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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4월30일 금요일 6 (제172호) 기 획 한빛신문은 성손여러분이 함께 만 들어가는 소중한 자산입니다. 한빛신문은창간13주년동안선조님의행장과종중의약사집성촌,본관별세거지 변천사 등수많은자료를기록으로남기는방대한작업을하고있는‘성손모두가함께만들 어가는 종보’로서그역할을충실히하면서선조님의현창사업과후손들에게물려줄박문( 朴門)의 뿌리를연구하고다듬어데이터베이스화하는데앞장서겠습니다. 한빛신문임직 원일동 뱚뱚뱚뱚뱚뱚뱚※제보및구독신청안내:053-588-7300,070-4250-0078 fax053-581-0067 e-mail:parkss1012@hanmail.net ※ 성 손여 러분이 납 부 하여 주신 구독료 는 신 문 발행에 큰 도 움이 됩 니다 뱚뱚뱚뱚 뱛월3,300원으로종보를함께만들어가는주인이되어주세요. 뱚뱚뱚뱚구독료를가까운금융기관에서자동이체(월3,300원)하여주세요 구독료자동이체계좌453013-55-000691농협한빛신문 [3월구독료보내주신분] □자동이체등록해주신분 △박병인(인천시 연수구) △박연희, 박해용(강원 동해시) △박인근(충북 청주시) △박봉순 (충남서천시)△박창균(경북 영천시)△박상철(경북 예천군)△박진하(대구수성구)△박만순 (부산 연제구) △박문호, 박성국, 박재헌(경남 창원시) △박래수(경남 진주시) △박문갑(경남 통영시) △박갑영(경남 산청군) △박명호(경남 의령군) △박태식(경남 사천군) 박철환(전남 장 흥군)△박종인(전남광양시) □지로납부및송금하여주신분 ◎ 서 울△박현수, 박승주(은평구) △박노선(중량구) △박인규(종로구) △박종구(강동구) △박종일(도봉구) △박대순(강남구) △박석남(동대문구) △박중화(동작구)◎ 경 기△박문옥 (남양주시) △박광규(광명시) △박인제(수원시) △박용은(양평군) △박종석(화성시) △박영하, 박성대(파주시) △박인대(하남시) △박재준(의정부시) △박은순, 박형원(성남시) △박광수(여 주시) △박노근(평택시) △박석남(구리시) ◎강원 △박용준. 박현균. 박병찬(강릉시) △박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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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유 하여 1877년 3월에 상동 흑 석에서 오졸재 선생의 태생 지인 차산리 부근을 풍수학 적 요충지로 삼고 이거하여 정착했다. 정착이후 석강공의 아들 삼형제는 8명의 아들을 낳 았고, 이들은 또 22명의 아 들을낳아크게번성하게되었다. 석강공은석통마을에정착한후선대를추모하고자은행나 무 3그루를 심고 아들 3명에게 仁·義·禮를 강조하며 학행과 덕망을 쌓도록 했다. 그리고 둘째 아들 산은공(山隱公, 휘 수 의)으로 하여금 옥산 언덕에 서당을 지어 화곡(華谷) 성대기 선생을 불러 지도하면서 골목길에는 글 읽는 소리가 끊이지 않는 등 후학양성에 매진하여 현재 청도지역 유림지도자 대 부분옥산서당출신으로그유명세가대단하다. 특히차산서원의부지를제공하여후사를 잇지못한방계조 오졸재 선생을 비롯한 망헌, 탁영 등 당대의 기묘명현을 배향 하기도했다. 선생은 학행이 뛰어나 사후(광서11, 1885)에 숭록대부 행 예조판서 겸 대사성에 추증된 반송(伴松) 박치복(朴致馥) 선 생의 아들로 1853년 흑석리에서 태어났다. 자(字)는 효진(孝 進) 호(號)는 석강(石岡)으로 유학이 깊어 사림의 추앙을 받 았으며, 통정대부 충훈부도사에 올랐고, 타고난 효자로 명성 이 높았다. 만년에 일본이 호시탐탐 노리며 내정간섭을 해오 다을사늑약에의해주권을빼앗긴이후의(義)로서왜놈들에 항거(抗拒)하였고, 지역에서 기미만세운동을 주도하고 직접 대구향교로 가 많은 지사들과 함께 만세를 부르고 외쳐 왜놈 들에게 묘적(墓籍) 압수(押收)의 위협(威脅)을 받기도 하는 등 강직한 성품으로 일관하다 1936년 향수 83세의 일기로 영 면하였다. 석강 선생은 석통 마을을 창동(創洞)한 이후 지역의 유풍을 진작하고 학풍을 일으키는데 주력하였으며,왜놈들의 탄압에 도굴하지않는성품으로지역에서추앙을받아왔다. 석강선생은 행산공 (휘 세균)의 18대손이 다. 행산공은 병부참정 (兵部參政)으로 시호 가 양 효 (良 孝 )인 간 (幹)의 둘째아들이다. 고려조의 보문각 태학 사이며 전문형(典文 衡)과 중국 元나라에 서 한림학사(翰林學 士)를지내셨다. 원나라에서귀국할때원나라문관구양현이이별을슬퍼하 며 지은 시(詩) 븮송고려 박학사븯는 지금도 전해지고 있다. 귀 국하여벼슬이평장사(平章事)에이르고,밀성부원군(密城府 院君)에 봉해지고 시호(諡號)를 충정(忠靖)이라 별세 후에 받았다. 또한 수연(壽宴)을 맞으니 임금께서 기로치사(耆老 致仕)와 함께 선(膳:궁중요리)과 악서(樂書)와 광효(廣孝)라 는 두 글자를 내리시어 고향에서도 임금의 극진한 대우 속에 만년(晩年)을보내셨다. 슬 하 에 장 자 이 신 휘 문 빈 (文 彬 ) 과 차 자 휘 문 익 (文 翊 )을 두 었다.휘(諱)는 문빈(文彬)의 호(號)도은(挑隱)이시며 중서 전(中書典)문형(文衡)이 벼슬이다.고려가 운이 다하자 고향 으로돌아와망복지절을고수했다.이조에서대사성으로불러 도 나아가지 않았다. 98세로 졸하니 좌찬성 의금부 세자좌빈 객을 증하여 문절(文節)이라 사시(별세 후 시호(詩號)를 받 음)했다. 公은 포은(정몽주), 목은(이색)등의 문인들과 교류 하였으며 목은 先生의 시중(詩中)에도 있듯이 부자(父子) 세 분이 학문이 깊었기에 가전삼학사(家傳三學士)라 칭하였던 구절이있다. 도은공의 장자 휘 신열(臣悅)은 생원시에 장원하여 학행으 로 이조판서에 증직되었고, 그의 아들 시거(時擧)는 사마시 에 합격하여 진사가 되었고, 학문과 올바른 행의로 이름이 세 상에 알려지고 절개와 의리가 있어 밀주지에 전해지고 아들 종지(宗枝)를 두었는데 유일로 천거되어 홍문관 정자와 사헌 부감찰을역임했다. 감찰공 휘 종지는 명달, 형 달 형제를 두었는데 휘형달의 字는 통중(通仲)이고,호는 사 미(四美)인데 진사다. 한훤당 김굉필, 일두 정여창 등과 더 불어 점필재 김종직의 문인으 로 학문과 덕행으로 통례원 인 의에 제수되고,또 명경(明經) 으로 봉교(奉敎)와 홍문관 교 리에 제수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슬하에 숙지, 숙근, 언 계삼형제를두었다. 셋째인 언계(彦桂)의 자는 형백(馨伯)으로진사시에오르고학문과덕행으로곤양제독에 천거되어 제수되었다. 오졸재 선생의 제자이고 정암 조광조와 는 서로 절친했다. 아들 대성(大成)의 호는 안국암(安國巖)으 로회재이언적을따라놀았으니선생이공에게보낸시에의하 면 ‘산골짜기 맑은 경치가 한량없는데 또 구월하늘은 단풍철을 맞았도다누가길가는사람을벼랑끊어진위로불러한항아리 술과더불어경치를감상토록머물게하리’라는글귀였다.남명 조식,삼족당김대유등당대의거유들과는절친했다. 안국암공의 아들 항(恒)의 호는 성재(惺齋),아버지를 섬김 에 정성을 다하였고,일찍이 과거공부를 폐하고,여러 어진 이 와 더불어 사귀었다. 항상 맑은 심성을 다듬었고 마음을 깨우 치는 글을 방안 벽에 걸어 두고 심성을 수양하는 공부에 힘썼 다.학문과행위로천거되어호조참의에제수되었다. 성재공의 아들 양춘(陽春)의 호는 모헌(慕軒)으로 학문을 좋아하여정성을다하고부모를섬김에지극하였다.임진왜란 때 빈소(殯所,草殯)에 엎드려 소리 내어 슬피 우니 왜장도 감 동하여물러갔다.이조참의에증직되고정려문이세워졌다. 모헌공의 장자 여( 聆)의 호 는 현 석 (玄 石 ) , 종 숙 국 담 선 생 문하에서 사사(師事)했다.효성과 우애가 두터웠으니세상 사 람들의 추앙과 존경을 받았다. 학행으로 한성부 참군에 천거 되고 제수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으니 세상에서 현석처사(玄 石處士)라 일컬었다. 종숙 국담과 아우 오( 性)와 더불어 선조 밀성대군의유지인영남루에제사를거행했다. 아들 진인(振仁)의 호는 창암(蒼巖)으로 부모에 대한 효심 이 지극하였으며,모친상을 당 해 서 는 묘 소 옆 에 움 막 을 짓 고 삼년을 시묘했다. 이 효성에 감동하여 무덤 옆에 바위틈에 서 죽순이 솟아나서 성장하므 로 이 로 인 해 산 과 마 을 이 름 을 죽암(竹巖)이라 했다. 올바른 행위로 선원전(역대 임금과 왕 비의 초상화를 모시던 건물) 참봉에 천거되어 제수되고 수 직으로부호군이되었다. 아들 중원(重遠)은 세갑(世 甲, 호 忍齋)을 낳았고, 세갑은 경회(慶會)를 경회는 사성(思 性)을 사성은 이형(履亨)을 이형은 치복(致馥)을 낳으니 입향 조 석강공의 아버지, 조부, 증조부, 고조부등 상조(上祖)가 된 다. 석강공 휘 의영은 아들 수인(秀仁), 수의(秀義), 수예(秀 禮) 등 삼형제를 두었는데 장남 수인은 효우가 돈독하고, 차 남 수의의 호는 산은(山隱)으로 8세에 이미 아버지 석강공으 로 부터 많은 글을 배워 문사가 날로 진취되었다.백씨를 일찍 여의고곡(哭)을하게되니집에는아버지가계셨으나대소가 (大小家)의 모든 업무를 직접 담당하였고, 낮으로는 아버지 의 뜻에 조금도 위배됨이 없었고, 밤으로는 몸소 아버지를 위 해멀리떠나지않았다. 옥산재를지어스승을영입하여아들과조카들을가르쳤고, 차산서원에 납토(納土)하였으며, 가규(家規)를 만들어 후손 에게 남기니 의재 예대주, 화곡 성대기가 시를 지어 찬양하고 사우들의이목을끄니칭찬하지않은이없었다. 특히 왜놈들의 창시개명과 삭발령의 고충(苦衷)에도 굴복 하지 아니하고 호통을 치며 꾸짖으니 왜놈들이 자취를 감추 고감히범접(犯接)하지못했다. 석강공의 후손들은 석강공의 5대조 인재공(휘 세갑)을 비 조(鼻祖)로 하여 종중을 형성 재환 회장과 지금 총무의 헌신 적인 노력으로 석통마을을 더욱 윤택하게 하고 있으며,5대손 정현은 부산에서 보령한의원을 개원하여 의술을 펼치는 등 후손들은 각처에서 입향조의 유지를 받들고 있는데, 일석은 경북대 교수, 규홍은 충남대 교수, 삼도는 대령으로 예편, 해 영은 공군대령, 무흠은 신덕왕릉 참봉, 진흠은 농협 상무, 우 흠은 한발공업사 대표, 규탁은 한일레미콘 대표, 풍흠은 호반 대표 등 학계와 군부(軍部), 재계 등에 진출하고 지역사회에 서도일익을담당하고있다. 그리고석통마을의형성과함께학풍이일어나고명성이드 높아 옮겨온 후인들 또한 마을의 명성을 이어가고 있는데 성 영환 부인산업대표, 성세환 부산은행장, 장덕식 육군중령, 정 태식 경찰청 경정, 정연덕 알미늄대표, 정광식 현대중공업 이 사, 정종식 고등법원판사, 표명성 표창실업대표 등이 대표적 이다. 특히 석통마을 후손들의 효(孝)사상은 남다르고 우애가 돈 독 함 을 볼 수 있 어 눈 여 겨 볼 만 하 고 , 옥산서당으로 하여금 지 역의 학풍을 일으키는 등 지역에 기여하는 바가 커 음덕이 고 루충만하길기대해본다. <자료제공박지금·박무흠> /글·사진박상섭 편집국장(parkss1012@hanmail.net) 뱚집성촌탐방 경북청도군풍각면흑석리석통마을 밀성박씨행산공파인재공문중 뱚▲마을의형성(創洞) 연자방아-마을을 형성하고 연자방아 를 설치하 며 당시 동원된 인명부 와 금 전출납 등을 기록한 석침소(石砧所) 가종가집에전해진다. 뱚▲입향조석강박의영(朴儀永)선생 석강박의영선생존영 석강공박의영교지 뱚▲입향조의선계와후손들 옥산재-청도군풍각면석통차산길24-9 옥산서당으로 청도지역한학자와유림들의학 문의 원류(源流)라 할 수 있다. 안국암공(휘 대성)이 회재·정암 등과 나눈간찰 석강공의 아버지 휘 치복의 교지, 광서11년(1885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