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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1월31일 일요일 4 (제169호) 기 획 병산서원은 1778년(정조2년) 창건되 어 1868년(고종5)에 철폐된 서원으로 19 46년 사당을 복건하고, 1987년 중건하여 문정공 박문오 선생을 주벽으로 하고 풍 정공 박의룡, 애한정공 박익경, 암천공 박 증, 초정공 박응선, 죽포공 박기종 선 생 등 무 안 박 씨 6 현 (賢 )을 모 시 고 음 력 9 월1일향사를이어온묘우(廟宇)이다. 병 산 서 원 은 정조 무술년(17 78) 태조를 도 와 훈 업 을 이 루 어 보국숭록대 부 영중추부사 에 오 르 고 단 서 철 권 ( 丹 書 鐵 拳 ) 을 하 사 받 은 후 벼슬을 사 양하고 낙향하 여 후학교육에 힘써온 풍정공 박의룡을 제향하기 위해 창사하였고 1829년(순조29년)에 애한 정 박익경(1438~1520), 암천공 박증(14 61~1517), 초정 박응선(1575~1636)을 추배하였다. 1868년(고종5년)의 서원 철폐령에 의해 훼철된 후 1891년(고종2 8년)에 유지에 입비하여 제공의 유덕을 기렸다. 그 후 1918년 후손들이 설단하 여 제향하다가 1946년에 공론으로 현 위 치에 복설하였으며 1965년에 죽포 박기 종을 추배하였고, 1987년 현 위치에서 약간 남쪽으로 터를 잡아 한식과 양식을 겸한 철조 콘크리트 건물로 이건하였으 며,그해 8월 회일(晦日,그믐날)에 은청 광록대부 상주국영동평장사이고 면성 부원군에 봉해진 문정공 박문오를 주벽 으로 추향(追饗)하여 향중 유림이 음 9 월1일향사한다. 서 원 은 창 건 당 시 건 물 은 사 우 (祠 宇 ) 3칸, 내삼문 3칸, 강당(察倫堂) 5칸, 외 삼문 3칸,부속건물 4칸으로 구성되었으 며, 현재는 한옥 모형의 콘크리트 건물 로 사 우 정 면 3 칸 , 측 면 1 칸 의 맞 배 지 붕 이며 외문문 3칸이며, 경내에 병산사 유 허비가있다. 강당인 찰륜당은 정면5칸 측면2칸의 팔작지붕으로 장소를 옮겨 경기묘 앞에 지어졌으며, 경기묘 및 병산사 제향 때 제관 분정 등 재숙소로 활용되고, 명사 초정 강의 등으로 서원의 본래 기능인 강학의공간이다. 병산사의 제수는 주로 생식(生食)으 로 4변 4두이다. 보와 궤는 각각 1개로 변과 두 사이에 놓는다.주요 제수는 제1 행에 율황(밤), 건조(말린 대추 또는 은 행), 시성(돼지생고기), 근저(미나리), 총저(부추), 제2행에는 청리(배), 녹포 (사슴포), 보도(벼·쌀), 궤서(기장) 녹 해(사슴고기로 담은 젓), 청저(무)를 놓 는다. 작(爵)은 3개로 봉사자가 보았을 때 맨 앞 에 놓 고 다 음 은 폐 광 (幣 筐 , 폐 백 을 담는 광주리)을 가운데 놓고 양 옆으 로촛불을밝힌다. 제기는 주희의 제례도감,석채례에 따 르고 있으며, 변, 두, 보, 궤, 조, 비, 작, 용작,멱,점,준,탁을 사용하는데 ‘변’은 죽변이라고 하는데,죽변은 대나무로 잘 게 쪼개 그 겉대로 만들었으며, 이 제기 는 양기(陽器)라 하여 생과실(生果實) 과 열 두 가 지 의 물 기 가 없 는 마 른 제 수 를 담아 제상의 동쪽(집사의 오른쪽)에 올리는 제기이다. 병산사에서는 황율 (밤), 청이(배), 녹포(육포), 건율(대 추)을담아진설한다. ‘두’는 목두라고도 한다. 나무로 다듬 어서 옻칠을 입혀 만들었으며, 목두는 음기(陰器)로 음에 속하는 물기 있는 열 두 가지의 음식을 담아 제사의 서쪽(집 사의 왼쪽)에 올리는 제기이며, 여기에 서는 녹해(소 간), 청저(무우), 근저(미 나리),총저(부추)등을담는다. ‘보’는 는 유제로 만들며 덮개가 있다. 보는 음기로서 지방(地方)즉 땅은 네모 지다의 뜻을 담아 그 모양이 사각형으로 만들어졌다. 보는 중사(中祀) 이상 제사 (1 0 변 1 0 두 )에 서 는 신 주 한 위 당 한 쌍 의 보에 쌀(도미)3승 5합과 양미(찰 수수) 3승 5합을 담아 진설하는데 서원은 소사 (小祀,4변 4두)에 해당하여 병산사에서 는 쌀(도미) 한 가지를 담아 변과 두 사 이궤옆에진설한다. ‘궤’는 유제로 만들며 덮개가 있다. 궤 는 양기로서 천원(天圓=둥근 하늘)의 뜻을 담아 그 모양이 둥글게 만들어졌으 며 , 서 ( 黍 ) 즉 기 장 또 는 조 를 담 아 두 옆 (보옆)에진설한다. ‘조’는 예기에 이르면 도마로 쓰이다 가 점 차 제 물 을 바 치 는 반 의 역 할 을 하 게 되었으며,소,양,돼지의 생육을 올리 는데 병산사에서는 돼지고기를 놓는데 2열가운데놓는다. ‘비’는 대나무를 잘게 쪼개서 겉대로 만들며 폐백을 담는다. 용작은 술을 따 르는 도구이고, 멱은 술통을 덮는 덮개, 점은 술잔을 놓는 받침대, 준(尊)은 술 을 담는 그릇인데 ‘산뢰’라 한다. 이밖에 향합,향로,축판등이사용된다. △문정공박문오 문정공은 밀직부사 부( )의 3남 3 녀 중 차남으로 1258년 태어났다. 호는 면남(綿南), 시호는 문정(文靖)으로 무 안박씨 관향조 휘 진승의 6대손으로 대 대로 이어오는 명문세가에서 태어나 어 려서부터 영명(英明)하여 후일 크게 쓰 일재목으로촉망받았다. 충렬왕 때에 충량과(忠良科븡문과)에 급제하여 조정에 나아갔다.고려후기 몽 고(元나라)의 침략을 받아 고종이 강화 도에 천도하여 40여 년 간 항쟁하였으나 강화도를 제외한 전 국토가 유린당하고 항쟁에 실패하여 몽고와 강화한 이후 개 경으로 환궁하나 몽고의 간섭을 받는 속 국이 되었다. 몽고는 무리한 공물을 요 구하고 공녀를 바치는 수모와 수탈의 역 사가 시작되어 나라가 궁색하고 피폐해 갔다. 왕은 몽고의 황녀와 혼인시켜 부 마국이 되었으며,왕들이 몽고에 충성하 라는 뜻에서 왕명에 충(忠)자를 쓰게 하 는 등 고려국은 자주국가로서 지위를 잃 어가고 있을 때 공은 조정에 나가 혼신 의 정성을 다해 공정함과 임금을 충성스 럽기 보좌하여 문하시랑동중서문하평 장사(門下侍郞同中書門下平章事)이 이 르렀으며,누란의 위기에서 사직을 안정 시켰다고 인정되어 안사공신(安社功 臣)에 오르고 면성군(綿城君)으로 공신 호(功臣號)를 받았다. 후일 면성부원군 (綿城府院君)에추봉되었다. 만년에 무안으로 퇴거하여서는 정자 를 지어 편액(扁額)을 유산정(遊山亭) 이라 하고 정자 밑에 연못을 파서 생선 지(生鮮地)라 이름 짓고 한가로이 여생 을 보냈는데 유산정 아래 면남정사(綿 南精舍)를 지어 송시독서(誦詩讀書)하 며후진양성에더욱심혈을기울였다. △풍정공박의룡 공은 면성부원군의 증손자로 고려 충 숙왕 17년 1330년에 태어났다. 자품이 영수(英秀)하고 기량이 크고 원대하였 으며 경서(經書)와 사기에 밝으며 지략 (智略)이 특출하니 당시의 여론이 임금 을 보 좌 할 수 있 는 큰 재 목 이 라 일 컬 었 다. 고려 공민왕 때 문과에 급제하여 서 기 1388년(우왕12년)에 의주목사가 되 었다.역성혁명으로 조선을 개국한 태조 이성계와는 포의지교(布衣之交)인 옛 친구로서 개국하는데 공을 세워 개국정 사충갈성(開國定社輸忠竭誠) 입공정책 (入空定策) 공신록에 등록되고 공신록 권(功臣錄卷)을 받았다. 호는 풍정(楓亭)이며 벼슬은 호조(戶 曹) 병조(兵曹) 형조(刑曹) 삼판서(三 判書)를 역임하시고 이어 영중추부사 (領中樞府事)를 끝으로 관직에서 물러 나셨다.특별히 태조가 친필로 개국정사 수충입공(開國定社輸忠入功)이란 여덟 자를 써서 하사 하였다. 만년에 증조부 면성군(綿城君)의 유촉지인 무안의 유 산정(遊山亭)과 생선지(生鮮池)에서 고기 노는 것을 보면서 그 절개를 사랑 하는 시구(詩句)를 음영(吟詠)하며 사 시다가 고종명(考終命)하셨다. 묘소는 나주흑룡동에있다하나실전이다. 서기 1778년 정조 무술(戊戌)에 많은 선비들이 사당을 세우고 병산사(柄山 祠)라 편액(扁額)하여 향사(亨祀)한다. 왕조실록을 살펴보면 개국공신록에 등 록된 박의룡(朴義龍)등 39인에게 단서 철권(丹書鐵券)을 하사하고 대대로 국 록을 받게 하고 죄를 지으면 용서해주고 병이 들면 의원과 약을 보내어 구호해 주고 사망하면 빈소에 필히 가서 깊이 위로해주고 부의도 특별히 후이 하여 장 례까지 하라 하였고 당대(當代) 임금이 지난 뒤에도 다 후손에게로 계승하라 하 였다. 배위(配位)는 정경부인(貞敬夫 人)함창김씨(咸昌金氏)이다. △애한정박익경 공의 휘는 익경(益卿)으로 자(字)는 필보(弼甫) 호(號)는 애한정(愛閒亭) 이다. 1438년(세종 20, 戊午) 서울 집에 서 태어났다. 천성과 행실이 독실하여 부모를 봉양하되 뜻을 더 받들고, 일찍 이 문장이 탁월하였으며, 경학(經學)에 뛰어나니 한 시대의 명현들이 우러러보 지 않은 이가 없었다. 단종 때에 효행으 로 정릉참봉에 제수 받았다. 취죽헌 박 팽년, 매죽헌 성삼문, 총관 유응부 등과 도의지교를 맺었고,사육신의 절의를 칭 송하는 시를 익산 동헌에 남겼던 상국 (相國) 이석형(李石亨, 1415~1477), 조 선 세 종 때 신 흥 왕 조 의 기 틀 을 잡 고 문 풍을 일으키는 데 크게 기여한 조선 초 기의 문신 사가정(四佳亭) 서거정(徐居 正) 등 제현(諸賢)들과 지우(志友)를 삼아 경국제세(經國濟世)의 포부를 키 웠다. 그러나 1456년 6월 사육신사건이 일어나고, 사육신과 도모하던 단종복위 공작이 실패하자 불의(不義)한 세상을 등지고 홀연히 낙남하였다.구전으로 전 하는 유응부선생의 만사(輓兪摠管 詩) 에서 ‘나라의 대들보가 무너져 가니 흔 들리는 내 마음을 어떻게 가누리(公生 社稷重 公死社稷輕 頹波大柱去 撓撓我 心旌)’라 하였으니 편린(片鱗,한조각의 비늘)으로도 선생의 심중(心中)을 헤아 리기에충분하다. 낙향하여 고절리에 복거(伏居)하면 서 선조의 유산정(遊山亭)을 보수하여 다시 선업(先業)을 이으며 정(亭)사와 선지(鮮池)에 나아가 소요자적(逍遙自 適)하고, 마을에 애한정(愛閒亭)을 새 로 짓고 향리의 자제들과 경서(經書)의 뜻을 강의하며 닦았다. 정기(亭記)에 뷺아침에는 해 뜨는 것에서 한가롭고 저 녁이면 달뜨는 것에서 한가로우며,봄에 는 꽃을 보며 한가롭고 겨울에는 눈을 보며 한가로우며, 거문고를 타면서 그 흥취를 사랑하고 낚시를 드리운 채 그 자적(自適)을 사랑하며,다닐 때는 시를 읊고 누워서는 책을 보며, 높은 곳에 올 라 먼 곳을 조망하고 물가에 다다라 노 니는 물고기를 구경하는 등 어떠한 경우 이건 모두 한가로우니(旭朝月夕에 閒 하고 春花冬雪에 閒하고 琴釣에 閒하고 吟詩看書叫에 閒하고 登高望臨水觀魚 에도 閒) 하였다.뷻라고 하였으니 가슴에 품은 비군(悲君븡단종)의 정(情)과 육신 ( 六 臣 )에 대 한 한 (恨 ) 을 숨 기 고 겉 으 로 는 신선처럼 은자(隱者)의 넉넉한 생애 (生涯)를 보냈다. 이는 아마도 난세(亂 世)를 보내는 삶의 지혜를 발휘하였으 리라, 그러던 어느 날 종자(從子) 정간 공(貞簡公) 호(壕)가 완산백(完山伯) 으로 본향(本鄕)을 순행(巡行)차 숙부 를 만나러 이 마을을 찾아왔다. 현달(顯 達)한 조카를 만나고 싶은 마음이야 없 었으랴만 의리를 들어 군(君)은 당조귀 인(當朝貴人)이요 나(我)는 퇴향미종 (退鄕微팍)이니 출처(出處)가 부동(不 同)이라 뷺그대는 조정의 고관으로 있고 나는 멀리 떨어진 시골에 사는 미천한 사람이니 출처가 같지 않다.뷻라고 하고 는 끝내 만나지 않았으니 불의(不義)한 조 정 에 대 한 분 노 (忿 怒 ) 가 어 느 정 도 였 으면 그렇게 했으리오. 선생의 높은 절 의와 지조(志操)에 탄복(歎服)한 당시 의 사람들이 마을 이름을 절개가 높다는 고절리(高節里)라고 부르게 되어 오늘 날에 이른다. 세조로부터 여러 차례 부 름이 있었으나 고사(固辭)하였고, 단종 의 원사(寃死)와 동지들의 참사(慘死) 에 한(限)없는 추모의 생각을 지녔던 충 절의 선생이 있었기에 그러한 마을 이름 이붙여졌으리라짐작해본다. 1520년(중종15븡庚辰)에 돌아가시니 향수(享壽) 83세이요, 이조참판에 추증 되고, 1829년(순조29븡己丑) 병산사에 배향되었다. △암천공박증 공의 휘는 증(增), 자(字)는 익지(益 之) 호(號)는 암천(巖川)으로 1461년 (세조7)에 서울 대정동에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영리하고 풍채가 뛰어나 강 희안(1417~1464, 조선 초기의 문신·서 화가)도 암천의 자품이 비범함을 칭찬 했다고 한다. 5~6세부터 이미 시비에 곱 고 바 른 것 을 판 단 할 줄 알 아 마 치 엄 정 하고 노숙한 대인(大人) 장자(長者)와 같으므로 모든 사람들이 박씨 집안의 기 린(麒麟븡성인이 이 세상에 나올 징조로 나타난다고 하는 상상 속의 짐승)이라 고자자하게칭송했다. 부친에게 소학 중 븮효제충신(孝悌忠 信) 예의염치(禮義廉恥)븯 등을 배울 때 선생은 “효도란 자식의 도리이며 충성 은 신하의 직분인데 어찌하여 자식이 불 효하고 신하가 불충합니까?”하고 질문 했다. 이에 부친은 “사람들이 혹 미련하 고 어리석어 착한 본성을 잃었기 때문이 다.그래서 성현들은 가르치는데 반드시 선(善)으로 인도하여 간사한테 빠지지 않게한다.”라고대답했다. 선 생 은 부 친 의 이 말 을 죽 을 때 까 지 새겨두고 실천하려 노력했다.또한 삼각 산에서 글공부 하던 중 선생은 매월당 김시습과 유숙하며 대학 븮명덕지선장 (明德至善章)븯의 성의(誠意), 정심(正 心), 수신(修身), 제가(齊家)의 조목에 대해 강의했다. 김시습이 “아 참으로 성 인의 말씀이로다!”하고 감탄하니, 선생 은 “격물치지(格物致知,모든 사물의 이 치를 끝까지 파고들어 앎에 이름)가 아 니면 어찌 지선(至善)에 이르며 성의 정 심이 아니면 어찌 수신제가를 말할 수 있겠습니까. 오직 나의 선(善)을 밝히는 공부에만 힘쓸 뿐입니다.”했다. 김시습 은 “그대가 어린 나이에 소견이 이러하 니 성취가 한량없을 것이다.”하고 의관 을 정제하고 밤새 마주했다고 하였다. 그는 사서(四書)를 읽으면서 깊고 어려 운 뜻을 반복하며 연구하고 주역과 춘추 를 즐 겨 읽 었 다 . 강유괘상(剛柔븡굳셈과 부드러움 卦象 븡길흉이 나타나는 모양)의 뜻과 천인 (天人) 성명(性命)의 깊은 뜻을 연구하 고 정삭(正朔)을 높이고 대일통(大一 統)의 의리를 미루어 밝혔다. 이러한 사 실로 볼 때 선생의 학식이 얼마나 깊었 는가를대력짐작할수있다. 어떤 사람이 과거시험을 보라고 권하 자 선 생 은 그 저 웃 기 만 할 뿐 대 답 하 지 않았다. 이미 관직에 뜻이 없었기 때문 이었다. 외조부인 성삼문이 병자년에 화를 당 해 돌아가시자 사위인 선생의 부친은 사 육신의 시신을 거두어 서호(西湖)·노량 진(露梁津)에 매장한 뒤에 두문불출 하 였다. 그 뒤 화병(火病)을 얻어 1480년 경에 돌아가셨으며,어머니는 시집온 지 1~2년 만에 친정아버지를 여의고 친정 어머니가 노비로 끌려가는 등 친정이 몰 락하자 눈물로 일생을 마쳤다. 상을 당 해서는 상중의 제례가 법도에 어긋나는 일이 없었다. 삼년상을 마친 뒤에 강호 에 묻힐 생각으로 전국을 배회하다가 계 룡산 근처 노성(魯城)의 동쪽 바우내로 와서은거하였다. 강호 자연과 함께한 선생은 말년에 자 손들에게 유훈(遺訓)하기를 “나는 이미 버림받은 사람이 되었다. 우리 큰집의 경우 조카가 제사를 주관 할 것이며 외 조부 성삼문공의 경우 참찬(參贊) 호 (壕)가 주관했는데 아직도 후사가 없으 니 훗날 일은 응당 너희들에게 달려 있 다.너희들은 유념하여 외할아버지의 제 사를 끊어지지 않도록 하라. 뜻을 지킴 에는 충정(忠貞)으로 업을 삼을 것이며 벼슬에는 무릅쓰고 나아가는 것을 경계 하라.”했다. 선생은 일생을 처사로 살다가 1517년 (중종12) 세상을 떴다. 선생의 부인 재 령정씨는 선생보다 아홉 살 아래였는데, 가시비녀에 베옷을 걸치고 가난한 살림 에도 아무런 불평이 없었다. 그때 사람 들이 양홍(梁鴻)의 아내 맹광(孟光)의 부덕에비유했다. 선생의 유훈으로 후손들은 성삼문에 대한 봉사(奉祀)를 게을리 하지 않았으 며 선생의 7대손까지 200여 년 동안 지 속되었다고한다. 1622년(광해14) 통정대부 형조참의 에 추증되고,5년 뒤인 1627년(인조5)에 는 가선대부 호조참판 겸 동지의금부사 에 추증되었다. 또한 1805년(순조5)에 지역의 유림들이 이웃한 띠올에 모곡서 원을 창건하고 암천 박증 선생을 주벽으 로 모셨고, 이후 연산 충곡서원과 무안 병산서원에각각배향되었다. △초정박응선 공의 휘는 응선(應善), 字는 이길(而 吉)이고 아버지는 남촌(南村) 휘 린 (璘)으로 증 이조판서이고,어머니는 정 부인 파평윤씨이니 공은 만력 을해 1575 년 12월 16일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뛰 어난 재지(才智)가 있고,지조와 아량이 있으며, 독서를 좋아했다. 지퇴당(知退 堂) 이정향(李廷饗)에게 수업하였다. 개 연 히 도 (道 ) 를 탐 구 할 뜻 이 있 어 학 업에 진력하였으나 임진란을 당하여 아 버지 남촌공이 선조임금을 모시고 서행 (西行)하였으므로 공이 백모 이씨부인 과 계비 심씨부인을 모시고 춘천으로 피 난하였다.비록 경황중이나 배움을 게을 리 하지 않으니 훌륭한 이름이 날로 들 어났다. 한백겸(조선 중기의 문신), 정 경세(예조판서, 이조판서, 대제학 등을 역임한 문신)와는 동배(同輩)간으로 교 유하였다. 정사년 무오년간(戊午史禍) 에 임금의 폭정으로 정사가 문란하므로 과거의 뜻 버리고, 스스로 호를 양기옹 (兩棄翁)이라 하였으니 대개 혼탁한 정 국에물들지않는다는뜻이다. 인조반정으로 현량지사를 선출함에 강학년,조경응 등의 천거로 은진현감에 제수되었다. 관(官)에 도임한 후 학풍 일으킴을 자기 임무와 같이 하여 학교 유생들로 하여금 삭망에 강송토록 하되 격식이 심히 엄하니 사람들이 자못 괴롭 게 여기더니 병인년(1626년) 호패법이 시행함에 유생으로서 강을 못한 자는 역 군(役軍) 명부에 서명하게 되었다. 그러 나 은진만은 홀로 면케 되니 이제야 사 람들이 감복하였다. 정묘년에 달노(達 奴,키르기스 소멸 이후, 몽골 서북쪽으 로 나아가 유연의 일부 세력, 거란의 일 부 세력, 옛 정령 세력 등이 통합되어 새 로운 부족)가 동에서 창궐함에 공이 군 량을 운조하였는데 아전이 아무 연유 없 이 공을 모함하여 행재소에 투서하였는 데 왕 이 불 에 태 우 라 했 다 . 난 이 조 금 진 정되니공이돌아왔다. 1629년 호조좌랑이 되었다가 정랑으 로 올랐다. 때에 대간(臺諫)이 품계하기 를 삼 조 (三 曹 )에 급 제 를 못 하 고 전 랑 (銓郞)이 된 자는 체직(遞職)한다 하였 으나 공에게는 미치지 않았다. 그러나 공은 욕되게 생각하여 사직하고 순창현 감에 제수되었다. 1년이 못되어 다시 호 조좌랑이 되었으니 그때의 체직되었던 것은 죄가 아니다. 삭녕 군수로 나갔다 가 1635년(乙亥)에 군자판관을 거쳐 단 양군수에 옮겼다.겨울에 병으로 사직하 고 돌아와 병자년(1636년) 3월 16일에 하세하니향년이62세이다. △죽포공박기종 공의 휘는 기종(淇鍾), 자(字)는 공진 (公振)으로 애한정공의 12세손으로 아 버지는 증 감찰 휘 혁수(赫修)이고 어머 니 여산송씨 사이에서 갑신년(1824년) 태어났다. 천성이 총명하여 8세 때부터 밖에 유 학하여 문리가 통달하였고,효경과 소학 읽기를 좋아했으니 어린이의 모든 범절 과 어버이를 사랑하고 어른을 존경하는 도리는 흡사 성인과 다름이 없었다. 13 세에 예기와 춘추를 통달했고,감찰공이 더욱 경술(經術)을 권장했으므로 호남 의 선비들이 누구도 얕보는 이가 없었 다. 무신년(1848년)에 외간(아버지 상) 을 당하니 슬픈 형용 말할 수 없었고, 이 어서 또 모부인 병환이 위독하거늘 손가 락 피를 흘려 넣어 며칠을 더 연명토록 했으며, 항상 끝까지 봉향하지 못함을 슬 피 여 겨 사 람 들 과 말 할 때 는 웃 는 빛 을 짓 지 않 고 별 다 른 음 식 을 대 하 면 양 친을 생각해서 눈물을 흘리며 입에 드리 지 못하였다. 탈상한 뒤로는 매산(梅山) 홍직필(洪直弼) 문하에서 수학하니 매 산이남방의큰선비로인정하였다. 철종 신유년(1861년) 문과에 발탁되 어 가조서로부터 권지 승문원 부정자를 지냈고, 임술년(1862년) 조경묘 별점, 당저, 갑자년(1864, 고종1)에 성균관 전 적, 사간원 정언을 지냈고, 을축년(1865 년) 특별한 은전을 입어 명성이 크게 날 렸다. 공의 발탁됨을 시기하여 글을 올 려 항변하는 이가 있었으나 사헌부 지 평,이조정랑에 연임되었고,정묘년(186 7년) 대동찰방이 되어서 관리에게는 엄 하게,사졸에게는 관대하게 하며 우편제 도를 소생시키니 직지 이유승과 감사 한 계원이 연유로 장계하였고,임기가 차니 역민들이비석을세워칭송했다. 계유년(1873년) 성균관 직강, 사헌부 장령을 지냈고, 갑술년(1874년) 국가와 민족을 위하여 당장 시급한 폐단을 상소 하는 한편 또 과거의 폐단인 요행수를 막도록글릉올렸다. 경진년(1880년) 직강이 되었고, 임오 년(1882년) 군란 때 대궐에 입시하여 사 리를 편론함이 극히 공평하였으므로 동 료들의 눈이 집중되었다. 또 육사를 아 뢰었으니 성학을 밝히고,기강을 바로잡 고, 재물을 절용하고, 군정을 확립하고, 교통을 원활히 하는 법 등이었고, 사간 원 헌납, 병조좌랑에 임명되었다. 계미 년(1883년)에 세자궁을 모시어 강학하 는 법규를 정했고, 갑신정변 때 국세가 흔들리거늘 글을 올려 ‘군자를 가까이 하고 소인을 물리치며 절약과 검소함을 숭상하고 사치를 버리라’했으니 말마다 절실해서 모두가 간과 폐장에서 우러러 나오는것이었다. 병술년(1886년) 봉상시 판관으로 동 서에 청덕비가 세워졌고, 다시 직강이 되었다. 무자년(1888년) 사간원 사간, 통례원 우통례, 기축년(1889년) 벼슬을 사직하고 남으로 돌아갈 때 김 상공이 전송하며 “사간군의 일편단심은 말 못 할 근심이 서렸으니 만류하지 못할 것이 다.”그 뒤로 자취를 밭고랑에 묻고 날로 자세와 수재들을 데리고 서적으로 소일 했다. 갑오년 동학란 때 여러 고을이 물 들거늘 공은 의연한 자세로 본 고을 군 수와 방어할 대책을 확립하니 일경이 무 사했다. 무술년(1898년) 정월 6일에 고 종하니 향년 75세이다. /박상섭 편집국장 (parkss1012@hanmail.net) 뱚서원탐방 병산서원(병산사) <전남무안군 무안읍 고절리 1042번지 (상봉마을)> 뱚서원의연혁 병산사유허비 병산사전경 뱚서원의규모 병산사사우(祠宇) 뱚진설및제기 진설도 제기도설 뱚배향인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