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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6월30일 수요일 7 (제174호) 기 획 △선무원종(宣武原從) 삼등공신(三等功臣)첨정(僉正) 박경 열(朴慶說) 사은공(沙隱公) 추(諏)의 7世孫이며 충순위 어모장군 휘 원신(元信)의둘째아들로태어났다. 김윤복 언복 형제와 이한남 고처겸 박봉수 김득례와 함께 창의하여 의병을 소모(召慕)하고 대오(隊伍)를 정돈하여 적 의 요해지(要害地)에 매복하고또는진로를차단하여적을격 멸하는 등 많은 전공을 세웠다. 1592년 6월 9일 문천회맹에 참 여하여 서사토적의 결의를 다졌으며, 1593년 10월 구강회맹 (鷗江會盟)에도 참여하여 동고록(同苦錄)에 서명하고 태화 강사수를결의하였다. 1594년 4월 3일 무과에 급제하여 벼슬이 훈련원첨정에이르 렀으며, 울산경주 영천 대구 등 여러 전역에서 수많은 전공을 세웠으며서생왜성의창표당안에등재되어있다. 1605년 4월에 선무원종공三등에녹훈되었다. △선무원종(宣武原從)삼등공신(三等功臣) 守門將(수문장) 박계종(朴繼宗) 무안현감 홍권(弘權)의 아들로 울산 대복리에서 출생하였 다. 어릴 때부터 영리하고 기개가 있어 경서에 달통하였고 궁 사승마에도능해문무가겸전하였다. 임진왜란을 당하여 왜적대군의 성세(聲勢)에 관군은 흩어 져 도망하여 19일에 울산읍성과 병영성이 무혈점령 당하자 숙부 홍춘(弘春) 홍남(弘楠)과 더불어 대소가의 숙질과 마을 의 장정을 모아 창의하여 운문산의 의병진에 달려가 서생과 양산쪽에서들어오는적을막았다. 전천(箭川)전투에서 경주 의병장 김호와 더불어 경주로 들 어가는 적을 섬멸하고 신광윤 부자와 단조봉의 사자평에서 적을물리쳤다. 숙부 홍춘공을 따라 기장읍성 수복전에 참전하여 큰 공을 세우고 정유재란 때 도산성 공선전 때는 도원수 권율의 막하 에서 용전분투하여 큰 공을 세워 조정에서 선무원종삼등공신 에녹훈하였다. △선무원종(宣武原從)삼등공신(三等功臣) 절충장군(折衝將 軍)박영록(朴榮錄) 안일호장(安逸戶長) 세량(世良)의 아들로 울산 유곡촌에 서 출생하였고 어릴 때부터 명석하고 기개가 있어 글을 좋아 하였고궁사(弓射)와승마에도능했다. 종형 응춘(應春)과 대소가의 숙질 및 마을의 장정을 모아 동대산의 기박산성의 의군진으로 부진하였다. 병영성 기습 공격으로 큰 전과를 올리고 기장과 서생쪽에서 수로로 들어 오는 적을 공암과 나아에서 물리치고 석읍으로 진을 옮겨 경 주의병장 황희안 이눌 김응택 김응하와 더불어 여러 차례나 공을 세우고 문천회맹에 이이 계사년 태화 강구로 들어오는 적을 물리치고 멀리 장기 소봉대와 안동까지 나아가 공을 세 웠다. 정유재란 때 조명연합군이 도산성을 칠 때 도원수 권율의 막하에서용전분투하여큰공을세웠다.조정에서선무원종공 신三등에녹훈하였다. △선무원종(宣武原從)삼등공신(三等功臣)어모장군(禦侮將 軍)박영준(朴盈遵) 박영준은 일명 사종(嗣宗)으로 1557년(명종 十二)에 울산 북구 상안동에서량(樑)의 장자로 출생하였다.려말에 문과에 급제하여 한주백을 거쳐 충정감사를 역임하다가 고려가 망함 에 갓을 벗어 성남에 걸고 낙향하여 종신토록 은둔한 추(諏) 의六세손으로무과급제하여수문장을역임하였다. 1592년 4월에 왜적 대군이 부산 다대포로 침범하여 병사 이 각과 군수 이언함 등은 성을 버리고 도주하여 영성은 공허하 여왜적에게무혈점령당했다. 이때 이 고을 의사 서몽호(徐夢虎) 서인충(徐仁忠) 박홍춘 (朴弘春) 전응충(全應忠)등은 공의 친인척간으로서 뜻을 같 이하고 산곡간에 피신한 장정들을 모으니 달포가 못되어 三 千명의의병을모았다. 공(公)의 매부인 전응춘을 따라 아우 사남(훈련원주부)과 함께 참전하여 준동하는 적을 무찔렀다. 이해 九월에 순찰사 한효순과 좌병사 박진이 울산의진의 첩보를 듣고 도임(到臨) 하여 인망이 높은 전만호 김태허를 가군수로 특사하고 전현 감 박홍춘을 서면장으로 삼아 동래 기장의 적을 막게 하고 전 봉사 전응충을 남면장으로 삼아 양산 기장의 적을 막게 하고 서인충을 주사장으로 삼아 공사선(公私船)을 수리하여 해상 을 막게 하고 사군수 김태허는 위급한 첩보에 따라 군사 三백 으로 지원하게 하여 그 후 七~八차례의 전투에 수많은 전과를 올렸다. 왜적은 대대적인 병력을 갖추어 四道로 나누어 병진 할 때 군병은 중과부적하여 경주로 이진하여 주사장 서인충 은 이견대해 중에서 적 참살이 부지기수(不知其數)라 하였고 대왕암 봉길 장기 소봉대로 전전하며 二백여급을 참살하고 군기를노획하는전과를올렸다.울산의군들은경주에서멀리 안동까지 나아가 적을 무찌르고 八월에 들어 좌병사 의군과 함께 울산에 준동하는 적을 격퇴시켜 고을을 수복하는 큰 공 을 세웠다. 전황은 강화교섭으로 소강상태에 접어들어 울산 경주 의병들이 주동이 되어 끝까지 왜적을 무찌르자는 十월 二十九일의 구강회맹에 참가하여 결사 항쟁할 것을 회맹하고 동고록을작성하였다. 그 후 도 산 성 에 서 최 후 로 적 을 물 리 칠 때 까 지 는 七 년 전 쟁 에 용전분투하여 그 전공으로 난후 선무원종삼등공신에 녹훈 되었다. △창의의사(倡義義士)병마우후(兵馬虞侯)박경은(朴慶殷) 사은공 추(諏)의 7世孫으로 자는 선익(善翼)이요 무과에 급제하여어모장군월성만호병마우후경력등을역임하였다. 장정들을 모아 창의하여 기박산성의 의군진으로 달려가고 23일에 편대하여 병성으로 시작한 항왜토적은 경주와 울산을 왕래하며여러차례나큰공을세웠다. 1593년 태화강구 싸움에서 화공으로 적선을 격파하고 관문 성전투에서경주의군을도와수천의의군을물리쳤다. 정유재란때방어사곽재우의화왕산성수성전에서적을물 리치고 끝까지 결사 항쟁 하자는 서명을 하고 이해 12월에 있 었던 도산성 공성전에서는 연합군의 선봉에서 용전분투하였 다. 난이끝나고전공이조정에알려져보성군수와경상좌도병 마우후에제수되고선무원종삼등공신에녹훈되었다. △ 창의의사(倡義義士) 훈련원(訓鍊院)첨정(僉正) 박능정(朴 能精) 동래 수성장으로 순절한 안세(安世)의 자이다. 호는 송암 (松巖)이고 정략장군훈련원첨정이다. 일직 무예를 익혔으며 특히 궁시사후(弓矢射帿)에 적중하지 않음이 없었으며 지용 이뛰어나사람들의우러러본바되었다. 임진란이 일어나자 아들 붕(鵬)과 함께 분연히 탄식하기를 대장부 세상에 태어나서 나라의 변란을 당하여 차라리 전쟁 터에서 시체를 말가죽에 싸는 한이 있다 해도 어찌 집에 앉아 몸을보존하리요하고의병을일으켰다. 하양 의병장 신해(申海) 황경림(黃慶霖) 김거(金據) 허대 윤(許大胤) 허응길(許應吉) 등과 북진하는 왜적을 처단하니 감히 하양성을 침범하지 못하였고 이에 용기를 얻어 하양성 (河陽城)을 견수(堅守)하였으니 이 고을은 어느 고을보다 피 해가적었다. 1594년 4월 3일에 별시무과(別試武科)에 급제하여 전공을 인정받아 훈련원(訓鍊院) 첨정(僉正)에 제수 되었고, 1596년 9월에 화의의 교섭이 결렬(決裂)되자 왜적은 十五만 대군으 로재침하여정유재란이일어났다. 서생포에 있던 기요마사는 12月 15日에 우리 군현의 부노 (父老)에게다음과같이포고를하였다. 뷺조선왕국이 무도하여 이웃나라와 화목치 않음으로 이에 다시 대군을 일으킨 것이다. 서민들은 생도에 안심하고 각관 과좌수 별감그리고경내에있는색장(色掌)유사(有司)들은 성명을 등록하고 각 관리의 수효와 전결수(田結數)를 자세히 기록하여 서생포와 울산진중으로 가지고 올 것뷻이라고 하였 다. 12月 21日에 양호(楊鎬)와 마귀(麻貴)등은 대군을 이끌고 조령에서 안동을 거쳐 경주에 이르러 도산성을 공성키로 하 였다. 이때 경리양호(經理楊鎬)는 도원수 권율에게 명하여 경상 좌수사 이운룡으로 하여금 서생포로 출동하여 왜적을 견제토 록 하였고 이 작전에 참여한 공은 용전분투하였으나 중과난 적으로장렬하게순절하였다. △ 창의의사(倡義義士) 훈련원(訓鍊院) 봉사(奉事) 박응정 (朴應禎) 사은선생 박추(朴諏)의 七세손이고, 봉렬대부 선략장군 창 암공 여림(汝霖)의 독자로 1539년(중종34)에 북면 제내동 본 가에서출생하였다. 자는국서(國瑞),호는병계(屛溪)이다. 공은 충의세가의 가훈을 이어받으니 지행이 청고(淸高)하 고 지식이 초탁(超卓)하여 울연(蔚然)히 유림의 추앙을 받았 다. 공이 53세 때인 선조 25년 4월에 왜적대군이 부산으로 상륙 하여 부산진성과 동래성을 차례로 함몰시키고 19일에는 울산 읍성과 병영성을 무혈점령한 적도들의 천인공노할 만행에 분 연히창의하여동지들과기박상성으로집결하였다. 23일에 박봉수를 대장으로 삼고 공은 좌익장으로 편대하고 5월 5일에 경주의병 五백이 찾아와 합진하고 7일 밤을 틈타 병영성에 둔거하는 적을 기습하여 큰 공을 세운 후 여러 의병 장과함께운문산으로진을옮겨군비를갖추었다. 6월 7일 문천회맹으로 좌도 여러 고을 의병들이 모여 결사 항쟁할 것을 회맹하고 영천의병장 권응수의 영천성 수복전에 분투하여 큰 공을 세우고 계사년 二월에 태화강구 전투와 관 문성 싸움에 분전하였고 대수장군 이안국공과 함께 위해처 (危害處)마다 찾아가 큰 공을 세우고 정유재란 때 도산성 전 투에서도원수권율막하에서용전분투하였다. △창의의사(倡義義士)훈련원(訓鍊院)봉사(奉事)박홍남(朴 弘楠) 사은공 추의 7世孫이고 무안군수(務安郡守) 지영(之榮)의 장남으로 선무원종 1등공신 학수당 홍춘의 종제이다.자는 경 형(景亨)이오 호는 설망헌(雪望軒)으로 1559(명종14)년에 태어났다. 종형 홍춘과 함께 의병을 모아 창의하여 운문산의 의병진에 들어가고 6월 2일 좌병사 박진이 찾아와 의군을 위 로함에사기는충전하였다. 공은 문천회맹에 참가하고 남산전투에 이어 영천성 수복전 과 경주부성 탈환전에 큰 공을 세우고 멀리 안동과 당교전투 에도참전하여용전분투하였다. 정유재란 때 팔공산성의 세 번째 회맹에 참가하고 도산성 전투때는조선군도원수진에들어가전도(前導)하며큰공을 세웠다. △창의의사(倡義義士)훈련원정(訓鍊院正)박계숙(朴繼叔) 자는 비윤(丕胤)이요 호는 반오헌(伴鰲軒)으로 1569 (선조 2)년에 선무원종 1등공신 홍춘의 아들로 웅상 용당리에서 출 생하였다.어릴 때부터 천성이 탁영(卓榮)하여 경서에 통달하 였고 궁사승마(弓射乘馬)에 능하고 문무가 겸전하였으며 덕 망이있었다. 임진왜란을당하여아버지를따라대소가형제숙질과더불 어 창의하여 운문산에 부진하고 부공(父公)을 도와 언양읍성 공성전에서 용전분투하여 큰 공을 세우고 부산 기장쪽과 양 산등지에서들어오는적을막았다. 9월에 순찰사가 병사와 더불어 울산을 찾아와 의병을 통합 편대할 때 부공인 홍춘은 서면장으로 추대되어 10월에 기장 의병장 김일덕(金一德) 김일개(金一介) 형제와 더불어 기장 읍성을기습하여적을물리치고큰전과를세웠다. 1594년 4월에 무과별시에 급제하여 관군으로 편대된 후 선 전관(宣傳官)에 오르고 난후 함경병사 김응서(金應瑞)의 우 후(虞候)를 지냈으며 자헌대부로 증직되었고 부북일기(赴北 日記)가 전해오고있다. △창의의사(倡義義士)수성장(守城將)박붕(朴鵬) 호는 관학암(觀鶴庵)으로 동래수성장 안세(安世)의 손자이 며임란창의의사훈련원첨정능정(能精)의아들로태어났다. 임진왜란 때 하양(河陽) 의병장인 아버지 능정공(能精公) 을 도와 장정을 소모하여 신해 황경림 김거 등 제의사와 더불 어의병을일으켜영천에서대구로진입하는적을막았다. 왜적은 하양읍성을 점거하고 자인과 압량 등지로 침범하여 살인 약탈 방화 등의 만행이 이어질 때 자인 의병들과 힘을 모 아 적을 무찌르고 영천 의병장 권응수가 영천성 공성전을 펼 때 공은 많은 의병을 휘동하여 선봉에서 분투하여 성을 수복 하고이어창암전투에참전하여큰공을세웠다. 공의 분전으로 하양고을이 평정되자 조정에서 수성장으로 제수되고 5년간 견수(堅守)한 공이 있고 정유재란 때 조·명연 합군이 서생성과 도산성을 칠 때 부자가 함께 참전하여 분투 하던중부공은진중에서장렬히순절하였다. △ 창의의사(倡義義士) 증 병조판서(贈兵曹判書) 박영진(朴 英璡) 공의 자는 국진(國珍)이요 10월21일생이며 고휘(考諱)는 연(堧)이요 조휘(祖諱)는 형창(亨昌)이요 증조휘는 자번(自 蕃)이다. 일직 무과에 급제하여 선전관(宣傳官)에 제수(除 授)되었다.선조임진4월에 왜구가침범하여국권을위태롭게 하였는데 이에 선조대왕은 공에게 남해안의 순시어명으로 대 포진에 다다르니 왜적은 이미 해안을 점거(占據)하여 민생을 살육방화약탈(殺戮防火躍奪)을 자행하고 있음을 목도(目覩) 하고곧왕에게보고하고접전하였다. 공의 분의역전(奮義力戰)으로 적의 피해를 주었다. 그러나 화살이다되고기진하여유서를남겨두고순의(殉義)하니때 는 선조임진 10월 15일이었다. 그 유서가 상재(尙在)하다 하 였다. 전후에 병조판서에 증직되고 선무원종공신삼등에 녹훈 되었다. △창의의사(倡義義士)박인범(朴仁範) 공의 휘 인범 1560년(명종15)에 부만호(父萬戶) 휘 붕(鵬) 과 의인평산김씨 사이에 출생하였고, 조휘(祖諱)는 만호 억 년(萬戶 億년)이요 증조 휘는 만호 지원(枝遠)이요 고휘는 무 과창문(武科昌文)이다. 1592년 임진(宣祖二十五年)에 본부사 원희(本府使元禧)와 창의(倡義)하여 길주임면(吉州臨冥)에서 많은 전공을 세우 고 임진 7월10일에 부사 원희와 함께 중과난적(衆寡難敵)으 로시진포위(矢盡包圍)되어전몰하였다. 순조 2년 임술(1802)에 조정에서 청암사에 배향하였고 철 종 10년(1859년) 기미(己未)에 통훈대부군기시정(贈通訓大 夫軍器寺正)의 증직이 내려지고 사액 숭렬서원(賜額崇烈書 院,함경북도청진시)에배향하였다. △창의의사(倡義義士)권관(權管)박예범(朴禮範) 공의 휘는 예범이니 1566년(명종21)으로 의사 인범의 친 제(親弟)이다. 무과에 급제하여 세천권관(細川權管)에 제수 (除授)되었다. 1592년 7월 10일에 형의 전사소식을 듣고 애훼 통곡(哀毁痛哭)하고 의병진에 부진(赴進)하여 7년간에 걸쳐 동분서주(東奔西走)하여 좌충우돌(左衝右突)로 수많은 전공 을세웠다.이로서 형의원수(怨讐)와국수(國讐)를보답하였 다. 높은 관작(官爵)이 내려져도 모두 받지 않고 여생을 경사 연독(經史硏讀)하며 전공을 남에게 말하지 않았다.1629년 11 월 24일에 하세(下世)하니 향수 64세이다. 순조기말에 통훈대부군기사정(贈通訓大夫軍器寺正)에 증 직되고사액 숭렬서원(賜額崇烈書院)하다. 뱚▶6면에서계속 부북일기(赴北日記):무과에 급제한 박오헌 박계숙과 그의 아들 만회장 취문이 최전방지역인함경도회령에서40년의시차를두고각기1년씩초 급장교 라 할 수 있는 군관 으로 복 무할 때 쓴 일기이 다. 3월 30일자 제 171호 6 면 관향조 약사 ‘의흥박 씨’ 기사내용 중본문첫머리에‘의흥박씨는밀성대군후의흥박 씨와개성왕씨의의흥박씨가있다.’를‘구산군후의흥박씨와.....’ 본문중‘밀성에서구산으로 분관한 이후지명의흥을따 일부 후 손들이 의흥으로 사용하고있다.’를‘밀성에서의흥으로 분관이 후 의흥의 구 지명 또는 별호인 구산을 따 일부 후손들이 구산으 로 사용하고 있다.’, 맺은 말의 ‘구산박씨의 후예인 대구경북지 역의 의흥박씨’를 ‘구산군의 후손인 대구경북지역의 의흥박씨’ 로 정정을 요구하는 내용증명을 구산(의흥)박씨대종회(회장 박 정창) 명의의 내용증명(2회)을 수신 받은바 있어 정정하고 귀 종 중에정중히사과드립니다. 현재대종회공식명칭이 ‘구산(의흥)박씨대종회’이고지난 해11 월 발간된 세보 표제 또한 ‘龜山(義興)朴氏世譜’로 발간한바 있 어 이 같은 표현을 하였으나 좀 더 주의를 기울여야 했음에도 그 렇지못한 점사과드립니다. ※바로잡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