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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4월30일 금요일 8 (제172호) 기 획 경소재는 일제 강점 기 뼈아픈 공간에서 출 발한다. 시조왕릉 제25 대 참봉을 지낸 소성 (小城, 휘 光澤) 공의 꿈과 의지가 함께 한 것이다. 소성공의 선고(先 考) 소와처사공(素窩 處士公, 휘 炳孝)이 19 28년유명을달리했다.한학자인소와처사공은많은후학들을 길러냈다. 이에 스승의 타계를 애도해 하며 수많은 만장과 조 문객이 뒤따르면서 일제강점기 배고프고 힘든 세상을 살아가 는 지역민들의 눈에는 호화장례로 보였기에 경찰서에 투서가 들어갔고,고령경찰서에서는 소와공의 묘소를 이장하라는 통 보가온것이다. 이에 소성공은 장례 치른 지 얼마 되지 않은 아버지의 묘소 를 이장하는 것은 큰 불효라 여기고 백방으로 뛰어다니며 해 결책을 모색해야 했다. 급기야 일제 강점기 대구에서 유일한 백작의 작위를 가진 중추원 참의 박중양을 만나게 되었다. 일 면식도 없는 박중양을 만나기 위해 10여일을 그 집 앞에 머물 다가 겨우 면담을 할 수 있게 되었다.그런 효심에 감동하였던 지 박중양의 전화 한통화로 묘소 이장 문제가 해결 되었는데 단서조항이있었다. 뱃사공의 집을 매입하라는 것이다. 그리고 그 집에서는 사 람이 살면 안 된다.소성공은 이렇게 해서 아버지의 묘소를 보 존할 수 있었고, 삭망일에 하루도 빼놓지 않고 금호강과 낙동 강을 건너 봉심을 해오다 1971년 전답 5천 여 평을 매각하여 선조를 위한 재실을 짓게 된 것이다.당시 목재를 나룻배로 옮 기는 등 건축비는 지금의 환율로 계산해도 수 억 원을 호가할 것으로짐작된다. 재실은 정면3칸 측면 1.5칸의 팔작지붕의 목조와가이다. 재 호는 경소재(景素齋)라 편액하고, 산수정(山水亭)이라 하여 외부에 걸었다. 이는 소와처사공의 문인들을 위한 배려인 것 이다.그리고 주변에는 소성공의 유지를 따라 차남 재성(載誠 1929-) 현종이 아카시아와 참나무 400여 그루와 잡목을 제거 하고 벚꽃나무,목련,라일락,개나리 등 수백그루의 꽃나무를 심어 소성원(小城園)이라 명명(命名)하여 많은 사람들에게 편안한 쉼터를 만들어 제공하고 지역 지자체에서는 산책로를 개설하여철철이많은사람들이찾게되었다. 또한관리사를지어후손들이주말이면묘원을찾아숙박을 하며선조의유지를받들고있다. 경소재를 지은 소성공은 밀성박씨 행산공의 21世후예이다. 행산공의 5대손 휘 형달(亨達)의 호는 사미정(四美亭)으로 진사이다.한훤당 김굉필,일두 정여창 등과 더불어 김종직 선 생에게 수학하였다. 한훤당이 시를 지어 보내니 ‘위수(渭水) 북쪽에는봄하늘나무아래에있는데강동(江東)에서는해저 문 구름을 보고 있으리라 어느 날에나 항아리 술을 나누면서 함께 학문을 논할 수 있을까?’라는 글귀였다. 학문(學問)과 행의(行誼)로 천거되어 통례원 인의(通禮 院引儀)에 제수되 었고,또명경(明經)으로봉교(奉敎)와홍문관교리에제수되 었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사미정공은 바로 소성공의 15대 조 부이다. △소와처사공(素窩處士公,휘炳孝) 소와처사공의 휘는 병 효(炳孝, 1848~1928), 소 성공의 선고(先考)이다. 학문이 뛰어났다. 향시에 합 격 하 고 과 거 에 한 번 응 시 한 후 더 이 상 과 거 에 응 시하지 않았다. 러일전쟁 이 일어나자 일제는 1904 년 2 월 2 3 일 한 일 의 정 서 를 강제로 체결하고, 그해 5 월 각의에서 대한방침(對韓方針)·대한시설강령(對韓施設綱 領)등 한국을 일본의 식민지로 편성하기 위한 새로운 대한정 책을 결정하는 등 우리의 주권을 빼앗기 위해 온갖 만행을 저 질렀다. 그리고 결국 을사늑약이 체결되고 주권마저 빼앗겨 일본의 내정간섭과 한일합방 등의 혼란기 속에 소와처사공 (素窩處士公)은 우리 민족의 정신을 살리기 위해서는 선비정 신 뿐이라며 입신양명을 멀리하고 후학을 기르기 위해 서당 을 열고 후학을 길렀다. 소와처사공의 기일이 되면 고향마을 서당이 있던 과수원을 문인들이 찾아 백일장을 열어 한시를 지었고, 때론 경소재를 찾아 주옥같은 많은 시문이 태어나 경 소재회운집(景素齋會韻集)과 소성문기(小城文記)가 남겨졌 다. △소성박광택참봉(小城朴光澤핫奉) 소성 박광택 참봉은 소와처사공 과 어머니 인동 장씨(仁同張氏)와 의 사이에 3형제 중 장남으로 지금 의 대구광역시 달서구 신당동에서 1901년 태어났다. 선생이 태어나 고 4년 후 을사늑약이 체결되어 유 년시절을 일제 강점기에 자랐으 며, 신학문 대신 아버지로부터 한 학을 배우고 전통 유교사상을 이 어받았다. 그리고 한의서를 탐독(耽讀)하 고 연구하여 한의사(儒醫)가 되어 대구의 달성, 고령군 일대에서 신망이높은 명의로 밤이건 새 벽이건아픈 환자가 있으면 주 저하지 않고 왕진을 하고 십 리, 이십리 원근을 따지지 않 고 환자를 보살피고, 약값 또 한 주 면 받 고 생 활 이 어 려 우 면 받지 않았다.그러면서도 약재 상에서는 절대로 깎지 않았고 한다. 이는 사람을 살리는 약 재 값 을 깎 을 수 없 다 는 것 으 로‘신용과양심’은한결같은선생의신조였다. 선생이 태어난 신당동에 밀성박씨 문중이 이거하여 정착한 것은 영조 중반 1700년 후반으로 달성 구지에서 이거하였다. 예부터 이곳은 인재가 많이 배출되는 곳이나 메마른 곳이라 시집가면 고생한다며 부모들이 딸을 시집보내기 꺼려한 동네 이다. 또 ‘이 고장에서 자라난 처녀들은 시집갈 때까지 쌀 서 말을 못 먹고 간다.’는 속담을 보더라도 먹고 살기 어렵다는 것을알수있다. 일제강점기많은주민들이기아에허덕이며 근근이목숨을 연명한 어두운 시절 선생은 인술로서 목숨을 구하고 한편으 로는 가난을 털어내기 위한 방책으로 사재를 털어 저수지(이 곡지)를확장축조해배고품을이겨내게하여그공적을기념 하기 위해 주민들은 1944년 이곡지에 ‘이곡지수리계장 박광 택기념비’를세워선생을기렸다. 기념비에는 다음과 같이 새기고 있다.『구지신척(舊池新拓, 옛 연못을 새로 쌓아 넓히니)/공리홍박(功利弘博, 공리는 넓 고 크도다)/ 불유주자(不有主者, 나서는 사람 없으니)/ 기수 능확(其誰能擴, 그 누가 능히 넓혔으리요)/ 기주이하(其主以 何, 그 주는 누구였던가?)/ 수지수량(誰志誰量, 누구의 의지 와아량이었던가?)/한년식도(旱年食稻,가문 해에도 이 밥을 먹으니),영이불망(永以不忘,길이잊지못하리로다)』 소성공의 기념비는 현재 대구 성서 와룡 윗 공원으로 옮겨 져공원을찾은많은사람들에게본보기가되고있다. 또한 1966년 마을 주민들의추대로전력도입 위원장으로추 대 된 바 주민들을 설득하여 마을 공동기금을 조성하여 전기 도입을완수하는등향리발전에지대한공헌을하였다. 선생의인자하고덕망이높은것을대구향교에서알고석전 대제종헌관으로추대하여헌작하기도하였다. 해방 직후 집에 강도가 들었을 때의 일화는 유명하다. 돈을 다 내어주었는데도 칼을 거두지 않자 “돈 2층에 있다.”라며 2 층으로 유인하고 비상종을 치며 “강도야”하고 외치자 그때서 야 강도가 도망갔는데 이는 가족을 지키려는 용맹과 도피 할 수있는시간을벌어준것으로도둑에게도인(仁)을베풀기도 하였다. 아버지의 묘소가 있는 고령군 다산면 선영까지 삭망일이면 금호강, 낙동강을 나룻배로 두 번이나 갈아타며 50년 넘게 한 번도 거르지 않아 일대 주민들도 선생의 행차를 보고 오늘이 초하루인지보름인지알정도라전해진다. 1972년(신라기원2029년) 선생은 신라시조왕릉 제25대 참 봉으로 도임하여 2년의 임기동안 박식한 학문으로 숭덕전 운 영과 종친회 발전에 기여하였으며, 특히 당시 20만원의 거금 을숭덕전수호비용으로쾌척하기도하였다. 그리고 모 기관지에 50년 전 어린 아들의 목숨을 구한 한 어 머니가기고한내용을보면선생의인술(仁術)을가늠해볼수 있어옮겨본다. [‘인술을 베푸신 박약국’ - 1969년 10월 어느 날 잠든 10개 월짜리 재열이를 2살 된 형 기열이가 잘못하여 깔고 앉고 말 았다. 털썩 주저앉으면서 가슴을 눌러 동생 재열이는 울지도 못하고 숨이 넘어갔다. 재열이를 안고 박 약국에게 달려가면 서도 아이의 코에 숨을 불어 넣으며 길을 더듬으며 가고 있었 다.이당황한꼴을본오빠김면식이달려와아이를받아안고 달려갔다. 박 약국님은 아이를 보고 하는 말씀이 ‘좀 늦었으면 큰일 날 뻔했다.급작스럽게 가슴이 눌려,그 충격으로 숨이 막힌 것인 데...’ 하시면서 연신 손을 놀려 기다란 침을 준비하여 엎어 안 고는 어깻죽지 편과 등뼈사이에 침을 놓는 순간 아이는 응아~ 울음이터졌다.동시에내눈에서도눈물이주룩흘렀다. 1970년기열이가4살되던해에걸음을잘걷던아이가갑자 기 걷지를 못하여 여러 날 경과를 보다 못하여 박 약국 어르신 을 찾아 갔다. 말씀하시기를 ‘소아마비 초기증상인데, 초기에 와서 다행이다.’하시면서 다리 혈을 찾아 침 두 개를 꽂아 얼 마간 시간이 흘렀다. 2,3분은 되는 것 같다. 약을 처방하여 지 어줄 테니 다려 먹이고 또 나무 5가지를 구하여 넣고 물을 끓 여 우려서 그 물에 목욕도 시키고, 자기 전에 수건을 적셔 다 리를 씻어 주면 효과 매우 좋으리라 하셨다.약과 나무를 받아 와서 한 열흘 치료를 했던가? 남모르게 정상적 걸음이 되었 다. 나무 5가지의 이름은 무엇인지 지금은 까마귀이나, 박 약 국어른의처방과치료술에놀랐고,고마움에감사드립니다. 소성공의 삶은 노블레스 오블리주 [Noblesse Oblige]를 실천하였고, 이를 자녀들에게까지 아낌없이 물려주는 등 선 비의길을걸은거유(巨儒)로추앙받는다. △낙생박재성(落生朴在成) 낙생 박재성 현종은 소성공의 차남이 다 . 일 제 강 점 기 대 구 계 성 중 학 6 년 을 졸업하고 1950년 고려대학교 문과대학 재학 중 6·25사변이 발발 1951년 공군사 관학교 정규 2기생으로 입교 1953년부 터 1963년까지 10년간 전투기 F-51, F- 86, T-33 교관 및 훈육관으로 근무하다 1963년 항공기 추락사고로 구사일생으 로살아남았다. 이때 아버지께서 비행기 사고로 하늘 에서 떨어져 살아난 아들을 보고 지어 주신 호가 낙생(落生)이다. “욕심 없이 하늘의 이치에 순응하며 살아가라는 아 버지의 뜻을 받들어 낙생을 천명으로 삼았다.”고한다. 1963년부터 1972년까지 미군 C-121 야전병원, 일본 도쿄 산오병원, 도쿄 경 찰병원, 미공군 중앙의료원, 등에서 10 년간 38회의 대수술을 받았으며 38회의 피부이식과 성형수술은 기네스북에 오 를만한전무후무한기록이다. 영등포로터리지하상가,소성빌딩,영 등포 뉴타운지하상가를 설립 경영하며 자수성가 한 사업가로 모범을 보여주었 고, 신라 시조왕릉 제25대 참봉으로 어려운 숭덕전 살림에 크 게 공헌했던 아버지의 유훈을 받들어 수시로 고령 다산의 가 족묘원을 찾아 잡초를 뽑고 조경수를 심는 등 정화사업에 매 진하면서지금의아름다운정원으로변모하였다.그리고구순 을훌쩍넘긴인생은젊은이들의멘토가될만하다. 뱚재실탐방 경소재(景素齋) 재실이라함은무덤이나사당옆에,제사를지내려 고 지은 집으로만 인식하고 있다. 그러나 이제 그 인식 또한 바뀌어져야 하지 않을 까 생각해본다. 재실은효를실천하는공간이다.1년에 한 번 제 사 를 지내기 위한 시설이 아닌것이다. 경소재는 강 학과효를실천하며한평생남을위해봉사하고선 비 로 서 삶 을 살 다 간 故 박 광 택 시 조 왕 릉 제 25대 참 봉과 그 후예들의정성이 오롯이 배어있는 공간으 로 최근 경북 고령군에서 산책로를 개설하고, 지 역의풍광에 사로잡인 뭇사람들이 찾아오면서 효 (孝)공간으로거듭나고있어찾아가본다. 소성원(小城園)전경:경북 고령군다산면좌학리359번지 묘원을중심으로 벚꽃나무, 목련, 라일락, 개나리등수백그루의꽃나무를심어소성원(小城園)이라명명(命名)하여많은사람들 에게편안한 쉼터를만 들어제공하고지역지자체에서는산책로를개설하여철철이 많은사람들이 찾는명소가되었다. 뱚건축시기및배경 경소재전경 뱚경소재의후예 소와처사공의 향시 답안지, 공은 왜놈 들에게 주권이 빼앗긴 것을 탄식하며 과거를 포기하고 민족정신을 살리기 위해서는 선비정신 뿐이라며 후학양성 에매진했다. 소성박광택선생 소성문기와 소와공의 제자들이 남 긴시집경소재회운집 낙성박재성회장 전투기 조종사 시절 박 재성,교관및훈육관 으로 근무하다1963년 항공기추락사고로구 사일생으로 살아남았 다. 지난 4월 10일, 11일 양일 간 밀성박씨 판서공파 대종 회는 지난해 오랜 장맛비에 훼손된 밀성박씨 판서공(휘 밀양)의 손자 시중공(휘 득 중 ) 묘 소 와 아 들 조 선 2 대 정 종대왕 부마 밀령위(휘 갱) 의 배위 함양옹주 묘소와 부 마공의 장손자 현령공(휘 집), 증손 예조판서공(휘 구 령) 묘소 사초를 박규승 회 장을 중심으로 임원 및 종원 들이 함께하고 여주 입향조 충민공과 손자 부마공 묘소 성역화 사업도 준비하고 있 다. 고려 삼중대광 문하시중(휘 득중)의 부친은 경기도 여주 입향조 충민공(휘 경의)으로, 고려 공민왕대의 무신 이었 으며 고려후기 충정왕이 황음무도하여 정치가 혼탁해지고 나라가 점점 어지러 워지자 당시 중랑장이던 박경무는 충혜 왕의 동모제인 공민왕을 추대하여 즉위 시키고 그 공으로 병부참정 익대공신에 봉해졌다. 평소 지절이 뛰어나 조정에서는 ‘궁 중의 범’이라고 칭했다고 전하며 공민 왕의 총애를 받아 ‘경의’라는 이름과 함 께 시를 특별히 하사받기도 하였다. 퇴 임 후에는 여주에 돌아와 남은여생을 보냈으며, 사후 삼중대광 문하시중에 추증되었고시호는‘충민’이다. 장남 대호군(휘 분)은 야은 길재의 스 승으로 학문이 깊고 성 리학에 밝아 당 세에 울렸으며 벼슬은 대사성을 지냈 다. 차차 부마공(휘 갱)은 문하사인 지 돈령부사 밀령위로 배위는 조선 2대 정 종대왕제1녀함양옹주이시다. 조선 개국공신이신 시중공(휘 득중) 의 공적을 기려 여주 금사면 소유리를 사패지로 하사받아 600여년 지켜오고 있다. /박지희 명예기자(경기가평군지부) 밀성박씨문하시중휘득중묘소와함양옹주묘 원사초 여주입향조충민공과손자부마공묘소성역화사업조만간추진 사초에참여한 종원들이 조선정종의따님인향양옹주묘역앞에서기념촬영을하고있다. 밀양박씨 도사 공파 2021년도 정 기총회가 당초 3월 16일 예정되었으 나 ‘코로나19’로 인해 사전에 회의 자료를 발송하고 1 6일까지 회신되어 온 자료를 토대로 서면결의로 대체 했다. △1호 의안 2020년도 세입세출 결산안 (총 74,205,635원)은 대의원 16명이 전원 찬성. △2호 의안 임원개선안은 10대 회 장에 현 회장 성율을 대의원 16명중 15명 찬성으로, 감사 2명은 현 감사 노열과 문 구를 16명 전원 찬성으로 선출하고 부회 장과 총무는 회칙에 따라 선출된 회장이 추천토록했다. 회칙 第13條(선임) ①項 (회장은 임원 회의에서 추천해 총회의 인준을 받아 선 임하고 부회장과 총무는 선출된 회장의 추천으로 총회의 인준을 받으며 감사는 총회에서 선출한다.)에 따라 지난 2월 21 일 임원회의에서 무기명 비밀투표에 의 해 차기회장은 현 회장 박성률을 추천하 였기에 이번 서면으로 인준을 받게 되었 다. 특히 이번 서면결의는 본인이 직접 작성했음을 증빙하는 서류를 1통(자필 로서명하고신분증사본,또는 주민등록 등본을 첨부)을 첨부토록 하여 공정성을 기했다. 그리고 도사공 종친회원의 자격(회칙 제5조 2항)은 회비를 납부한 자로 되어 있어, 노열, 문구 감사는 감사보고를 통 해 본회의 정회원은 의무적으로 소정의 회비를 납부해야 하지만 상당 수 회원들 이 회비를 미납하여 회칙을 위반한 것으 로 드러났다.심지어는 문중장 조차도 회 비를 내지 않은 분이 있고 문중 전체가 한 푼도 납부하지 않은 문중이 있는데 이 는 도사공의 후손임을 부정하는 것이고 우리 도사공파 종친회의 근간을 훼손하 는 심각한 문제로서 반드시 개선돼야 할 것으로사료된다고지적했다. 한편 성률 회장은 서면으로 발송한 인 사말에서 종친회는 여러 종류의 직업에 종사했던 사람들이 은퇴 후 입문하는 집 합체로서 다양한 성격의 소유자들이 총 망라해 있는 만큼 내 생각만이 제일이라 는 아집과,자신의 뜻을기필코관철시키 고야 말겠다는 고집은 종친 간의 화합을 저해하고 불화를 조성하는 독소임으로 배척되어야 마땅할 것입니다. 우리 도사 공파는 임원회의와 대의원총회라는 2원 의결기구를 통해 민주적으로 운영되고 있다고전하고관심과성원을당부했다. 도사공(朴禎元)은 해백공(海伯公, 휘 召榮)의 孫子로 1541년에 아버지 사과공 (司果公, 朴芸)의 넷째아들로 태어나 조 선조 선조와 광해군 대에 음직(蔭職)으 로 충훈부(忠勳府)의 도사(都事)를 지 냈고, 배위(配位) 공인(恭人) 월성김씨 (月城金氏와)의 슬하에 외아들 중추부 첨지사(中樞府僉知事)를 지내고 증(贈) 호조참판공 박지현(戶曹參判公 朴之賢) 을 두었다. 공은 86세의 수(壽)를 누린 뒤 1656년 졸(卒)한 뒤 호조참판에 증직 되었으며 슬하에 6남 5녀를 두면서 크게 번성하여 현재 전국에 1만여 후손들이 세거하고있다. /박현배명예기자(서울특별시) 밀양박씨도사공파정기총회서면결의 10대회장현성률회장선임,회비납부는종원으로서의임무감사지적 박성률 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