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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3월31일 수요일 7 (제171호) 종 합 비운의독립운동가박헌영선생은조국광복이후월북하면 서 우리나라 역사에서 크게 조명되지 못하고 공산당으로만 각인되어 우리에게 잊어져 가고 있다. 그러나 박헌영의 생애 를 재조명해야 한다는 주장이 각계각층에서 제기된 가운데, 남에서는 월북한 남로당의 수괴라는 평가를 받고, 북에서는 미제의 간첩이라는 의혹을 받아 처형당한 비운의 독립운동가 박헌영. 조국광복을위해일생을바쳤지만사상적 차이로비운의삶 을 살다간 박헌영 선생의 생애를 조명하는 만화 전집이 발간 되었다. 박헌영의 독립운동 자료를 발간하기 위해 역사학도들이 국 립중앙도서관, 국회도서관, 미국문서기록보존소, 러시아문서 기록보존소에서 11년간 자료를 찾아 모은 노력의 결실로 200 4년 권당 600~700쪽에 달하는 전집 9권을 출간했으며, 이를 통해 일제 강점기에 피 끓는 젊음을 불살랐던 박헌영의 삶에 일반 대중이 접근할 수 있는 길을 찾아보았다. 그리고 남녀노 소가 쉽게 근현대사를 이해할 수 있게 하려고 만든 만화 븮꽃다 발도 무덤도 없는 비운의 독립운동가-만화 박헌영븯을 10여 년 에 걸친 수정과 보완 과정을 통해 전6권에 담아 2014년 개정 판으로 출간했다. 그 후 다시 4년의 고된 작업 끝에 해방 후 3 년간 박헌영의 활동과 그 역사적 배경을 다룬 븮혁명과 박헌영 과 나-무너진 하늘븯 이라는 3권의 후속편을 펴냄으로써 길고 길었던대장정을끝마치게되었다. 이정기념사업회가 펴낸 븮무너진 하늘븯, 이 책은 조국 광복 이후부터월북하기까지의시간을다루고있다. 책에서 박헌영 선생은 친일 부역자 청산을 과제로 남로당 활동을 이어가지만 미국과 소련, 좌익과 우익의 거듭된 대립 으로고군분투하는모습이그려진다.박헌영선생의아들이기 도 한 조 계 종 원 로 의 원 원 경 대 종 사 는 근 현 대 사 속 부 친 의 활 동을 누구나 이해할 수 있도록 돕기 위해 만화 전집을 기획했 다고전한다. 독립운동가이자 사회주의운동가이기 전에 한 스님의 아버 지였던박헌영선생. 남북의사상적차이로역사에서잊혀가는 그의삶은원로스 님이된아들의손에서다시태어났다. 스님은 책을 발간하면서 (박한영 선생에 대한)평전도 나오 긴 했지만 학자들이나 필요한 책이 돼서 일반인들한테는 거 리가 멀어졌어요. 일그러진 우리 슬픈 역사를 (이해하기 쉽 게)알려야할것같아서선택한것이만화라고소개하고남북 을 하나로 만들려고 했던 인물이 바로 이정 박헌영 선생입니 다. 객관적인 자료로 자료의 바탕에 의해서 (역사를) 알리고 싶은것이지다른건(바라는게)없다고전한다. 이정 박헌영 선생은 처형되기 전 1955년 12월 15일 재판에 서 다음과 같이 최후진술을 통해 그의 사상과 이념을 표시했 다. [나는이자리에오기훨씬전부터살아서나갈수없는신세 임을느끼고있었다.이재판은말그대로요식일뿐,어떠한최 후 진술도 너희들의각본을 뒤집을 수 없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그렇다면 결론부터 말하겠다. 너희들의 주장대로 나는 미제의간첩이었다.그러나너희들이주장하는미제간첩과내 가 주장하는 미제 간첩은 엄격히 다르다. 나는 남조선에 있을 때,아니그훨씬전부터미국사람들과교분이있었다.그교분 은조국의해방과독립된통일조국건설을위한차원이지결코 간첩행위가아니다.남조선에서나는미군정고위장성들을만 나내가통일조국의최고책임자가되면미국과도국가정책을 협의할 수 있다고 분명히 밝혔다. 내가 약속한 그 협의는 현재 소련과미국의두지도자가서로얼굴을맞대고국제문제를협 의하고있는것과같은맥락이다.] 전국각지의잘나고똑똑한젊은이들이경성으로모여들고, 3·1운동을주도하고,일부는국내에서,일부는해외로나가조 국 독립과 일본 제국주의의 축출을 위한 독립운동에 매진하 였다. 그들 한가운데 박헌영이 있었다. 그런 그들이 일제강점 기의 역사를 어깨에 짊어지고 그 어두운 시대의 등불을 밝혔 다. 식민지 청년들은 식민지 해방을 지원하는 소비에트 연방 과 식민지를 소유한 제국주의 국가 가운데 어느 쪽 이념을 선 택할것인가하는문제로치열한논쟁을벌였다. 어느쪽이옳았다고말할수는없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모든 독립운동가들의 삶은 기록되어야 하고,그들의 삶은 역사적 사실로 남아야 한다.역사는 사실의 기록이기때문이다. 갑자기 나라를 잃은 백성들은 제국주의 일본에게 강점당한 이 땅에서 토지를 잃고, 양식을 수탈당하면서 매우 처참한 지 경에빠져들었다. 이 시대를 살아간 청년들은 어떻게 자라났을까? 그들은 나 라를 되찾는 일, 처참한 수탈의 대상이 되어버린 민족의 뼈아 픈 고통을 보면서 자랐다. 고등학생도 선생이라 불리던 시대 였다. 지식인이었던 항일 운동가들은 1919년 3·1운동을 주도한 실질적인 운동세력이었다. 그들은 농사지은 곡식을 탈취당하 고 초근목피로 살아가는 나라 잃은 민족의 아픔을 통감하면 서 역사의 수레바퀴를 온 몸을 던져 진보한 미래를 꿈꾸었다. 그리고 그들은 그 미래를 앞당기기 위해 스스로 선택한 방향 으로 달려갔다. 그 길은 서로 달랐을지라도 목표는 단 하나, 착취당하는민족으로서잃어버린국가를되찾는일이었다. 당시청년들은나라잃은민족으로서자신의영달보다는민 족의 아픔을 먼저 생각했다. 그들은 자유민주주의공화국, 사 회주의공화국, 평화적 시위, 무장투쟁 등 각각 꿈꾸거나 실천 적 방향은 달랐지만 결국 상해에 있는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서다시만난다.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무장투쟁을 위한 광복군에서부터 국 제외교무대에이르기까지그활동범위를넓혀갔다.일제의손 이 닿지 않는 상해의 프랑스조계에 자리 잡고 활동한 대한민 국 임시정부는 중국대륙과 한반도를 무대로 다양한 독립운동 을전개해나갔다. 박헌영과같이러시아의볼셰비키혁명에영향을받은사람 들의 활동은 우리의 역사 속에서 지워졌지만, 그들을 역사로 되살리는 일 또한 후대의 몫이다. 다양한 방식으로 독립운동 을했던선각자들의삶은대개일제의감옥에서보내게된다. 해방은 우리 힘으로 싸워 쟁취한 것이 아니라 ‘어느 날 갑자 기’ 찾아왔다. 시종일관 ‘친일 부역자 청산’을 해방 조국의 최 우선 과제로 앞세웠던 박헌영과 조선노동당 사회주의자들은 변화된 정세 속에서 부화뇌동하는 기회주의자들, 강자에게 붙어 재기를 노리는 친일파들의 견제 속에서 시시각각 고립 될 수밖에 없었고, 자국의 이익을 앞세우는 미국과 소련의 개 입은더더욱박헌영의입지를좁게만들었다. 결국 해방의 기쁨과 설렘은 짧았고, 박헌영은 남과 북 모두 에서 철저하게 버림받은 비극적 최후를 맞이할 수밖에 없었 다. 하지만 해방 조국의 미래에 대한 박헌영의 비전과 원칙들 은 이념을 떠나 오늘날에도 되새겨볼 만한 가치들을 담고 있 다. 박헌영의생애조명하는만화전집븮무너진하 늘븯발간 남북을하나로만들려고했던이정박헌영선생의독립운동활동과배경다뤄 나 라 를 잃 은 청 년 들 이 선 택 한 삶 의 길 가는길은달라도결국다시만나는곳! 해방된조국,그러나무너진하늘 세덕사는 밀양박씨 판도판각공 后 충정공(忠 靖公) 휘 국검(鞠儉)을 모신 사당으로 1650년경 창건되었다. 이후 인조호성공신 월당공(月塘公) 휘 천성(天成)을 추배했다. 본전은 정명 2칸 맛 배지붕이며 주위는 기와담장을 쌓았다. 1987년 세풍에 훼손된 담장과 지붕을 보수하였으며,201 1년에 대대적인 중수를 거쳐 지금의 규모를 갖췄 다.(享매한식날) 세덕사를 보면 후손들의 면면을 볼 수 있을 것 같다.탄방리는집성촌으로후손들이수시로들러주변환경정 비에 힘쓰고 있어 깨끗이 잘 보존돼 있어 지역에서도 명승지 로떠오른다.주변에후손박기서가옥이있다. △ 박국검(朴鞠儉) - 밀성대군 후 12중조의 한분이신 판도 판각공(휘 천익)의 6世이다. 고려 문하시중을 계승한 수상직 (首相職, 종1품)인 첨의중찬(僉議中贊) 숭록대부(崇祿大夫) 에 오르고 안천군(安川君)에 봉해지고 시호(諡號)는 충정(忠 靖)이다. 註- 숭록대부(崇祿大夫) : 1298년(충렬왕24) 충선왕이 즉위하여관제 를개정할때종1품계로 처음설정되었다. 그러나당시에는정1품 관계가 없었으므로 이것이 최고의 등급이었다. 그 뒤 계호(階號)는 폐지되었다 가다시등장하지만 이 때는정2품 하계로 제6위에자리하였다. △ 박천성(朴天成) - 충정공의 9世이다. 자(字)는 성일(聖 逸),호는 월당(月塘)으로 여절교위 행 충무좌부장을 지낸 휘 균(均)의 아들이다.타고난 성품이 특이하여 경서에 통달하였 으며, 문과에 급제하였으며, 지략이 뛰어나고 용맹스러워 문 무를 겸전하였다.인조 이괄의 난에인조가공산성(쌍수산성) 으로 몽진할 때 호성한 호송공신으로 통훈대부 태천태수 겸 돈영부도정에올랐다. 대흥면 한탄, 탄방리는 판도판각공 후 충정공 후손들이 집 성촌으로한때60여호가넘는큰마을이다.충정공휘국검(鞠 儉)의 현손 휘 무생(茂生)이 처음 정착한 곳이다. 입향조(현 감,휘 무생)은 통훈대부 보령현감을 지내면서 인근 예산으로 정착지를 정한 것으로 보인다. 현감공의 고조부 충정공은 첨 의중찬이고, 증조부 휘 지(芝)는 자헌대부 이부상서, 조부 휘 붕(鵬)은예문관대제학,아버지휘효성(孝誠)은자헌대부전 주부윤을 지내 선조는 개성과 한양에 거주하다 보령 현감으 로내려온것이입향계기가된듯하다. 입향조 휘 무생(茂生)은 아들 셋을 두었는데 장자 구(球)는 후사가 전해지지 않고, 차자 호(瑚)는 보공장군 행 훈련원참 군 청도군수를 역임했다. 공은 천품이 온후하고 강직하여 문 무를 겸전한 무반(武班)으로 청도군수 재임중 목민(牧民)에 전념하여청백한관리로칭송이자자했다. 셋째(휘유)는손자대에이르러무후이다. 군수공(휘 호)의 아들 양기(良器)는 중종조에 보공장군이 고,손자 팽령(彭齡)은 정릉(靖陵,조선 제11대 중종의 릉)참 봉, 증손 균(均)은 여절교위 행 충무좌부장으로 범성(範成), 충성(忠成),천성(天成),현성(玄成)등4형제를두었는데,장 자 범성은 선조때 어해장군으로 어유간진무병마첨절제사(漁 游澗鎭撫兵馬僉節制使)인조16년 창성부사,둘째충성(忠成) 은첨사(僉使),셋째천성(天成)은호성공신으로통훈대부태 천태수겸 돈영부도정, 넷째 현성(玄成)은 선전관으로 가선대 부 호우수군절도사를 지내는 등 집안이 누대에 걸쳐 관록(官 祿)이 이어지면서 크게 번성했다.세덕사 입구에는 예산군 문 화재자료286호로지정된박기성가옥이자리한다. 박기성 가옥은 여절교위 행 충무좌부장을 지난 균(均)의 장 자로 1638(인조16) 창성부사 박범성에 의해 건립되었다고 한 다.이후11世휘 기성(호 牛堂)公께서 새롭게 고쳤다.건물의 앞면은 함석지붕으로 원래의 모습을 잃었으나 앞면에 남아있 는 건물은 건립당시의 형태를 많이 간직하고 있다. 이 건물은 우진각지붕에 겹처마를 한 건물로 후대에 시멘트로 기단을 보강하였으나, 초석은 자연초석에 방형의 기둥을 세웠다. 건 물은 정면 4칸 측면 2칸의 건물로서 전면 1칸에는 툇마루가 설치되어 있으며, 각 칸에는 2짝 여닫이 문이 달려있다. 현재 수차에 걸친 보수와 개량으로 인하여 가옥의 본래 모습은 많 이 변형, 파괴되었으나 가옥의 뒤편에 있는 낮은 야산과 전방 에 자연석을 이용하여 조성된 작은 연못이 전통가옥과 잘 어 울리고 있어 전통가옥의 유연한 풍류를 느낄수있다. 우당공(휘 기성)은 현 판도판각공파 대종회장을 맡아 종사에 헌신하고 있는 혁진(赫鎭) 회장의 선친(先親)이다. 혁 진 회장은 농업기반공사관리부장을 역 임하였고, 퇴직 후 사문중을 비롯 판도 판각공파 대종회장, 원덕사 감사, 밀성 재부회장을맡고있다. 재실탐방 충남예산세덕사(世德祀) <충남예산군 대흥면 탄방리 상탄329번지> 세덕사전경 세덕사 내부, 깨끗하게 정돈된 사당내부를 보면 후손들의 치성(致誠)을 짐작해볼만하다. 박혁진회장 뱚배향인물 뱚집성촌탐방 뱚▶박기성가옥(朴基星家屋) 박기성가옥 (예산군하탄방리1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