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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3월31일 수요일 12 (제171호) 기획 천문지리에밝은백우당박상의선생이1578년어느날율곡이이,중봉조헌,토정이지함구봉송익필등과하 늘의장성(長星)을보고앞으로국운(國運) 을 논의하면서 15년 뒤에 「靑衣賊入自國城東門,왜적이 장차 서울 동문으로 쳐들어 오리라」하고 예언을 하였 다.이에 의병장 월파 유팽로 선생은 자신 이직접쓴일기중에4월8일‘임금을사랑하고,나라를걱정하고,백성을편안이하고,병력을길러야한다.’는 등의일들을상소에언급하고관사에 나 아 갔는데월사이정구선생이말하기를“장성의주부박상의가일찍이나에게말하기를푸른제복을입은왜적이 반드시동문으로부터쳐들어온다.고‘기 록하고있다.어려운시대일수록예측과예언이란단어는항상미묘한여운이남는말이다.최근선생의고향 전남장성에서는선생을재조명하고자하 는글한편이문향(2020년제31호)에실려3.1절을맞은3월이기에원문을옮겨소개해보고자한다.참고로백 우당박상의선생에대해서는본보2011년 4월호12면에소개된바있다. 우리고을 장성은 옛날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도학군자를 비롯하여 문화·예술·천문지리까지를 통달한 많은 인물을 배출한 고장이다. 최근 장성 문화원이 금년 문화원보 간행을 앞두고 백우당 박상의선생의 생애를 재조명하도록 글 한편을 써 주라는 원고요청을 받았다. 원고요청을 받은 필 자는 우리나라 정조대왕의 스승인 이재 황윤석선 생이 쓴 주부 박공전을 근거 삼아 감히 원고를 적 어보기로하였다. 선생의 이름은 상의요 자(字)는 의보(宜甫)이 며 백우당은 그 호이니 세인들은 박주부라 부르 기도 하며 본관은 밀성(密城)이다. 거인(居仁)이 라는 분이 인의현에서 귀양살이를 한 것이 인연 이 되어 영원히 거주하게 되었으니 지금 전북 정 읍 태인 땅이다. 그곳에서 태어난 승봉님은 고려 의 마지막 절의를 지켰으며, 그 손자 돈재 박연생 은 대호군으로 단종대왕을 섬기다가 단종이 승하 하자 본관 밀성을 태인으로 고치고 담양 월산면 사위 이석손의 집에서 은둔생활을 하다가 죽었으 니 곧 수산사 첫 자리에 모셔진 유림들의 스승이 되었다. 주부 백우당(主簿, 栢友堂)은 돈재선생의 6세 손 어모장군인 사순(士珣)님과 어머니 숙부인 연 일오씨 장남으로 중종임금33년 무술(戊戌) 1538 년에 아곡리 보룡산 아래 하남마을에서 태어나 서기 1621년에 별세하셨다. 己未 1979년에 호남지역 유생들이 뜻을 모아 돈재 박연생 선생이 배향되어 있는 수산사를 복 원하여 향사를 모시면서 매우 늦었지만 종조인 아곡 박수량,아우인 눌헌 박상지 두 분과 함께 추 배되어오늘에이르고있다. 선생께서 어릴 때 거리에서 노닐제 과객이 그 의 용모와 행동이 기이하다며 뒷날 온 세상에 이 름을 떨칠 사람이 반드시 이 아이라고 하였다. 그 뒤 진원고을 박원순선생에게 공부할 때 총명한 재주가 보통사람과 달라 날마다 3백여 줄의 글을 외우니 망암 변이중 등 여러 벗들이 감복하지 않 은 분이 없었다. 글이나 짓고 외우는 선비 되기를 좋아하지 않고 자신이 천문지리에 관심을 두었으 니 사람들마다 소강절 선생이라 칭송하였으며 더 욱 청렴결백한 자조로 집안 살림에는 욕심이 없 었으며 아우 상지와 우애가 돈독하였다. 두 분의 우애는 마치 중국 설포와 같았다고 하였다. 선생 께서 알고 있는 장례법은 옛날을 미루어 미래를 예측하였고 당나라 三式을 참고했으며 우리나라 허암 정희량과 격암 남사고의 공부를 터득하였 다.그 때 국가의 운수와 文明이 태평시대라 볼 수 있었지만 율곡 이이, 중봉 조헌, 토정 이지함, 구 봉 송익필과 서로 하늘의 별을 보고 15년 뒤에 국 난이 있을 것을 논의 하였으며 선생께서는 예언 하기를 반드시 파란 옷을 입은 도적이 서울 동대 문과남대문으로들어오리라하였다. 월사 이정구 선생이 丁丑 1577년에 부친을 따 라 장성고을에 와서 먼저 公을 만나 보시고 서로 친밀하게 지냈으나 그 당시는 그의 공부를 이해 하는 사람이 적었다. 얼마 후 壬辰 1592년 4월에 왜적이 쳐들어오니 선조 임금이 서쪽으로 피난 길에 올랐고 한양과 개성, 평양이 함락되었으며 8도 가운데 오직 호남만이 겨우 온전하였다. 중 국 대장 이여송이 군사를 거느리고 와서 참전하 여 대략 수복을 하고 본국으로 돌아갔는데 그 때에도 왜적들은 해안을 차지하고 있었다. 甲午 1594년 정월에 선생을 조정에 천거하여 봉훈랑 관상감 겸 교수 또는 봉직랑이란 벼슬을 하였으 니 이 는 月 沙 께 서 선 생 의 학 문 을 조 정 에 알 렸 기 때문이다. 丁酉 1597년에 중국 양호장군이 한양에 도착하 여 접반사 한음 이덕형에게 말씀하기를 그대는 貴國에 푸른 옷을 입은 왜적이 한양에 들어오리 라고 예언한 사람이 있다 하는데 만나보았는가 하니 이덕형이 답변하기를 우리나라에 이러한 사 람이 없다고 하니 양호장군이 다시 말씀하기를 내 가 북 경 을 출 발 하 는 날 天 文 를 보 고 이 러 한 사 람이 귀국에 있다는 것을 알았는데 어찌 속이려 하는가 하니 이덕형은 선조임금께 알려 이러한 사람을 찾으라는 어명을 내렸고 그때 백우당은 서울 가까운 자척문에 계셨다. 양호장군은 백우 당을 上席에 모시고 전략을 토론하고 크게 기뻐 하며 말씀하기를 선생이 과연 狐星정기를 받고 태어나셨습니다. 하고 군부에 스승으로 모시고 모든 전략을 세웠다. 이리하여 선생의 명성이 전 국에알려지게되었다. 1598년 7월에는 통덕랑 사재감주부가 되었고 庚子 1600년 11월에는 조봉대부 전옥서주부가 되 었으며 다음해 辛丑년 3월에는 통훈대부 사재감 주부가 되었다 조금 뒤 선약장군 충좌위사정(司 正)을 거쳐 7월에는 의흥위사정(義興衛司正)이 되었다. 戊申 1608년에 광해군이 왕위에 오른 뒤 丙辰 1616년 6월에는 절충장군으로 옥관자를 받 으셨다. 백우당께서는 벼슬에 뜻이 없었건만 월 사 이정구 선생의 권고가 있었는가하면 중국 양 호장군과 다정한 관계가 있었기 때문이다. 우리 나라 조선왕조실록에 30회나 백우당의 천문지리 학을 서술하고 있으며 임란공신 월파 유팽로 장 군은 문집 월파집 일기편에 백우당 선생이 예언 한 청의적 입자국성동문(靑衣賊入自國城東門) 이라는글귀를기록하여남겼다. 우리나라는 외세들의 침입이 많았음에도 인물 백우당 박상의 선생 같은 선각자들이 많이 배출 되었기 때문에 국란들을 극복하고 조선 오백년의 역사를 유지해왔다. 이와 같이 국가 운영에 크나 큰 영향이 있었음에도 그동안 소홀하여왔음은 부 인하지 못할 것이다. 이제라도 백우당선생을 재 조명하는 활동을 전개하여 진실들을 후학들에게 전하여주어야할것이다. 1. 조선왕조실록과 임진왜란공신들의 자료들 을 수집하여 백우당 관련 사실들을 파악해야 한 다. 2. 백우당의 천문지리학을 재 발굴하고 연구할 것이며 3. 왕실과 관련된 지명, 서원사우 건축·풍수지 리 등 선생과 관련된 지명들을 파악하여 연구하 고 4. 위의 내용들을 토대로 저명인사들을 초빙하 여 학술대회 등을 개최함으로써 백우당선생을 재 조명할수있는기회를만들어가야할것이다. ·선조 32년 7월 14일 :윤근수가 사당건립 장소를 정했음을아뢰다 ·선조 32년 7월 14일 :윤근수가 박상의를 두둔하 는글을아뢰다 ·선조 33년 9월 1일 :영상 이항복 등이 대행대비 장지선정을아뢰다 ·선조 33년 9월 2일 :부원군 윤두수 등과 대행대 비의장지에대하여논의하다 ·선조 33년 9월 2일 :대행대비 장지에 대해 전교 하다 · 선조 33년 9월 3일 : 충호사 이헌국이 대행대비 묏자리에대해아뢰다 · 선조 33년 9월 4일 : 전행부호군 정구의 대행대 비묏자리선정에대한상소 ·선조 33년 9월 6일 :총호사 이헌국 등이 왕비의 대행인산에대해아뢰다. · 선조 33년 9월 8일 : 해평 부원군 윤근수 등이 대행왕비의묏자리잡는일로아뢰다 ·선조 33년 9월 14일 :충호사 이헌국이 대행대비 의묏자리에대해아뢰다 ·선조 33년 9월 18일 :충호사 이헌국이 대행대비 의묏자리에대해아뢰다 ·선조 33년 10월 2일 :대행왕비의 묏자리에 관해 논의하다 ·선조 33년 10월 5일 :대행왕비의 묏자리에 관해 논의하다 · 선조 33년 10월 5일 : 관상감 제조 정구가 대행 왕비의 묏자리에 대해 아뢰다. 박상의는 분명하 게언급하지않고번연히좋다고만하였습니다. · 선조 33년 10월 9일 : 대행 왕비의 묏자리에 관 해 논의하다 ‘이는 반룡(蟠龍)의 형상으로 흠잡 을 데 가 없 다 · 선조 33년 10월10일 : 대행대비의 인산에 관해 논의하다 · 선조 33년 10월11일 : 대행대비의 묏자리에 대 해논의하다 · 선조 33년 10월19일 : 박상의·이의신에게 동반 직을제수하다 · 선조 33년 10월21일 : 대행왕비의 인산에 대해 논의하다 · 선조 33년 10월22일 : 영의정 이항복 등이 대해 왕비의인산에대해논의하다 ·광해 원년 2월 9일 :총호사 허욱 등이 건원능의 자리에대하여아뢰다 ·광해 7년 7월13일 :박상의를 시켜 궁터의 맥을 살펴서아뢰게하다 ·인조 8년 3월19일 :관상감이 선조능을 옮길 장 소에관해아뢰다 ·현종 원년 7월 2일 :산릉 후보지에 대한 예조판 서윤강·부호군이상진의상소문 ·현종 원년 7월 2일 :연양 부원군 이시백이 산릉 장소에대해차자를올린다. ·현종 원년 7월 3일 :좌참찬 송시열이 차자를 올 려판의금을사직하다 [구슬을 삼킨 주부공] 박상의선생이 어렸을 때 북상면 도곡에서 신흥으로 서당을 다닐 때 일이 다. 재를 넘어갈 때면 아주 어여쁜 여인네가 나타 나서는 예쁘고 귀엽게 생겼다면서 달려들어 두 귀를 잡고 입을 맞추었다. 며칠이 지나자 선생이 상의의 얼굴을 보니 핏기가 없고 사색이므로 “상 의야 너 요즘 어디 몸이 아프냐?” 하고 물의니 “안 아픕니다.”라 대답하였으나 “아냐 너 뭔 일이 있어 그러는지 말을 해라”고 다그치니 망설이다 가 “재 에 서 예 쁜 각 시 가 나 타 나 내 귀 를 잡 고 입 을 맞추어서 그로 성가스러워서 그럽니다.”라 말 하니 선생이 “그냥 입만 맞추더냐?”라 다시 묻자 “아니요 내 입에다 무엇을 넣었다가 냈다가 그럽 니다.” 하니 선생이 “내일도 그 여자가 나타나 입 을 맞추고 니 입에다 무엇을 넣었다 냈다 하거든 니 입으로 무엇이 들어올 적에 꽉 물고 내게로 갖 고 오너라” 하며 단단히 일러 보냈다. 그러나 그 런 말을 하고난 후로 이상하게 아무리 기다려도 어여쁜 여자는 나타나지 않았다. 선생은 날마다 나타났냐고 묻다가 서너 달이 지나자 지쳤는지 묻지도 않고 잊어버리고 있었다. 선생은 내심 그 재에서 백년 묵은 여우가 둔갑하여 나타난다는 말을 들어오던 참이라 상의를 통해 그 구슬을 얻 어 도통을 해보려고 했는데 역시 여우라서 우리 가 모사를 한 것을 알고 나타나지 않는구나 하고 아쉬워하고 있었던 참이었다. 상의 또한 선생의 말을 잊어버리고 무심코 재를 넘는데 그 여인이 나타나 역시 귀엽다면서 두 귀를 잡고 입을 맞추 며 구슬을 입속으로 넣는 것이 아닌가?문득 스승 의 말 이 떠 올 라 상 의 는 그 구 슬 을 꽉 물 고 다 시 주 지 않자 그 여인이 상의의 뒤통수를 내리치는 바 람에 그만 엉겁결에 구슬을 삼켜버리고는 엎어져 버렸다. 정신을 차리고 일어나 보니 그 여인은 온 대간데 없었다. 상의는 서당선생에게 자초지종을 이야기 하자 못내 아쉬워 하며 “하늘을 보았으면 천리를 깨우쳤을 텐데 땅을 봤으니 지관이 되겠 구나” 하며 연신 혀를 차며 자기가 그 구슬을 얻 지 못함을 아쉬워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오고 있 다.그 후로 상의는 유명한 지관이 되어 장차는 주 부(主簿)가되었다한다. [국지사가 된 박주부공] 임진왜란 대 이여송이 두사충(杜士沖 두두斗杜 인 듯)을 국지사(國地 師)로 삼고 우리나라에 두동생과 함께 원병을 왔 는데 두사충의 말을 따라 소샛들에 진을 치고 싸 우다가 왜적들의 니부 접자(蝶字) 술법에 그만 크게 패하여 두 동생과 많은 군사를 잃어 버렸다. 이에 크게 화가 난 이여송이 두사충을 죽이려 했 는데, 두사충이 이를 미리 알고 도망쳐 북상면 임 실에 자기를 살릴 수 있는 유명한 지관인 박상의가 살 고 있음 을 알고 그 곳으 로 숨 어 들어 가 박상 의에 게 이렇게 말했다. “당신이 지금 서울에 올라가면 국지사가됩니다.”그러면바로이여송에게보낼것 이니 이여송이 진터를 잡으라 하면 소샛들에 진을 쳤 다가 자 기 두 동생 을 잃었 기 때문 에 당신 을 죽이 려고할 것입니다.그때 얼른 그 자리를 선패후승지 지(先敗後勝地地)라하십시오.그러면이여송이만 약을 다짐할 것이니 그때는 ‘목으로 바치겠다.’고 하면 틀림없이 당신은 주부벼슬을 얻게 되고 나라 를 구하는 길이 될 것입니다.“내가 본 소샛들은 틀 림 없는 자 리이 니 당신 이 올라 가면 서 한번 보 십시 오틀림없을것입니다.어서떠나십시오.”라고하니 두사충의 말과 같이만 된다면 주부벼슬도 얻고 나 라 도 구하 게 되니 솔 깃하 여 서 울을 가 기로 결 정하 고 올라가면서 소샛들을 먼저 둘러보니 분명한 선 패후승지(先敗後勝地)였다.그래서확신을갖고대 궐 에 들어 가 앞뒤 사 정을 말하 니 마침 나 라에 서도 주 지사 가 도망 을 치고 비 어 있 어 백방 으로 구 하고 있는 터라 박상의에게 주부벼슬을 주어 이여송에 게 급히 보냈 다. 이여 송이 “왜 적을 이기 려면 어디 에 진을 쳐야 하겠는가?”고 물으니 “소인이 올라오면 서 어디에 진을 쳐야 이기겠는가 하고 지형을 살피 면서 왔사온데 장군이 패하신 소샛들이 반드시 승 리할 선패후승지의 대길지입니다.”라 자신 있게 말 했다. 이여송이 주춤하더니 “뭐라? 소샛들에 또 진 을 쳐 라? 듣 기만 해도 치가 떨 리는 그 곳 이 선패 후 승지라.그래만약또진다면어쩔것인고?”하며눈 을부릅뜨니박상의가한치의망설임도없이“제목 을 바치겠습니다.”하자 이여송이 고개를 끄덕이며 소샛들에 다시 진을 치고 싸워 크게 이겼다는 이야 기가전해오고있다. [자리가 따로 있다]박주부 옆집에 사는 가난한 농부가 자식복은 있어서 아들 4형제를 두고 근근 이 살고 있는데, 어떤 두두(斗杜)라고 하는 이름 난 지관이 박주부를 찾아와 주위를 둘러보니, 가 난한 농부의 텃밭이 양택의 대명당터인지라 박주 부에게 “왜 그 자리를 비워두고 계십니까? 곧바 로 발복을 받을 자리인대요”라고 따지자 박주부는 “그 자 리는 그 성 씨하 고는 맞지 않는 자리 네”라고 하니,두두는 박주부를 비웃으며 농부에게 집을 텃 밭으로 옮기도록 하였다. 농부는 박주부를 신뢰하 는 지라 일 단 명당 자리 에 임시 움막 을 짓고 큰 아들 을 하루저녁을 자게 하였더니,큰아들은 잠이 어렴 풋이들려면도깨비가나타나“네이놈여기가어디 라고 여기서 자려하느냐 썩 물러나지 못할까”라고 호 통을 치 는 지라 저 녁 내내 한 잠을 못 잤 던 것이 다. 둘째, 셋째도 마찬가지였는데 막둥이는 잠을 자니 잔 치집 으로 초 청을 받 아 잘 먹 고 대접 을 받았 다고 말하니,박주부는 속으로 저놈은 농부의 씨가 아니 고 다른 씨라는 것을 알았지만 차마 말하지 못했다 고 한다. 그러자 두두라는 지관은 박주부에게 머리 를 조 아리 며 스승 으로 삼 겠다 고 하면 서 몇 달을 박 주부에게배웠다고전한다. [버드나무가 자라야할 손룡낙사혈] 장성읍 유 탕저수지 동편 거미노리봉(불자산)에서 북으로 마치 거미가 줄을 친 것처럼 여러 가닥이 역행 을 하고 그 중 한가닥이 서편으로 뻗어 구신재 를 만들며, 다시 비룡하여 남으로는 오두봉을 북으로는 감투봉을 만들기 전에 장사로 넘어가 는 길마재 능선의 동쪽에 옥녀봉이 자리하고 있 는데 손룡낙사터와 박부주에 얽힌 전설이 전해 오고 있다. 조선중기 선조~광해군 때 도곡재 밑 임실에 사는 박주부가 나라 안에서 가장 유명한 지관으로 알려졌는데, 옥녀봉에 올라보니 옥녀 가 베를 짜다 북사를 놓쳤는데 대손룡, 중손룡, 소손룡이라는 앞산과 마을 뒷 능선을 북에서 나 온 실 로 보 고 이 실 을 타 고 북 이 떨 어 진 자 리 가 큰 명당인지라 자신의 신후지로 손룡낙사(巽龍 落赦) 명당을 잡고는 땅버들 가지를 거꾸로 세 워 표시를 해놓았다. 명당을 잡으러 다닐 때 아 들과 함께 다녔는데 아들이 어찌나 주색을 좋아 했던지 아들에게 명당이야기를 해주면 곧바로 팔아 먹어버렸기 때문에 박부주가 자기의 신후 지는 아들에게도 가르쳐 주지 않고 있다가 박주 부가 병이 들어 죽게 되어서야 아들에게 “나를 업어라 내 신후지를 알려 주겠다” 하여 아들 등 에 업혀 도곡마을을 거쳐 장사마을 뒷 고개인 길마재를 넘어 손룡낙사 터가 보일만 하면 박주 부의 숨이 끊어지므로 큰일 났다고 집으로 돌아 가려고 고개를 내려오면 다시 깨어나기를 3차 례 정도를 하고보니, 박주부가 생각할 때 손룡 낙사가 내 자리가 아니로구나 하늘의 뜻이라며 포기하고, 도곡 옆산인 와우혈(臥牛穴)로 신후 지를 정했다고 전해오고, 또 한가지는 생사혈 (生蛇穴)로 잡았는데 알고보니 사사혈(死死 穴)이었다고 전해온다. 지금도 손룡낙사에 얽 힌 전설이 많다. 대손룡, 중손룐, 소손룡 가닥에 제각기 손룡낙사라는 명당 을 잡았다고들 하지만 손룡 낙사는 길마제에서 보이는 곳이라야 하며 그곳에는 버 드나무가 자라고 있을 것이 라한다. /글김영풍장성문화원고문 /출처:文鄕31호P154(2020. 12)장성문화원 人物 栢友堂 朴尙義(인물백우당박 상의) 선조 유지를찾아븣 선생의 재조명 장성호에세워진선생의예언비,靑衣賊入自國城東門,왜적이장차서울동문으로쳐들어오리라는선생의이예언은 당시유팽로장 군월파집일기편에나타나있음. 김영풍고문 총명한젊은시절 벼슬길에오르다 명나라군부의스승이되다 예언청의적입자국성동문 백우당선생의재조명필요성 조선왕조실록에기록된백우당(요약) 박주부와 관련된 야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