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page

2021년6월30일 수요일 4 (제174호) 기 획 학산서원이 있는 울산은 경상북도 동해안에 자리하고 있다. 삼한시대에 진한에 속하였으며,신라 제5대 파사왕 때 굴아화 촌으로 개칭되었고, 고려 태조 때 박윤웅이 고려 태조를 도와 고려국을 일으켜 흥(興)하게 하였다하여 하곡, 동진, 우풍의 3현을 합하여 흥려부로 승격하고 하사하면서 흥려부로 개칭 되었다.조선 태종 13년 울주를 울산군으로,선조 31년 울산도 호부로 승격, 고종32년 울산 도호부가 울산군으로 개칭되었 다.이처럼 울산은 흥려백 장무공 박윤웅을 빼놓을 수 없는 곳 이다.고려가 기울고 조선이 개국하자 두 임금을 섬길 수 없는 고려의 신하라며 벼슬을 버리고 은거한 사은 박추,류은 박유, 임진왜란에 창의한 선무원종일등공신 학수당 박응춘은 울산 이 자랑하는 인물이다. 이에 이들이 배향된 학산서원은 유림 의발길이끊어지질않는유향의명소이기에소개해본다. 학산서원의 전신(前身)은 용강사(龍岡祠)이다. 용강사는 경남 양산시 용당동 191번지에 1851년(철종2, 辛亥) 봄에 사 림과 후손들의 공의(公儀)로 창건되었다. 사당은 용강사(龍 岡祠), 강당은 모선재(慕先齋)로 각각 편액하고 그해 9월에 완공하고 울산박씨 시조인 흥려백 장무공 박윤웅을 주벽으로 봉안하고려말충의(忠毅)충청감사사은공박추선생을배향 하고 매년 9월 중정에 향중 사림들과 후손들이 향사를 받들었 다. 1871년(고종8, 辛未)에 대원군의 서원 훼철령에 의해 훼철 되어 향화가 끊어졌다가 1905년(광무9, 乙巳)에 후손이 힘을 모아 구지(舊址)에 설단(說壇)하고,강당 4칸과 포사(부엌)4 칸, 삼신문과 대문 3칸을 세웠다. 이때 강당 모선재의 기문은 국리박희영이찬하고유허비문개갈(改碣)은숭정대부행시 종원경 완산 이근수가 찬하였다. 모선재기는 가선대부 행 장 예원소경진주강우형이찬하였다. 1940년 모선재 중수를 하고 중수기문은학성이우락이찬하 고 1973년 모선재를 재중수하고 그 記文은 학성 이우락이 찬 하고 대흥파(大興派) 유은공(柳隱公) 후손 승기(承基), 승열 (承烈),정팔(禎八),정대(禎大)등이 사은공(沙隱公)의 종제 (從弟) 휘 유(諱 愈)를 배향(配享)하여줄것을 청원하매 즉시 공의(公議)를 부쳐 배향하기로 결정하니 류은공 후손들은 설 단비용과아울러위토답400여평을헌납하였다. 1984년 9월 향례후 종회시 유사 정양(政洋)씨 제의(提議) 하기를 우리 용강단소가 아직까지 복원되지 못하고 노단에서 제향하니 후손된 자 죄책감이 생긴다. 하루속히 옛 용강사를 복원하자고 역설하니 듣는 이 모두 찬성하며 곧 이행하자고 말하였다. 그러나 공사비의 문제가 대두되자 제내 문중 주엽 (注燁)이 말하기를 대동보 수보기기도 되었으니 아울러 수보 하여 분질할 때 책대(인쇄비)외 봉성금의 내용으로 가상하여 약 1,000여질이 반질되면 후손 천명이 동참하는 뜻이 있음으 로그렇게하자하니모두찬동하였다. 1985년부터 수보업무 시작하여 익년 7월에 인쇄를 마치고 반질하였다. 1985년 9월 향례때 복원사업 추진위원회를 결성 하고 규약(規約)을 재정하고 임원을 선발하여 용강사 복원사 업을 시작하였다. 1988년 8월13일 태화동 진미식당에서 각파 대의원 50명이 참석한 가운데 회의 제안건을 심의 결정하니 다음과같다. 1. 말응문중 학수당공 후손 원식씨(源植氏)께서 제의(提 議)하기를“용강사의복원도좋은일이나여생이얼마남지않 은 내가 무슨 욕심이 있겠나하면서 우리 문중 땅(태화동 산36 -6) 일천여평을 대종회에 헌성하겠으니 옛 장무공 선조의 소 거지이며 주 활약하시던 곳이고 유림출입 후손의 참여하는 대도 용이하니 이곳에 거각을 지어 앞으로 서원으로 만들면 좋겠다.”하였다. 2. 가부표결에 부치니 찬성45, 반대5명으로 합리적으로 가 결하였다. 1986년 3월 31일자 1차공사에 사당, 강당, 삼신문 대문을 정하고 2차공사는 종택을 짓고 3차는 동서재와 전사 청과 관리실을 짓고 나머지는 4차로 하기로 하고 경주시 황호 동 김상헌(金尙憲) 도목장(都木匠)과 1차공사비 82,000,000 만원으로계약체결하였다. 1986년 토목공사비 18,200,000원과 1990년 3월에 2차공사 종택건축공사 역시 김상현씨와 60,200,000원에 계약체결하니 도합 2억2천98만원이었다. 잔여공사는 자금고갈로 중단되었 다. 2003년 단답(壇畓)일부를 매각하여 전사청과 존양재(存養 齋)를 건립하고 신도비를 수립(竪立)하였고 2004년 12월부터 2005년 8월까지 존덕사(存德祠)경내의 배위석(拜位席)에 석 판(石板)과 사당 주위(周圍)에 모두 석판(石板)을 깔았고 계 단(階段)양편에손잡이공사스텐레이스재료로시공하여승 강(昇降)에편의를도모하였다. 한편 사당 강당 내삼문 외삼문 종택등 도장(塗裝) 공사를 하여 빛나게 하였다. 2005년 5월 전북 남원시 산내면의 금호 김을생(金湖 金乙生,인간문화재)의 금호공방에서 위패(位 牌) 4위(位), 교의(交椅) 4위분, 제상(祭床) 특1개(個) 보통3 개(個), 향탁(香卓) 4개(個), 두재기(豆祭器) 16個, 축판(祝 板)1개(個)를주문계약하여동년8월20일납품되었다. 2005년(乙酉) 9월 중정(中丁)에 향도유림 파록(爬錄)으로 신도비 수립(竪立)과 위패位牌 4位 제위봉안고유(題位奉安 告由) 행사를 봉행하였음을 명실공히 학산서원의 위상이 저 현(著現)되었다. 당시 서원 복설을 축하하는 시(詩)가 수 백 수가답지해이를한권의시집으로묶어전해진다. 학 산 서 원 의 제례 의식은 보 통의 서원과 같 다. 서원 유사 회 의 를 거 쳐 제 관을 선정하고 정 해 진 기 일 안 에 천권(望紙) 를 보낸다. 예 전 에 는 전 입 입 재하였는데 지 금은 제례 당일 오전 10시 개좌 를 열 어 헌 관 을 제외한 내외집 사를정한다. 제례 의식은 모든 집사가 먼 저 관세위에 손 을 씻 은 후 재 배하고 각자의 위 치 에 서 면 알 자가 초헌관을 인도하여 신을 부르는 분향례와 폐백을 올린다. 이것을 전폐 례라 한다.이후 초헌례와 아헌례 종헌례 순으로 잔을 올린 다 음 음 복 례 를 행 한 다 . 음복례는 초헌관이 음복자리로 나아가 서쪽을 향해 꿇어앉 는데, 다른 서원은 북쪽을 향해 꿇어앉아 음복을 하는 경우도 있다. 이는 각 지방, 가정마다 예법이 다르기 때문에 이를 두 고 말할 필요는 없다. 음복례가 끝나면 축문을 불사르는 의식 인망요례(望燎禮)에이어제관과참례자가신문을통해나오 면 축을 비롯한 모든 집사자가 사신재배를 올림으로서 제를 마친다. 그 리 고 진 설 은 소 사 (小 祀 ) 의 개 념 인 좌 4 변 우 4 두 를 진 설 하 고, 생우(牲牛)를 진설하고, 장무공께서 조정으로부터 하사 받은곽암(미역바위)으로인해좌측에미역을놓는것이특징 이다. 곽암(藿巖,울산광역시기념물제38호)울산 북구구유동판 지마을 바다 속에 있는 곽암은 미역바위라는 뜻이다. 이곳 판 지마을 바다 속에 있는 자연암인데 ‘양반돌’,‘박윤웅(朴允雄) 돌’등으로 불려지기도 한다. 1937년에 간행된 븮흥려승람븯(興 麗勝覽)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있다. 박윤웅은 동진(東津: 현재의 농소·강동)을 채지(采地)로 하사 받았다. 어촌계에서 강동(江東)의 미역바위는 어촌계에 위탁 공동 관리되고 있어 그 수입의 일부를 대종회에 납입 제 수지로 충당하고 있다.바위에는 ‘允雄’이라는 두 글자가 새겨 졌는데, 이것은 박윤웅의 위대한 공훈과 영원토록 썩지 않을 뜻을기려서새긴것이다. △울산박씨시조장무공박윤웅 박윤웅은 당초 양산(楊山)에 살고 있었는데 신승(神僧) 도선 (道 詵 ) 이 산 을 답 사 하 다 가 여 기 에 이르러 그를 방문하여 기이하 게 여기고 울산(蔚山)의 계변성 신두산(戒邊城神頭山) 아래로 이주하도록 터를 잡아 주어 이주 하였다. 이때 한 쌍의 학이 금신 상(金神像)을 물고 신두산에서 울세 사람들이 이상하게 여겼다. 따라서 신학성(神鶴城)이라 하 고 박 윤 웅 을 추 대 하 여 븮 신 학 성 장 군븯으로 삼았다. 앞 사람의 시에 이르되 뷺학성 오도의 풍연이 예로운데 염포 운파엔 세월이 밝 았도다뷻라하였다.이에도선의예언에 따라 대호족장(大豪族 長)으로써 계변성주(戒邊城主)가 되었다.중소호족들을 회유 하여 통합하고 병마(兵馬)를 양성하여 안으로는 백성들을 안 정시키고 밖으로는 도적을 방어 하였다. 이 때 신라의 국운이 다하여 국정이 혼란하고 군웅(群雄)이 배반하고 도적이 창궐 하여백성들이도탄에빠졌다. 고려 태조의 위세와 명성이 매우 높이 나 천명(天命)이 돌 아오고 민심이 다 따랐다. 박윤웅은 정통한 변통의 방책으로 토벌(討伐)의 권한을 전제(專制)하여 신숭겸(申崇謙) 배현 경(裵玄慶) 복지겸(卜智謙) 유금필(庾黔弼)등 28장군과 더 불어 고려태조를 보좌하여 삼한을 통합하였다. 이에 태조가 고려를 일으킨 제일공신으로 삼아 대장군(大將軍)으로 발탁 임명하고 박윤웅이 고려를 흥하게 하였다하여 살던 하곡현 (河曲懸) 및 임관군(臨關郡) 동진현(東진縣) 동안군(東安 郡) 우풍현(虞風縣)등 5개군현을 합하여 흥려부(興麗府)로 개칭하고 박윤웅을 흥려백(興麗伯)으로 봉하고 흥려부 전지 역을 사패(賜牌=나라에서 공신에게 토지를 내려주는것)하여 채지(采地=경대부의 封邑. 그 租稅를 받아 봉록으로 하는것) 로 하였다.그리고 또 유포(有捕)의 해곽(海藿)열 두 개의 바 위를 하사하고 그 암면(岩面)에 ‘允雄’이라는 두 글자를 새겨 영원히 전하도록 하였으며 사후(死後)에 장무(莊武)라는 시 호를내려졌다. 태조23년(庚, 940) 신흥사(新興寺)를 중수하여 공신당을 세우고 동서 양벽에 개국삼한통합공신의 화상을 걸어놓고 무 차(無遮)대회를베풀었다.문종때중국이성황당제도를도입 하여 공신으이 출신지 주(州),군(郡),성(城),진(鎭)마다 성 황당을 두어 공신의 위패를 봉안하고 주, 군, 부의 수령이 매 년향사하게하였다.이곳울산에는울산광역시중구우정동2 76-43번지에장무공을모시는성황당유적이있다. 장무공(莊武公)이 영명(英明)한 자질을 타고나 문무(文 武)의재능을보였듯후손역시충과효를근본으로하여고려 조에서부터 근세에 이르기까지 걸출한 인물을 배출 명문가로 자리하고있으며,고려대전과학산서원에배향되어있다. 하늘이 해동(海東)을 도와주어 신학(神學)이 상서를 나타 냈다. 선생이 탄생하셨으니 세상에서 뛰어나신 현량(賢良)이 라. 역수(曆數)를 밝게 살피시고 고려태조를 보좌하여 여러 흉도를 제거하고 백성들의 고난을 구제하였으며, 삼한을 통 일하여 개국원훈 되셨도다. 주(周)나라의 여상(呂尙, 왕무를 도와서주나를세운태공망)이요은(殷)나라의이윤(伊尹,임 금을 도와 은나라를 세운 명재상)이로다. 모토(茅土, 공신에 게 내려주는 토지)를 나눠주고 영지(領地)로 녹을 주었으며, 높은 관작 봉해주고 포상하였으니 흥려백에 봉해졌고, 장무 라는 시호까지 내려졌다. 위대한 공훈이 백딚록 전할지니 그 어찌 흠앙하지 않으리까. 학산의 양지쪽에 새 사당이 장엄한 데 좋은 날 가려서 신주를 봉안하옵고 희생과 술을 이미 갖췄 습니다. 한줄기의 기맥으로 봉배향하여 삼현(三賢)이 차례로 모셨습니다. 이러한 조상에 이러한 자손이시니 그 빛이 크게 나타났습니다. 양양하게 오르고 내리시며 이 맑은 잔을 흠향 하여주옵소서. △사은공(沙隱公)박추(朴諏) 선생의 호(號)는 사은(沙隱)으로 고려말기 충절을 지켰다. 장무공의 16世孫으로 충목왕대 출생하여 공민왕조에 문과에 급제하여 한림학사를 거쳐 한주군수(韓州郡守)와 충청감사 를 역임하였다.고려국운이 종말에 고하자 갓을 벗어 성남(城 南)에 걸어 놓고 목은 이색, 야은 길재와 울음으로 이별하면 서 시를 지어 이르기를 ‘두견새는 촉나라의 삼춘(三春)을 피 눈물로 요양(遼陽)으로 돌아가는 학은 만리의 마음일세’라 하였다. 울산부 북쪽 사량동으로 돌아와 종신토록 두문불출하면서 외부 인사와의 접촉을 끊어 버렸다. 앉을때도 한양이 있는 북 쪽을 향하지 않았고, 문(門)도 북쪽으로 여닫지 않았으며, 스 스로 죄인이라 하여 하늘의 해조차 보지 않았다. 아침저녁 끼 니로는 쌀알을 갈아서 끓인 미음으로 겨우 연명하니 이를 본 마을 사람들이 ‘한주댁 죽맷돌’이라 하였으며 마침내 충성의 의분으로일생을마쳤다. □ 봉안문(역문)=이름난 조상의 어지신 후손으로 학문이 섬부하고덕이높으셨다.계적(桂籍,문과에급제한사람의명 부)에 이름이 등재되어 운로(雲路, 벼슬길)에 발을 디디었도 다 . 내 직 과 외 직 을 역 임 하 며 찬 양 (贊 襄 ) 할 것 을 능 히 생 각 하 셨도다. 임금은 주즙(舟楫)으로 살았으며, 백성들은 감당(甘 棠,주나라 공이 남방에 가서 감당나무 밑에 막사를 짓고 기거 하며 선정을 베풀어 내종에 백성을 감당시를 지어 띥었음)을 읊었도다.조정의 정치가 날로잘못되어종사(宗社)가위태할 세, 일시을 불고하고 심력을 다하여 공구하여 회복하려 애썼 으 니 큰 집 이 장 차 기 우 는 데 한 개 의 나 무 로 지 탱 하 기 어 려 웠 다.마침내 고려의 국운이 망할 새 두 임금을 섬기지 않으려고 맹서하고 사량동에 돌아와 은거하며 두문분출로 일생을 마치 셨다.곧고충성과고상한절의는후인들을경려(警勵,경계하 고 격려하는 것)할 만 하였도다. 장무공을 봉안할 새 사당에 공의 배향이 마땅하였도다. 재기의 진설이 있사오니 여기에 내리시와흠향하여주사이다. △유은공(柳隱公)박유(朴愈) 사은공의 종제이다. 사은공과 더불어 문과에 동방급제하여 한림학사로 남평감무가 되었다가 역시 고려가 망하자 두 임 금 섬기는 것을 부끄럽게 여기고 그 아들 정랑공(正郞公, 휘 근)과함께벼슬을버리고두문동여려어진이와울면서이별 하 며 시 를 읊 어 이 르 되 ‘죽 기 를 맹 세 하 고 스 스 로 그 뜻 을 지 켜 하려는데 나는 장차 어디로 갈 것이냐.세상과 함께 세월을 쌓 아가 아름다운 이름을 천추에 전해가리’라 하였다. 오류동에 은둔하여절의를굳게지키다가세상을떠났다. □봉안문(역문)=장무선조의 어지신 후손이요 사은공의 종 제로서 종반간에 동방으로 급제하여 맑은 계제를 역임하셨도 다.흥망이일정한운수있어고려의사직이망하자두임금섬 김을부끄럽게여기시며마음에남의신복(臣僕)안되려고하 시면서, 초연하게 갓을 벗어 성남에 걸어놓고 여러 선비들과 울음을 작별한 뒤 버려진 거친 땅에 자취를 숨기시고 띠집지 어 기거하며 죽음으로 맹세하고 스스로 안정하며 절의를 굳 게 지키셨다. 세상과 함께하여 세월을 쌓아가며 아름다운 명 성이 천추에 전해지리.늠름한 높은 풍도 강상을 부식했다.도 (道)가 백이숙제(伯夷叔齊)와 같았으니 백세토록 우러를 만 하였도다.이에봉안의의식을거항하옵고영원토록향사하며 폐하지않으리라. △학수당공(鶴睡堂公) 의 휘는 홍춘(弘春)으로 사은공의 6 대손으로 남달리 뛰어난 지략으로 문무(文武)를 겸전하였다. 일찍이 무과에 급제하여 선전관(宣傳官)과 훈련원 주부를 역 임하고 언양,기장 두 고을의 수령을 지내면서 가는 곳마다 많 은치적을남겼다. 벼슬에 더 진취할 뜻이 없어 벼슬을 버리고 돌아와 쉬고 있 다가 임진년 왜란을 당하자 분연히 창의 토적하여 병란을 평 정하고국가를보위하여1등공훈에참여하게되었다.(관련기 사 6 면 ) □ 봉안문(역문)=장석(匠石, 옛날 유명한 장인의 이름)의 동산엔 반드시 좋은 목재가 나오며 균계(菌桂,계수나무 비슷 한 향기나는 나무)의 숲에는 반드시 영지(靈地 )가 나오나니 사은공의 가문에 공의 뛰어남이 마땅하였도다. 선조의 어진 덕을 타고나서 지기가 굳세고 바르셨다. 남보다 뛰어나신 지 략으로 문무를 겸비하셨도다. 일찍이 무과에 급제하시어 두 고을을 역임하였다. 명리(名利)를 탐탁하게 여기지 않으시와 관직을 버리고 향리로 돌아왔다. 임진년 왜란에 창의하여 적 을 쳐서 나라를 편안하게 하셨으니 그 공훈은 사직을 보존했 고,이름은역사에전해졌다. 제(齊)나라의 전단(田單, 전국시대 제나라의 장수로 기이 한 계략으로 나라 군사를 격퇴하고 빼앗겼던 70여 성을 수복 하였다.)이요 송나라의 무목(武穆, 전군을 격파하여 공을 세 운송나라岳飛의시호)이셨다.전해오는세덕을잘이어조상 에 빛남이 있었도다. 한 사당에 배하여 무궁하게 보사(報祀) 하리이다. 뱚서원탐방 울산박씨학산서원 학산서원전경,①사당(存德祠)②전사청③내삼문(景仰門)④장무공신도비⑤강당⑥동재(存養齋)⑦외삼문(崇節門)⑧종택 뱚학산서원의연혁 뱚학산서원의의례 제향광경,매년享음력3월중정일 진설, 진설은좌4변우4두이다. 생우(牲牛)를진설하 고, 장무공께서 조정으로부터 하사받은 곽암(미역 바위)으로 인해좌측에미역을놓는것이 특징이다. 뱚배향인물 장무공박윤웅존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