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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1월31일 일요일 5 (제169호) 특 집 케이시시정공(주)를 소개하 기전 직원들을 즐겁게 일할 수 있도록 힘의 원천을 제공하는 박 덕규 대표를 먼저 소개해야 할 것같다. 지난 11일 찾아간 군포공장에 서 근로자들과 박 대표 간의 대 화를 지켜보면서 정겨움을 느낄 수 있었다. 특유의 경상도 사투 리로 ‘새색시 요즘 살림살이 할 만 하나’ 처음엔 귀를 의심했다. 나중에 직원을 통해 ‘아마 우리 집 숟 가 락 이 몇 개 인 지 도 알 걸 요’ 대표이기 이전에 부모 혹은 큰형님, 큰 오빠쯤으로 알고 있다고 말하는 직원들에게서 대표에 대한 믿음과 무한한 신 뢰를보내고있음을알수있었다. 박대표는족보문집전문업체를창업대한민국최고의업체 로 성장한 ‘대보사’ 창업주 고(故) 박노택 회장의 3남1녀 중 차남으로대구에서태어났다.사육신의한분이신충정공박팽 년선생의18대손으로유학을숭상하고소학(小學)을통해일 상생활에서의 도덕 실천을 생활화 할 것을 아버지로부터 배 우며몸소실천해왔다. 부친인 고(故) 박노택 회장은 아들 삼형제중 박 대표에 대한 걱정이 제일 컸다. 너무 순하고 원래 원칙을 강조해 ‘험한 세상 을 어떻게 헤쳐 나갈지’ 걱정 속 에지켜볼수밖에없었단다. 박도규 대보사 대표는 문중에 서 무슨 사업을 한다든지 어려운 일 에 도 형 의 말 에 한 번 도 거 역 하지 않은 동생을 보면서 ‘나는 참 복 받 은 사 람 ’이 라 고 생 각 한 단다.특히 형 도규 현종(현 대보 사 대 표 )은 박 대 표 의 든 든 한 후 원자이고, 동생 신규 현종은 현재 케이시시정공(주) 전무로 박대표를 지근거리에서 돕고 있다. 2019년 6월 한국금형공업 협동조합(이하 금형조합)이 주최하는 븮제 23회 금형의 날븯 기 념식에서산업통상자원부장관상을수상했다. 박덕규 대표는 기계공학을 전 공했다. 1977년, 청년은 가업인 출판업을 이어받은 형님(박도 규)에게서 다음과 같은 질문을 받았다.당시 기계공학을 공부하 던 그에게 “학업을 계속할 것이 냐? 가업을 도울 것이냐? 혹은 취업계획이 있느냐?”는 물음이 었다. 이미 군 입대에 앞서 취업 을 결정했기에 청년 박덕규는 망 설이지않았다. 우연인지 필연인지 마침 집어 든 신문에는 당시 재계 5위였던 대성산업의 공채 광고가 떴다. 대성산업은 석탄, 연탄, 석유, 가스, 산소 등을 생산했다. 특히 그의 고향인 대구에도 있었고, 서울에도 본사가 있다는 것이 마음에 들었다. 그러니 서울로의 독립을 꿈꾸던 청년에겐 더 없이 좋은 조건. 청년은 곧바로 서류전형에 도전했다. “크게 기대는안했어요.아직군복무가3개월남아있던상황이었기 에 일단 넣어보고 나중에 제대해서 제대로 직장을 찾으려고 했죠. 그런데 덜컥 서류전형에 합격했다고 연락이 왔어요. 입 사경쟁률이50대1정도되었는데통과한거죠.군복무기간이 남아있어서공채동기생보다3주늦게출근했습니다.” 신입사원박덕규에게떨어진첫업무는보수와공사발주등 을 담당하는 공무과 임무였다. 하지만 첫 보직은 시작에 불과 할 뿐, 당시는 무섭게 산업발전이 이뤄지던 1970년대 후반이 었다.정신을차릴수없을만큼그의보직은돌고돌았다. 자재관리를 지나 연구소 업무에 이르더니, “2개월 동안의 일본 연수에 다녀오라는 명이 떨어졌습니다.처음에는 5주 동 안 유압(油壓) 관련 교육을 받고 오라는 것이었는데, 저는 함 께 갔던 동료와 달리 3주 더 교육을 받게 되었어요. 그게 바로 공압(空壓) 관련 교육이었습니다. 읽기는 하지만 의사소통마 저 자유롭지 못했던 제 일본어 실력으로 당시 최신기술인 공 압분야교육을받는것은무리일수밖에요.”기계사업부의책 임자였던 김위수 부장의 지지를 얻고 떠나온 일본 현지교육 이었으니 부담감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게다가 국가연구자 금까지 받고 왔으니 애국심도 발동했다. 그럼에도 당시 교육 을감당하기에는그에겐역부족일수밖에없었다.의사소통의 한계도 그렇지만 국내에는 제대로 소개된 적이 없던 전문분 야가 공압기술. 그러니 이방인에게는 가혹 하리 만큼 어려운 분야였다. 더욱이일본산업의최고번성기였던1980년대초반,체계가 없는 교육과정에서 일본인 기술자들에게 알음알음 묻고 배워 야 하는 과정자체가 무리였다. 질문 하나를 던지면 바쁘다는 핑계로 반나절은 지나야 답변이 돌아오는 둥 마는 둥. 일본인 기술자들은 대놓고 말하진 않았지만, 미개한 한국에서 온 일 개 사원급 교육대상자는 그들에게 그저 괄시와 천대의 대상 일 뿐이었다. “하루 2~3시간도 못 자고 교육을 따라잡으려 했 지만 역부족일수 밖에요. 첫 주는 어찌어찌해서 테스트를 통 과했지만, 2주차부턴 낙제였어요. 자존심도 상하고 한국에 돌 아갈 면목도 없었죠. 헌데 나중에 김위수 전무님께 들어보니, 그 테스트를 2주 후부터 통과한 직원은 아무도 없었다고 하시 더군요. 그런데 5주차 교육을 마치자마자 이번엔 4주간 공압 관련기술을배워야한다니정말난감했어요.버려진짐짝마냥 그저우두커니있다가3주가가버린겁니다.”타지에서신입사 원이견디기에는너무나서러운일이었다.다만언젠가일본인 들의 이 멸시와 천대를 잊지 않고,유·공압기기 분야에 스스로 눈을뜨고반드시배워보겠다는열망은더강렬해졌다. 그런 바람 덕분이었을까.전화위복의 기회는 생각보다 빨리 찾아왔다.“막상귀국했더니교육받은바로그회사제품을수 입하라는 업무 지시가 떨어진 겁니다. 이제야말로 신분이 바 뀐 거죠. 이제부터 제가 교육생이 아닌, 고객 대접을 받을 수 있게 된 거 아닙니까. 맡겨진 업무가 해당 일본기업에게 수입 을 의뢰하고 엔지니어링을 익혀서 영업을 하는 업무였으니 까, ‘옳다구나!’ 싶었습니다.” 해당 일본기업은 타코(TACO) 사. 일본 내에서 유·공압실린더를 비롯한 관련부품 생산으로 꽤 이름이 나 있는 전문기업이었다. 나름의 복수를 감행할 절 호의 기회를 만나니, 업무도 재미있고 신이 났다. 그렇게 2년 동안 업무를 진행하면서 사원 박덕규는 유·공압기기 분야에 대한 기술 이해는 물론,언젠가 있을 두 번째 현지교육을 대비 해나갔다. 그리고 마침내 길이 열렸다. 1982년 일본으로 날아 간 그는 벼르고 별렀던 배움의 전술을 펼쳤다. 과거의 일방적 인 주입식 교육을 거부하고, 준비해간 질문에 답변을 해달라 고 딱 부러지게 요청했다. 2년 전의 첫 교육 당시 설움을 받으 면서 접했던 전문서적을 읽고 또 읽으면서 그동안 궁금했던 사항을현장에서확인하기위해서였다.타코사의오가와토키 아키(이하 오가와) 회장의 눈에 띈 계기도 그 때문이었다. 미 국에서 유·공압 기술을 유학한 오가와 회장은 최고의 기술전 문가였고, 특히 뭔가 하나라도 더 배우려는 그를 보며 자사의 제품을 맡겨도 좋을 믿음직한 기술영업 인재로 인식했던 것 이다. “사실 첫 번째 일본 연수교육에서 돌아올 때도 타코사 의 전무 쿠츠미뗎이치(久津見舜一)가지은 책 한권을 사인하 여나에게보내주셨어요아주잘만든책이었죠.그같은전문 서적에서 추려놓은 질문을 연수기간 일주일 동안 집중적으로 공부하고 답을 구했어요. 덕분에 전보다 훨씬 발전된 교육이 이뤄졌죠. 그게 계기가 되어 오가와 회장과는 고인이 될 때까 지 오래도록 인연이 이어졌어요. 기술 국산화를 이루고 품질 이 보증된 군포공장에서 2007년부터 저희 제품을 수입해간 일본기업도바로타코사였죠.당시에교육을받으면서이야기 가 잘 통하기 시작하니, 그 인연으로 저에게 설계와 기술 담 당자를 한국으로 보내줘서 지도해주고 자사 제품을 수입해서 팔아보라는제의까지하게된겁니다.”대성산업입사후14년 7 개 월 만 의 일 이 었 다 . 1992년 1월 더 이상 머뭇거리지 않고 창업했습니다. 서울시 흥에서 지금의 케이시시정공의 전신인 가나시스템을 세우고, 오래도록 품어왔던 기술 국산화에 대한 첫걸음을 떼었다.“처 음에는 돈이 없으니까, 알고 있는 지식으로 물건 판매유통부 터시작했어요.직장생활을하면서도장사를하면서도성실했 던 만큼 신뢰는 따라왔고,장사도 제법 잘되었죠.그런데 1997 년 10월, 문제가 터졌습니다. 3 번의 부도를 막아주었고 대구 공장의 사장이 이번에도 부도를 내겠다며 저에게 돈을 대달 라고 하는 겁니다. 그때 대구공장은 그나마도 국산 실린더를 만들던 공장이었는데 사업을 포기한다니 너무 억울하고, 그 배신감은 이루 말할 수 없었죠.” 악연도 인연, 전임 사장을 뒤 집는 CEO는 ‘알고도 속고 모르고도 속는다’는 말 그대로였 다.박 대표는 기술 국산화에 대한 바람으로 대구에 있던 유공 압실린더 제조공장을 물심양면으로 지원해왔다. 하지만 정작 돌아온 것은 배신과 거짓뿐. 게다가 그간의 부채를 갚아주기 는커녕, 오히려 쓸 만한 기계는 자신이 챙기겠다며 적반하장 으로 나왔다. 그렇게 인간에 대한 마지막 신의마저 무너지면 서,박대표는임대공장과남은직원들까지떠안게되었다. 케이시시정공의 대구공장은 그런 불운한 상황에서 시작되 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 악연도 인연이었던 거죠. 사람은 미웠지만 어쩌겠어요. 남은 직원 26여 명과 제가 운영하던 서 울사무소 포함 직원들까지 서른 댓 명의 직원들 운명이 저에 게 달린 거나 다름없게 된 겁니다. 이왕 이렇게 됐으니, 우리 가 다 같이 살려면 제대로 된 제품을 만드는 것밖에 길이 없었 어요. 곧바로 제품개발과 품질 확보에 착수했습니다.”얄궂은 운명이었던 것일까.더 황망한 일이 곧 벌어졌다.스스로 구할 수 있는 최대치 5억 원을 쏟아 부어 공장 운영을 결정했는데, 딱 한 달 만에 1997년 11월1일 IMF가 몰아닥쳤다.은행이자가 25~35%까지 치솟았고 이런이자에도 은행에 빌리겠다고 했지 만 은행에서 빌려주기를 거절하였습니다. 그 시절, 박 대표가 기댈 곳은 가업을 이은 형님밖에 없었다. 망설이던 형님을 설 득한 것은 성실하게 살아온 박 대표의 인생을 믿어준 형수님 이었다.덕분에 그 시절 강남아파트 몇 채에 해당하는 10억 원 을 월 1% 이자로 빌렸다. 그때부터 말 그대로 생존을 위한 사 투가 시작되었다.“그 이전 공장에서 하던 방식으로 만들어봐 야 삼류제품밖에 안되니, 새로 설계하고 투자해서 품질을 높 여야만 살아날 수 있었어요. 그래서 그동안 생각하고 있던 품 질 좋은 실린더 제작부터 시작했죠. 실린더는 유·공압기기 중 에서도 자동화기계에 없어서는 안 될 필수부품이고, 당시 수 입품 일색이던 국내 시장에 꼭 필요한 부품이었습니다. 어서 빨리 국산화해야 할 제품인 만큼 품질 개선에 사활을 걸고 돈 을쏟아부었던겁니다.”주변에서는형편에맞지않는무리한 투자라는 비판도 많았다. 자동차, 중장비, 로봇 라인 등 그 어 느 산업 라인에도 필수적으로 필요한 부품이 실린더이지만, 그만큼제품에대한검증기간도길었고시장도보수적이었다. 그럼에도 결국 살아남기 위해서는 지체할 수 없었다. “유·공 압실린더에 대한 품질은 최소 1년이 지나봐야 평가할 수 있어 요.그러니 내부에서조차반대가컸죠.결국몇년은지나야검 증이 될 텐데 그때까지 견딜 수 있겠느냐고,그런 비판 속에서 도 투자를 멈추지 않아야 했으니 힘들었습니다.그런데 2~3년 쯤 지난 시점부터 사업이 안정화 추세로 접어들었습니다. 그 동안 케이시시정공이라면 품질을 보증한다는 시장의 믿음이 깔려 있던덕분이죠.”실제로 그랬다.박 대표는 IMF라는 위기 에도, 협력사 대금결제나 직원들 월급 한 번 밀린 적이 없었 다. 그 후 이야기는 예상대로다. 케이시시정공은 위기일수록 투자에 매진하며 업계가 알아주는 유·공압기기를 전문으로 생산하는전문기업이되었다. 부품소재분야에서외국기업에시장을내준품목이한두가 지라만 유독 유공압기기는 그 정도가 심한 편이다. 내수시장 의 80%가량을 일본,독일,미국기업이 점유하고 있다.이런 독 과점구조 탓에 가격, 공급량 임의조절 등의 횡포를 부려도 속 수무책이다.대기업인국내수요업체들도이를관행처럼받아 들이고 있을 뿐이다.어려운 와중에서도 유공압연구소(2004 년)를 설립하고, 군포공장을 2005년에 설립해서 공압 솔레노 이드밸브의 일본 수출(2007년)도 시작했다. 한국기계연구원 의 신뢰성인증(R)을 받은데 이어 2011년엔 포스코의 검정자 율관리공급업체로업계유일하게선정됐다.품질이나성능이 세계적수준에올라섰다는뜻이다. 부품 국산화를 하고 싶 다는 생각에 시작했지만 난관도 많았다. 각고의 노력 끝에 제품을 내놔도 대기업들이 국산을 안 쓰 려는 경향이 뚜렷했다. 여전히 전체 국내 시장의 절반 이상을 일본 제품이 차지하고 있고 독일 10%, 미국 7~8%의 점유율을 보인다고 박 대표는 설명 했다.국산은20%남짓인셈이다. 직원들의 여가 활동 투자에도 적극적이다. 대구의 한 직원 이 에베레스트 정상 8848m에 올라 회사 깃발을 펼치고 있는 사진이 걸려 있다.이 직원은 회사의 지원으로 꿈을 키워 현재 는전문등반가로활동하고있다. 조직 구성도 직원들의 성장과 소통에 방점을 찍었다. 조직 을 세분화해 직원들이 스스로 목표를 세우고 주요한 역할을 담당할 수 있게 했다. 박 대표는 뷺직원이 성장해야 회사가 발 전할 수 있다는 븮사람의 가치븯를 최우선으로 생각하고 있다 뷻고강조했다. 케이시시정공(주)은 유압실린더 공압실린더 공압밸브 청 정화기기등을전문으로생산하는중소기업이다.아직외국산 부품들이 지배적인 국내시장에서 끊임없는 연구개발(R&D) 투자와 인력육성으로 국산제품비율을 꾸준히 높여가고 있다. 박덕규 대표는 “안방을 내준 부품시장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1992년 회사를 창업할 때만 해도 국산부품시장은 일본 독일 미국 업체가 90%를 차지하고 있었다.”면서 “외국산, 특히 일 본산을 따라잡기 위해 밤잠을 줄여가며 R&D에 집중해 왔 다.”고 강조한다. 그 결과, 최근 중소벤처기업부로부터 ‘글로 벌강소기업’으로 선정됐다. 그 밖에도 유공자 국무총리 표창, 모범 중소기업인 멤버십 선정 및 수상,우수 자본재 개발 유공 압산업포장을받기도했다. 박덕규 대표가 케이시시정공 회사를 설립한 것도 오로지 ‘부품 국산화’를 위해서였다. 관련업계에서 근무하던 1980년 대 초반, 정부의 지원을 받아 일본의 관련기업들을 탐방하면 서부품국산화의꿈을품게됐고케이시시정공(주)을1995년 에 법인을 창업하는 결단을 내렸다. 회사의 경영방침도 ‘개발 보국’하자는 것으로 내세웠다. 외국산 부품을 따라잡기 위해 R&D투자와 국산 부품 생산에 30년을 매달렸다. 매출의 10~1 5%를 R&D에 투자하고 175여명의 직원 중 10%가 품질향상과 신제품 개발을 담당하고 있다.박 대표는 “사무용품을 중고로 구매하더라도 장비를 사는 등 설비투자에는 돈을 아끼지 않 았다.”고 얘기한다. 그런 노력 끝에 지금은 삼성전자 LG전자 현대차 현대제철 포스코 등 대기업 생산 현장에서 자사가 만 든제품을어렵지않게찾아볼수있게됐다.품질과성능이세 계적수준에올라섰음을의미한다.지난해매출333억 원을 달 성할 정도로 성장했다.박덕규 대표가 R&D만큼 중요하게 생 각하는 게 ‘사람’이다. “직원이 성장해야 회사가 발전할 수 있 다. 사람의 가치를 최우선으로 생각하고 있다.”는 것이다. 모 든 직원들에게 연간 50시간의 자기계발 교육을 무상으로 지 원하고 있는 이유다. 직원들의 여가 활동 투자에도 적극적이 다. 10년 이상 근속자들이 많고, 회사와 함께 나이 들어 간 직 원이정년이후에도근무를원하면일할수있게하고있다.회 사 조직도 직원들의 성장과 소통에 맞추고 있다. 조직을 세분 화해 직원들이 스스로 목표를 세우고 주요한 역할을 담당할 수있게했다.갓입사한사원도회사의주요정책에참여할수 있다. 입사 1년차 사원들에 의해 운영되고 있는 유튜브 채널 븮공대언니븯가 대표적인 사례다.이 유튜브는 어렵게 여겨질 수 있는 제품을 알기 쉽게 설명하며 영업에 일조하고 있다. 전사 적자원관리(ERP)시스템을 도입해 회사가 돌아가는 것을 직 원들에게 모두 공개하여 ‘투명경영’을 실현할 계획도 추진하 고있다. 케이시시정공(주)은 최근 글로벌 성장전략을 수립하고 실 행하기 위해 글로벌 마케팅팀을 신설했다. 부품 국산화로 국 내시장을 지키겠다고 시작한 사업이 이젠 세계 22개국에 수 출할 정도로 해외시장에서도 기술력을 인정받고 있기 때문이 다. 현재도 중국 쪽 거래기업에 로봇부품인 그리퍼 등 유공압 기기를,일본 쪽 거래기업에 특수 유압,공기압 실린더를 공급 하고있다.최근 전반적인 침체로 어려운 환경속에서도 기계· 장비 기업들은 꾸준히 신제품 개발에 노력해 왔다. 그럼에도 아직 국내부품시장, 특히 유공압시장의 70~80%는 외국 업체 들이 차지하고 있다.그만큼 갈 길이 멀다는 얘기다.”면서 “케 이시시정공은 지속적인 R&D를 통해 명실상부한 ‘자동화 전 문 글로벌 강소기업’으로 성장해 나가겠다. 산업발전에 따라 빠른 개발대응 전략으로 국산화를 통해 ‘개발보국’의 꿈을 이 루며직원들의행복을이루겠다.”고앞으로의포부를밝혔다. 지난 2020년 3월 3일 븮제54회 납세자의 날븯에 박덕규 대표이 사는 납세의무를 성실히 이행하여 국세청에서 모범납세자로 선정되어 국세청장 표창을 받았다.속담에 뷺윗물이 맑아야 아 랫물도맑다뷻라는 말이 있듯이 케이시시정공(주)은대표이사 부터 사원들까지 납세 의무 뿐 아니라 준법정신도 높다. 이런 정신을 앞으로도 꾸준히 유지하는 케이시시정공(주)이 되겠 다며직원들의각오도대단하다. 박 대표의 18대조 사육신 박팽년 선생은 집현전 학자이다. 더 나아가 박팽년 선생의 아버지 문민공(휘 仲林)은 성삼문, 하위지 등 집현전 학자를 길러낸 스승으로 이들이 한글창제 에 공헌함으로서 지금 우리가 사용하는 한글이 태어난 것이 다.이에 박 대표는 집현전 학자였던 선조의 유훈을 항상 가슴 에 품고 살면서 한글세계화에 각별한 관심을 갖고 있어, 지난 해11월30일(사)한국찌아찌아문화교류협회를방문사재1억 원을 선뜻 내놓았다. 이 단체는 필리핀의 바우바우시와 남부 톤군 지역에 까르아바루 초등학교,바우바우 제2고등학교,사 뽀라와 제1중학교 등 8개교 약550여명의 학생에게 한글교육 을 실시하며 한글을 보급하고 있다. 이밖에도 불우한 이웃을 위한 기부 및 봉사를 펼치며 이웃과 함께 살아가는 상생의 기 업운영으로 사회를 따뜻하게 만들고 있어 박 대표가 꿈꿔온 부품국산화에 이어 세계속의 기업으로 우뚝 설수 있기를 염 원해본다. /박상섭 편집국장(parkss1012@hanmail.net) 뱚종친사업체탐방 유공압기기전문제조업체케이시시 정공(주)박덕규대표이사 2019년 중국 우한에서 발병한 ‘코로나 19’우리나라에 최 초 확진자 발생후 1년이 지나면서 참으로 고통스럽던한 해가되었다. 미증유의대재앙을 맞아 사람과의대면을 기피해야 하는 생활이 연속되면서 서민경제를 이끄는 중소 영세사업자 들의고충은 이루 헤아릴 수 없을 지경으로 모두가 힘든 하루를보내고있다.그럼에도노사가한마음으로힘을모 아위기를극복하고있는강소기업들이있다. ‘새 색시 요 즈 음 살 림 살 이 할 만 하 나 ’ 특 유 의 경 상 도 사 투 리로 직원들에게 인사를 건네고 어깨를 다독여 주는 박덕 규 대표,코로나19로 인한 경기 위축 등수많은 환경 변화 에도어려움을이겨내고있는힘의원천은상생이다. 직원들이행복하게직장생활을할수있게돕는사내복지 제도 운영과 지속 성장을 위한 신기술 개발ㆍ투자 등다양 한방법으로경쟁력을키우고있다.경영자와근로자가공 동의목표를위해서로배려하고함께나아가며활력을주 는‘비타민강소기업’케이시시정공(주)를찾아소개해본 다. 공압솔레노이드벨브 유압실린더 박덕규대표이사 뱚행복한직장케이시시정공(주)박덕규대표 박 대표가 동생 신규 전무의 수 상을축하하고있다. 뱚청년박덕규‘사람에게서배우고 사람에게서익혔다’ 박대표가박대표가생산라인을 점검하고있다. 뱚‘타코(TACO)사오가와토키아키(小川時明) 회장에게발탁되다’ 뱚케이시시정공의전신인가나시 스템세워 뱚부품국산화앞장 ‘가격덤핑에엔저까지국내업체고사작전으로힘든싸움’ 케이시시정공 군포 공장에서 로봇에 의 한 제품 생산 및 테스트가 이 뤄지고 있다 뱚이웃과함께하는상생의기업으로 뱚모범납세자표창수상 뱚R&D투자와직원육성으로‘개발보국’실현 현장에서함께하며기술개발에앞장서고있는박덕규대표이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