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page

2021년1월31일 일요일 6 (제169호) 기 획 밀성박씨 감헌공파는 우리 박성(朴姓)의 장손가이다. 즉 신 라시조왕의종손집안이기도 하다. 그동안 본보에서는 신라시 조왕의종손은누구이고,어디에거주하는지수소문해온바있 다. 적장손이 누구인지 알아야 박성의뿌리를 정립할 수 있었 고,종손가인 감헌공파를 알 수 있다고 보았기 때문이다.감헌 공파는점필재김종직선생과깊은인연이있는집안으로무오 ·갑자사화로 인해 큰 화를 입었고,깊은 골짜기로 숨어들어가 야만했기에드러내기어려웠음을그동안의사정으로알수있 다.이에본보에서는2021년신년특집으로감헌공파를소개해 본다. 감헌공파는 고려충신으로 불 사이군의 충절을 보인 송은 박 익 선생의 손자이고, 우당공 박 융의 장자 휘 진(震)을 파조로 하고 있으며 동생 건(乾)은 소고 공파이다. 파 조 휘 진 (震 )의 아 호 는 감 헌 ( 게軒)으로 세종6년 1424년 경 남 밀양 삽호(현 후사포리)에서 태어나 문과에 급제하여 전적을 지내고 1478년(성종10)에 돌아 가셨다. 이에 후손들은 공의 호 (號)를 따 감헌공파라 한다. 감 헌공의 사료(史料)가 전해지지 못한 것은 아들 통찬공(휘 문 손, 호 해루당)과 치와공(휘 승손), 손자 오려공(휘 성무) 등 이점필재김종직과교우(交友)하고또는문인으로밀접한연 관이 있어 무오사화와 갑자사와에 큰 화를 입으면서 이 또한 전해지지않아아쉽다. 감헌공파는 신라시조대왕의 적장자 가 문으로 밀성대군의 후예이다.밀성대군은경명왕의맏이로서팔대군의장자로밀 성대군에 봉해졌는데 지금 밀양부에 이궁대, 풍류현, 세루정 이있어이를뒷받침한다. 이는 세상에서 전하기를 신라왕이 노닐던 곳이라 한다. 양 촌 권근이 이조 유사에 기록하기를 대군의 유적이라고 말했 다. 밀양 영남루의 단소 지점에 관을 묻은 구덩이가 발견됨에 따라 구전으로 내려오는 말을 뒷받침하고 있어 밀성대군의 유지라여긴다. 밀성대군의 아드님 삼한벽공도대장군(三韓壁控都大將軍) 휘 욱(郁)은 고려초(麗初)에 군도(群盜)를 토벌하여 태조(太 祖)의 건국사업에 공(功)이 많았으며, 손자는 요동독포사 휘 난(遼東督捕使諱瀾)이다. 밀성대군의 8세에 이르러 태사공(太師公)휘 언부(彦孚)은 고려 문종(1047년 丁亥) 때 문과에 급제하여 최충과 함께 태 사(太師)를 지냈고 중서령 문하시중 도평의사를 역임하였으 며밀성부원군으로피봉되었다. 태사공은 아들을 둘 두었는데 맏이는 효신(孝臣)차는 의신 (義臣)이다.고려 인종은 양 형제를 효의양신(孝義兩臣)또는 고려주석(高麗柱石)이라 부르고 동방대성(東方大姓)이란 어 필 넉자를 하사 했다.유지는 경북 청도군 풍각 화산에 있다고 하나확증이없다. 효신(孝臣)은 과거에 급제하여 문하시중이 되었고 평장사 로서 중국에 사신으로 갔을 때 천자가 예로서 대우하여 치사 하였고본국에돌아와졸하였다.시호는문익(文翼)이라 사시 하고인종묘에배향하였다.의신은공부상서로서종방인양신 (良臣:彦祥의 아들), 직신(直臣:彦仁의 아들)과 더 불어 세상 에서삼언사신(三彦四臣)이라알려져있다. 공필(公弼)은 효신의 아들인데 과거에 급제하여 대장군 도 검사병부상서를역임하였다. 공은 문무에 재주가 겸비하여 고려 예종(1107년) 2년에 윤 관과 같이 여진을 쳐서 평정했다. 뒤에 진국공신으로 추존되 었고시호를충열(忠烈)이라사시하였다. 육경(育慶)은 공필의 아들인데 1130년 인종8년에 대장군과 병부상서를 지냈다. 또 1135년에 김부식과 함께 적(賊) 조광 등을 쳐서 평정하였다. 또, 글을 올려 양현고(養賢庫)를 세워 서 많은 선비를 기르게 하고 또한 모든 고을에 널리 학사를 설 립하였으며국사를보살펴수정하였다.아우육화(育和)는병 부상서요 그 후는 좌상공 춘(左相公 椿)파 및 규정공 현(糾正 公 鉉)파 이며, 둘째아우 육권(育權)의 후손은 어변당 곤(坤) 파이다. 대화(大和)는 육경의 아들인데 대호군 이부상서였으며 수 문학 대제학으로문무가겸전하였다.간(幹)은 대화의 아들인 데 문과급제로서 병부참정(兵部參政)이었고 시호는 양효(良 孝)이다. 배위는 추화군부인(推火郡夫人) 밀성손씨(密城孫 氏)인데여지승람에기록되어있다.두아들을두었는데영균 (永均),세균(世均) 형제이다. 이 두형제가 곧 은·행산파의 파 조이다. 은산부원군파의 파조인 휘 영균(永均~1300)은 양효공 간의 큰아들이다. 고려조에 익대공신으로 벼슬은 판도판서와 삼제 (三帝)를 역임하였고 응천군으로봉군되었다.뒤에또 은산부 원군(銀山府院君)으로 추봉되었다. 시호는 문헌(文憲)으로 사시되었고 묘소는 경남 창녕군 계 성면 광계 마을(산82번지) 뒤 을좌(乙坐) 구릉에 있다. 부인 은 능성구씨(綾城具氏)로 문하좌정승(門下左政丞)을 지낸 문정공(文貞公)의( 陞)의 딸이다.배위(配位)재령이씨(載寧 李氏)는 신라 경순왕의 사위인 재령백(載寧伯)을 지낸 우칭 (禹稱)의5세손이다. 은산부원군 휘 영균은 슬하에 아들 셋 딸 넷을 두었는데 첫 째는익(翊:초휘는天翊)이요,둘째는천경(天卿),셋째는문 경(文卿)이다. 은산부원군의 장남 익(翊, 1332~1398)의 자는 태시(太始),호는송은(松隱)이다.공민조에 급제하여 사재소 감, 예부시랑, 중서령, 예판 등 벼슬을 했다. 이성계와 같이 남 정북벌을 했다. 그러나 려말 국정이 쇠퇴하고 어지러워지자 벼슬을 버리고 밀주 송계에 돌아와 정포은,이목은,길야은 등 여러 선비들과 시국을 개탄하고 걱정하면서 문학을 즐기고 토론하였다. 이성계가 등극한 후 송은 선생을 다섯 번이나 불러 공조,예 조,형조,이조 판서와 좌의정을 제수하려고 해도 끝내 나가지 않았고 세칭 8은이라 했다. 시호는 충숙(忠肅)이며 두문동 72 현으로 경기도 파주의 고려 통일대전에 고려 충절신으로 배 향되었고, 그 외 밀양 덕남사 청도 용강서원, 산청 신계서원, 창원 운암서원 등에 배향되어 있다. 그리고 지난 2000년 9월 경남 밀양시 고법리 소재 송은선생 고분에서 벽화가 발견되 어 2005년 2월 5일 국가 문화재 사적 제459호로 지정되었으 며,후손들은 송은공파라 부른다. 송은공의 아들은 넷인데 우 당공 휘 융(融)·인당공 휘 소(昭)·아당공 휘 조(調)·졸당공 휘총(聰)이다. 송은공의 장자 휘 융(融)은 태종8년(1408년) 사마시에 합 격했다. 3월에 지공거(知貢擧=主任試官) 이 직(李稷)이 고적 (考績, 관리의 성적을 평가하여 정함)하는 의의를 물었는데 공이 대답한 바를 보고 감탄하여 이르기를 ‘문장 포치(布置, 넓게 늘어놓음)가 정연하고 문사(文辭)가 빛나서 과장(科場) 에 영수(領袖)일 뿐 아니라 내가 마땅히 옷자락을 걷어잡고 (지금의 경례) 출척(黜陟, 못 된 사람을 내 보내고 옳은 인재 를 등용)하는 법을 한 차례 물어야겠다.’하였다. 드디어 장원 (壯元)으로뽑혔다. 춘정 변계량과 익성공 황의도 서로 이르기를 「한(漢)나라 동중서도이보다나을것이없겠다.」하였다.공이이어과거에 올랐으나 벼슬길에 뜻이 없어 향리에 물러나 있으면서 성리 학 에 마 음 을 두 어 깊 이 생 각 하 고 서 적 을 가 까 이 하 여 그 런 생 활로종신할듯하였다. 벼슬은성균관사예,사간원 정언,집협전 수찬·전한을역임 하였다. 기주(記注븡집현전 학자들이 겸직하는 관지)와 지제 교(知製敎븡왕에게 교서를 기초하여 바치는 관리) 등 직을 항 상겸해서문필이물흐르듯하니동료들이크게탄복했다. 형조좌랑, 이조정랑, 종부시 정을 역임하였으며, 외직으로 는 금산,함안 두 군을 다스렸는데 정사가 공평하고 백성이 화 목했으며, 손을 씻을 듯 청백하니 기리는 소리가 길에 가득하 였다. 또 경상도 경력으로 배임(拜任)해서는 양촌 권근 선생이 저 술한 입학도설을 간포(刊布븡간행하여 배포)하였으며, 열읍 공자묘에 비치된 제기(祭器)를 수리 또는 새로 만들고, 문학 을권장하고현능한인사를표창하여풍교(風敎)가크게변하 였다. 뛰어난 학문으로 저술한 시문은 병화(兵火)로 인해 흩어져 없어져 아쉬움은 더한다. 공이 과거에 오르자 그의 재능은 한 시대 거유(巨儒)명공(名公)의 알아주는바가 되었다.탁영 김 일손이 지은 청도 학궁기(淸道學宮記)에는 뷺박 융 선생이 이 도(道)의 도사(都事)가 되어 흥학(興學)에 크게 힘쓴 바가 있 었다.뷻하였다. 파산지(巴山誌)에는 뷺박융은 1425년 도임했는데 과최(課 最,치적이 으뜸으로 매김 받았다는 것)로 임금에게 보고되었 으나 초천(超遷, 진급)되지는 못했고, 그후 1428년 3월에 관 아에서 별세하니 이민(吏民)이 친척 상(喪)처럼 비통하여 시 장(市場)을철폐했다.뷻하였다. 선생이 남긴 시문 중 사재감 정(司宰監正) 박홍신(박(朴) 弘信)이 왜적과 맞서 싸우다 사망(흉문븡凶聞) 했다는 소식이 해상(海上)으로부터 이르자, 함안(咸安) 군수 박융(朴融)은 시(詩)를 지어 곡하였는데, 그 시가 점필재집에 전해져 소개 해본다. 뱚파조별 약사 밀성박씨감헌공파 감헌공파집성촌전경-밀양시청도면고법리 뱚감헌공파연원 감헌공 제단(송은공 묘 아래에 있다. 뱚감 헌 공 파 선 원 세 계 송은박익선생묘 송은선생신도비(보본재앞) 뱚7면으로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