:세보편찬위원회문의바랍니다.뱚뱚 ☆반 질 :2023년상반기예정 ☆ 수단 접수처 : 수단 유사 명단 참조 -편찬위원회- △고문 박병립 010-3272-3283,박상규 010-3818-3132,박종환 010-2688-3262,박기상 010-3455-7004. △대종회장(위원장)박원환 010-9037-8000 △도유사 박재윤 010-8703-4615 사무실 fax054-652-4615 △부위원장 박형경(고령) 010-3526-8701 박종배(예천) 010-5371-5655 박중보(예천)010-8927-0279 박종 호(고 창)010-3611-5733 △수단유사(편찬위원) ▲박하경(고령)010-3803-4821 ▲박동진(대구) 010-4358-4085 ▲박재희(고령)0 10-3549 -9889 ▲박규돈(고령)010-8579-7042 ▲박일호(예천)010-9505-1551 ▲박규환(예천)010-5219-6296 ▲박 석태(예 천)010-2804-6320 ▲박휘식(예천)010-9898-7411 ▲박수환(예천)010-7545-8747 ▲박용운(충북단양)010- 3419-16 61 ▲박기환(영주 풍기)010-6372-4357 ▲박익환(예천)010-7534-4141 ▲박윤환(서울)010-8949-9460 ▲박 차환(대 구)011-510-2710 ▲박재석(문경)010-2504-8453 ▲박연수(예천)010-8592-3144 ▲박춘기(고창) ▲박이규 (고창)0 10-9453-3238박세근(고창)010-3625-5087▲박이기(고창)010-3638-1204 △감사 박원재(예천)010-9355-3509 박생경(고령)010-8579-7042 ※구독자님주변에혹충간공후예를알고계신분은이를적극알려주시면감사하겠습니다. 밀성박씨충간공파족보편찬위원회위원장박원환뱚 오는8월15일은광복76주년을맞이한다.일제강점기36년 은우리국민에게잊을수없는시간이다.국가보훈처는2021년 1월의독립운동가로 김익중,기우만,박원영을 선정했다.이들 3인은 광주 전남을 기반으로 하는 독립운동가이다.송사 기우 만은 호남최초의의병을 일으킨 분으로 호남의병의대부이고, 박원영과 김익중(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은 송사 기우만과 더불어지역에서의병을일으키며항거했던인물이다.이에호 남 의병창의의실상과 광주 회맹에 앞장서고 의로운죽음을맞 이한박원영선생에대해소개해본다. △단명한형제를대신하여조부의학문을잇다 기우만은 전남 장성군 황룡면 탁곡(卓谷)에서 아버지 기만 연(奇晩衍,1819-1876)과 어머니 연안이씨(延安李氏)사이에 서 셋째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자는 회일(會一), 호는 학정거 사(學靜居士)·송사(松沙) 등이다. 행주기씨인 그의 집안은 1 6세기이래장성에세거해왔지만그는조부인노사기정진(蘆 沙 奇正鎭, 1798-1879)을 따라 장성의 여러 마을을 전전하였 다. 그는 살았던 마을이나 산의 이름을 따서 호를 지었다. 즉, 학정거사는 그가 살았던 창촌의 학정산(學靜山)에서 연유한 것으로, 조용히 앉아 열심히 공부하는 정이(程 視)의 가르침 을 실천하리라는 의미가 배여 있다. 그는 만년에 송사라는 호 를 즐겨 썼는데, 그가 살았던 장성의 하사(下沙)와 월송(月 松) 마을에서 한 글자씩 따서 호로 삼은 것이다. 한편, 노사의 백형 우기(宇 덤, 1839-1867)와 중형 우번(宇蕃, 1842-1872) 은 서른살 내외의 나이로 먼저 세상을 등졌다.그리고 10년 후 계제인 우업(宇業, 1856-1882)이 타계했으며,하나 남은 동생 우몽(宇蒙, 1852-1907) 역시 그보다 약 10년 앞서 세상을 떴 다.형제들의 계속된 죽음을 지켜 본 그의 상심이 얼마나 컸을 지짐작하고도남음이있다. 그는 일찍부터 기정진의 학문을 익혔다. 그의 조부가 밝힌 이일분수설(理一分殊說)은 이일원론적(理一元論的) 세계관 으로 독특한 사상인데,조선시대 성리학의 6대가 혹은 근세유 학의 3대가의 한 사람으로 높이 평가받았다.기정진의 학설은 독창적일 뿐만 아니라 논쟁적이고 실천성이 강했는데, 그는 병인양요 당시 위정척사운동을 선도하는 상소운동에 앞장섰 다. 1840년대에 이르러 그의 학문을 따르는 제자들이 크게 늘 어나 이른바 노사학파가 형성되었다.그는 약 600명의 제자를 배출하였으며, 재전(再傳) 제자까지 합하면 노사학파는 무려 4천여명이나되었다. 기정진은 제자들 가운데 이른바 ‘노문삼자(蘆門三子)’로 불렸던 김석구(金錫龜) 정재규(鄭載圭) 정의림(鄭義林)이 자신의 사상을 발전시킬 것으로 기대하였다. 물론 그의 제자 이자 친손자이기도 한 기우만이 조부의 사상을 계승하였다.1 870년에 기우만은 진사시에 합격했으나, 1874년의 동당시(東 堂試)에서 낙방했다.1876년에 그는 부친을 잃었고,그 3년 후 에 조부마저 세상을 떠났다. 이처럼 거듭된 슬픔 속에서도 그 는 조부의 학풍을 전수하여 강학 활동에 힘쓰는 한편, 조부의 흩어진 유고를 정리하여 븮노사집븯(蘆沙集)(1883)을 간행했 다. 이후 그는 노사학파를 대표하는 유학자로 알려지게 되었 으며, 약 1,200명의 제자를 배출하였다. 창평의 명문 유생 고 광순(高光洵)은, 그를 ‘노사학파를 이끄는 영수(領袖)로서 기산림(奇山林)’이라불렀다. △전라도최초로의병을일으키다 1890년을 전후하여 전라도에는 동학이 크게 확산되었다.당 시수령과탐관오리의학정(虐政)과가혹한수탈을견디다못 한 농민들이 대거 동학에 가담했던 것이다. 이를 기반삼아 최 시형(崔時亨)은 교조신원운동(敎祖伸 쪼運動)을 전개했으며, 전라도 고부에서는 1894년 음력 정월 농민들이 떨쳐 일어났 다. 동학접주 전봉준(全琫準)이 탐관오리 고부군수 조병갑을 내쫓기 위해 가렴주구에 시달린 농민들과 무장봉기를 일으킨 것이다. 고부농민봉기에서 비롯한 동학농민혁명은 삽시간에 전라도에 확산되었는데, 기우만이 살던 마을은 휩쓸리지 않 았다.그의명성만큼신망도두터웠기때문일것이다. 그는 동학농민혁명의 수습에 앞장서서 향음주례를 시행하 였고, 광주부 관찰사 이도재(李道宰)에게 국가의 은혜와 의 리를 베푸는 방안을 제시하였다. 또한 나주목사 민종렬을 비 롯한 나주 수성군의 공로를 칭송하는 븮나주평적비븯(羅州平賊 碑)를 지었고, 장흥읍성을 지키다 사망한 박헌양(朴憲陽)을 기리는 븮장흥부사박공제단비븯(長興府使朴公祭壇碑)를 찬술 하였다. 전라도는 동학농민혁명의 후유증에서 조금씩 벗어나고 있 었지만, 조선 정국은 어지럽기 짝이 없는 상황이었다. 1895년 음력 8월 명성왕후가 일본의 사주를 받은 낭인배에 의해 시해 되었다. 음력 11월에는 모든 국민이 상투를 잘라야 한다는 이 른바단발령(斷髮令)이 내렸다.이에기우만은국모를시해한 원수를갚고단발령을거두어달라고상소하였다. 대개 국모의 원수는 곧 신하들이 와신상담해야 할 것인데, 국가의 형세가 날로 깎이어 설욕할 희망이 없습니다. 전장과 문물은 여러 성조에서 전수된 옛 법도인데 하루아침에 변개하 여다시 회복할 기약이 없습니다.지금 훼발령(毁髮令)이이르 니괴란됨이지극합니다.(중략)하물며나라치고망하지않는 나라가 없으니 상투를 자르고 보존하는 것보다 차라리 상투를 보존하고 망하는 것이 나으며, 사람치고 죽지 않는 사람이 없 으니 상투를 자르고 사는 것보다 상투를 보존하고 죽는 것이 나을것입니다. (을미소,븮송사선생문집븯권2,경인문화사,1990). 기우만은명성왕후를시해한역적의복수와단발령의철폐, 그리고 옛 제도의 복구와 개화세력의 척결을 주장하였다. 물 론 이러한 상소는 국왕에게 전달되지 않았다. 그러자 그는 전 라도의 모든 고을에 이러한 내용의 통문을 보내어 함께 호소 할 방법을 제시하였다. 그가 대규모 연명상소를 계획했던 것 이다.이 무렵 단발령에 충격을 받아 전국 각지에서 의병이 들 고일어났다. 체두관(剃頭官)을 각부에 파견하여 날짜를 정하여 단발을 독촉하였다. (중략) 이때부터 온 나라가 물 끓듯 하고 의병이 사방에서 일어났다. 강원도의병은 서상렬(徐相烈) 등이 일으 키고, 유인석(柳麟錫)은 경기도에서 일어나고, 주용규(朱庸 奎)는충청도에서일어나고,권세연(權世淵)은안동에서일어 나고, 노응규(盧應奎) 정한용(鄭漢鎔)은 진주에서 일어나니 원근에서호응하였다. (황현,븮매천야록븯,국사편찬위원회,1955,192쪽). 체두관들이 사람들의 상투를 강제로 자르자, 온 나라가 물 이 끓듯 시끄러웠다는 것이다. 단발을 반대하는 상소가 빗발 쳤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자 전국 각지에서 의병이 봉기한 것 이다. 하지만전라도에서는의병의움직임이없었다. 전 참봉 기우만이 장성에서 의병을 일으켰다. 그는 고 참판 기정진의 손자로, 가풍을 이어받아 문유(文儒)로 추대를 받 았으나 다른 재간은 없었다. 이때 호남사람들이 다른 도에서 는 모두 의병이 일어났으나 전라도만이 의병이 없음을 부끄 럽게 여겨 기우만에게 권유하여 기치를 세우도록 하였다.(븮매 천야록븯,198쪽) 호남에만의병이일어나지않음을수치로여긴사람들이기 우만을 추대하여 의병을 일으키게 했다는 것이다. 당시 전라 도는 동학농민혁명의 여파로 말미암아 의병을 일으킬 형편이 못되었다.유학자들은전라도에서의병이일어나지않음을부 끄럽게 여겨 노사학파를 대표하는 기우만더러 의병을 권했던 것 같다. 앞서 기우만은 복수토적과 단발령 반대를 주장하는 상소운동을 전개한 바 있었다. 그것을 계승하는 차원에서 의 병을일으키기로결심했을것이다. 마침 영남의 예안과 안동에서 단발령과 변복령을 성토하는 통문이 장성에 도착했으며, 충북 제천에서 의병을 일으킨 유 인석의격문도전달되었다.기우만은국가와왕실을부흥시키 는 일은 오직 의병에 달려 있다고 판단하였다. 1896년 음력 1 월, 그는 전라도 각 고을에 격문을 발송함으로써 비로소 호남 의병의 시작을 알렸다.그는,임진년 이래 우리의 원수인 왜적 의 구축, 개화파 처단, 고종의 환궁, 옛 제도의 복구와 단발령 을철폐하기위해의병을일으키자고촉구하였다. 바야흐로 지금 주상은 몽진(蒙塵)하시고 국사가 혼란하여 의병이 메아리처럼 일어났는데도 호남은 오래도록 적막하였 습니다. 의기가 유독 뒤쳐져 그런 것이 아니라 동학란 이후에 민력(民力)이 소생하지 못하여 시일이 늦어진 것입니다. 충신 과 의사가 아침저녁으로 부심하여 지금에야 이렇게 통문을 보 냅니다. (중략) 다만 각 고을의 군위가 조금 진작되고 약속이 조금 안정되기를 기다려 힘을 합해 근왕(勤王)하자는 뜻으로 마땅히 다시통고함이있을것입니다. (격문,븮송사선생문집븯2). 그동안 전라도에서 의병이 일어나지 못한 원인은 동학농민 혁명이후 백성의 힘이 회복되지 못한 때문으로 보았다. 그는 군량과 무기의 확보,연해 고을의 방곡(防穀),정예의 의병 선 발, 토색 금지 등을 강조하였다. 근왕의병으로서의 대의명분 에걸맞게활동해야한다고명시하였다. 1896년음력 2월7일(양 3월20일),기우만은장성향교를 도 회소(都會所), 양사재(養士齋)를 향회소(鄕會所)로 삼아 의 병을 일으켰다. 호남 최초의 의병이 일어난 것이다. 기우만이 주도하는 장성의병은 근왕을 목표로 활동하였다. 장성출신으 로서의병에적극참여한주요인물로는기삼연(奇參衍)기동 관(奇東觀) 기우익(奇宇益) 기재(奇宰) 기주현(奇周鉉) 김 익중(金翼中) 김양섭(金良燮) 박원영(朴源永) 양상태(梁相 泰) 이승학(李承鶴) 등을 들 수 있는데, 이 가운데 기삼연 기 재김익중박원영은기정진의제자들이었다.행주기씨와노사 학파가앞장섰음을알수있다. 여기에창평출신의고광순이기우만이주도한의병에힘을 실어주었다. 고광순은 임진왜란 당시 의병을 일으킨 고경명 (高敬命) 의병장의 12대손이자, 고경명의 아들 인후(因厚)의 11대 사손(祀孫)이었다. 그는 왜란 당시 세 부자가 순절한 의 병의 후예라는 자부심이 강하였다.그래서 주위에서는 그에게 창평을 중심으로 독자적인 의병을 일으키라고 권유하기도 했 다.하지만그는그러한제안을뿌리치고장성의병에참여하여 상소문과통문을작성하는등물심양면으로적극협력하였다. 한편, 음력 2월 10일 나주에서도 의병장 이학상(李鶴相)을 중심으로 의병의 편제를 갖추었다. 나주의 경우에도 1895년 음력 섣달 중순 충청도 홍성으로부터 의병을 일으키자는 통 문을 받았다. 1896년 음력 정월 29일에는 기우만이 보낸 격문 을 받은 후 의병 준비를 서둘렀다.나주의 양반 유생과 향리들 은 기우만이 보낸 격문을 관내에 발송한 후 음력 2월 1일 향교 에 모여 대책회의를 열었다. 사흘 후 이들은, ‘사람마다 난신 적자를 베야 할 의무가 있습니다. (중략) 근왕하자고 이미 으 뜸으로 외쳤으니 선비치고 누가 따르지 않으리오.’라는 내용 이 담긴 통문의 말미에 100여 명이 서명하여 장성향교로 보내 며호응하였다. 나주의병은 먼저 임금에게 상소를 올려 의병봉기의 배경과 정당성을 알렸다.즉,의병을 일으킨 목적이 근왕에 있다는 점 과 개화파 참서관 안종수의 잘못을 낱낱이 밝힌 것이다. 또한 이들은 복수토적하기 위해 개화파와 일본세력을 구축하고, 옛 제도의 복구와 국왕의 환궁을 추진할 것임을 내세웠다. 요 컨대, 나주의병의 거병 목표가 복수토적과 단발령 철폐 등 반 개화·반침략에있음을분명히한것이다. 다음날 기우만은 고광순 기삼연 김익중 등 장성의병 200여 명을 이끌고 나주향교에 도착하였다. 이들의 모습을 본 사람 이 “옛날 임진왜란에 김건재(金健齋)는 나주에서 창의하고, 고제봉(高霽峰)은 광주에서 창의했는데, 오늘날 그대들이 본 주(本州)에서 창의하고 송사는 장성에서 창의하였으니 진실 로 추앙할 만하다”고 칭송하였다. 나주는 1894년 동학농민혁 명 당시 양반 유생과 향리 계층이 연합하여 읍성을 지킨 유일 한 고을이며, 전라도의 연해 방어에 중요한 전략적 요충지였 다. 기우만은 바로 이러한 점에 주목했을 것이다. 장성의병과 나주의병 사이에 갈등이 없지 않았지만 선공후사(先公後私) 의 정신으로 협력하였다. 그리하여 장성의병은 호남대의소 (湖南大義所), 나주의병은 나주의소(羅州義所)로 명칭을 확 정했다. 기우만은험난한시기에나라를위해의병을 일으킨선비들 을 ‘폭도(暴徒)’라는 이름의 굴레를 씌워 화적처럼 처벌하는 상황을 지극히 못마땅해 했다. 그래서 충의로 봉기한 호남의 병의 삶과 죽음, 그리고 언행을 일일이 기록해서 후세에 전하 는일이야말로자신이해야할마땅한의무로인식하였다. 1910년 나라가 망하자,기우만은 천인(賤人)을 자처하며 은 인자중하다 1916년에 세상을 떠났다. 그의 방대한 유고는 제 자인 양회갑의 주도로 여러 해 동안 준비하여 1931년에 븮송사 집븯(松沙集)(52권27책)으로 간행되었다. 연보와 행장 등은 븮송사선생문집부록븯(2권1책, 1947)으로, 그 이후에 의병전을 포함한 유고는 븮송사선생문집습유븯(3권1책, 1980)로 간행되 었다.정부에서는고인의공훈을기리어건국훈장독립장(198 0)을추서하였다. 박원영은 전남 광주에서 광휴(匡休)의 아들로 태어났다.그 의 자는 주옥(周玉), 호는 포류재(蒲柳齋)·아산(鴉山)이며 본관은 충주이다. 그의 어머니의 성씨라든가, 그가 태어나 살 았던 구체적인 지명은 전혀 알려져 있지 않다.그가 노사 기정 진의 제자였다는 점과 기우만과 비슷한 연배라는 점이 확인 될 뿐이다.그의 행적과 사상을 알려주는 자료는 거의 찾을 수 없다. 다만, 기우만이 찬술한 장문의 제문(祭文)이 거의 유일 한 기록인데, 이로써 기우만과 매우 각별한 사이였음을 짐작 할 수 있다. 강직한 성품과 기개를 타고난 박원영은 기정진의 문하에서 수학하며 이름이 알려졌고, 1896년 전후에 광주향 교의재임(齋任)을맡고있었다. 1894년에동학농민군이전라도를휩쓸자,그는밤중에기우 만을 찾아가 ‘저들이 국가를 어지럽히고 선비를 적으로 생각 하고 있으니 의병을 일으켜 토멸하는 것이 시급합니다. 공이 격문을 사방으로 보내주시면 저는 당연히 밑에서 돕겠습니 다.’라고 말하였다. 이때 기우만은 가슴에 품은 그의 올곧은 마음을알게되었다. 박원영은, 일본의 사주를 받은 개화파 관료들이 제도를 변 경하고 단발을 강요하며 임금까지 위협한 상황에 대해‘나라 는 나라가 아니고 사람은 사람이 아니’라고 인식하였다.이 무 렵 기우만이 의병을 일으키자는 격문을 보내오자, 박원영은 곧바로 달려와 함께 죽기를 맹세하였다. 어떤 이들은 지금은 때가 아니라며 의병의 군량조차 협조하지 않고 변명으로 일 관하였다. 하지만 박원영은 기우만을 도와 계책을 제시하며 적극 도왔다. 그는 기우만이 지은 격문을 함께 읽으면서, ‘물 고기를 먹고 싶은 마음이 어찌 맛있는 곰 발바닥같이 좋을 수 있으며, 기왓장이 온전하더라도 부서진 옥만 못하다(魚之欲 曷若熊之美 瓦而全不如玉而碎)’라는 구절이 자신의 마음을 잘 표현한 것이라 했다. 즉, 박원영은 븮맹자븯 <告子篇>의 사생 취의(捨生取義)를 자신이 지향하는 의병정신으로 인식했던 것이다. 1896년 음력 2월 22일 그는 나주에서 광주로 이동한 장성의 병을맞이하는실무를주관하였다.의병의깃발을광주향교의 문 앞에 높이 걸었으며, 의병의 규칙을 정하고 전략의 기획에 앞장섰다. 또한 당황해하는 기우만의 손을 맞잡고 ‘공은 몸을 아끼시오.하늘은 화를 후회하여 보답할 날이 있을 것’이라 격 려하였다. 이때 의병을 해산하라는 선유사의 명령이 전달되 고, 친위대와 진위대가 군대로 압박하였다. 결국 기우만은 의 병을해산한후잠시입산하기로결심하였다.그리하여음력2 월 그믐날 기우만의 주도로 ‘광산회맹’을 추진하던 일은 수포 로돌아가고말았다. 기우만이떠나면서박원영에게자중할것을거듭부탁하자, 박원영은 ‘공이 살면 나도 살고 공이 죽으면 나도 죽겠습니 다.’라고 말하여 안심시켰다.광주향교 임원이었던 그는 ‘광산 회맹’의 일을 마무리하기 위해 향교에 남았던 것 같다. 이 과 정에서 전주진위대에 체포되었지만,박원영의 기색은 평소와 다름없이 늠름하였다. 그들이 협박하기를 ‘우리의 마부가 되 면 살려주겠다.’라고 하자, 이에 박원영은 큰소리로 ‘너희를 따라 공경(公卿)이 된다 해도 나는 더럽게 생각할 것인데, 너 희의 마부가 되란 말이냐.’라고 꾸짖었다. 그들이 다시 ‘그렇 게 하면 묶은 손을 풀어주겠다.’고 하자, 그는 ‘머리를 자른 장 부(丈夫)는 있어도 손을 묶인 유생은 없다.’고 하였다.마침내 그는 이겸제가 파견한 전주진위대 중대장 김병욱(金秉旭)에 의해 처형되었으니, 1896년 음력 3월 3일이었다. 그들은 박원 영이 기우만의 측근이었기 때문에 체포 즉시 효수한 것이다. 선유사 신기선은, 박원영이 기우만과 더불어 사면 대상이었 으나갑자기효수되어한스러운일이라하였다. 박원영의 순절 소식을 들은 기우만은 자신을 책망하였다. 그는 제문의 말미에서 박원영의 기상이 눈이 쌓인 깊은 산에 외로운 소나무와 잣나무가 묵묵히 서 있는 모습과 같다고 추 모하였다. 박원영의 아들 경주(景柱)는 부친의 원수를 갚지 못했다며평생백립(白笠)을쓰고다녔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5년에 건국훈장 애국 장을추서하였다. 한번죽으매나라에사람있음을드날리고 역사의빛나는산은오직정신이라네(중략) 지금사람들어떻게천하의선비를알까 눈부신사적으로인을이루어전하네.-기우만의추모시- /제공,국가보훈처 독립운동가기우만과박원영 뱚기우만,호남최초로의병을일으키다 뱚박원영의의로운순국 ‘광주회맹’에앞장선박원영 박원영이 임원으로 있었던광주향교 2021.07.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