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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12월31일 목요일 6 (제168호) 종합 기대와 달리 차량 네비게이션은 전북 익산시 신동의 낡고 허름한연립주택으로안내되었다.미리전화를해서인지박윤 엽 현종은 환환 미소로 맞이하여 따라간 17평형의 비좁은 집 에는 냉기만 흐른다. 두 부부가 거주하는 곳으로 난방을 하지 않고전기장판을이용하고있었다. 의아해하는모습이역력해서인지평생자동차가없었고,넓 은 집은 사치라며 검소함이 몸에 배어서인지 전혀 불편한 것 이 없단다.평소의 삶을 엿볼 수 있어 편안한 마음으로 인터뷰 를진행했다. 박윤엽 현종은 함양박씨 2파 25세(世)로 일제강점기인 193 8년 전북 임실군 청웅면의 빈농에서 유복자로 태어났다.태어 나기 3개월 전에 아버지가 돌아가셔 아버지 얼굴을 보지 못했 다.청상의편모슬하에뼈저리게어려운가정에서성장하면서 일년내돼지고기먹기란추석명절때나먹을정도였다.동네 에서 어쩌다 돼지를 잡으면 돼지 삶은 물을 얻어먹으려고 염 치불구하고 기웃거리다가 다행이 한 그릇 얻어먹으면 그 맛 은지금무엇에도비교할수없을만큼맛있었단다. “정말 피죽도 못 먹는 가난 속에 악착같이 살았다.”는 말을 이 해 할 수 있 다 . 초 등 학 교 를 졸 업 하 고 6 ·2 5 사 변 후 수 복 지 구 의 와중에서 중학교 진학을 못하고 고등학교 다닐 나이에 중 학교에 입학했던 처지는 이루 말로 표현하기 어려울 지경이 었다. 가구점 점원으로 야간대학을 졸업하기까지 한 달에 1만원 받아 부족한 등록금은 주인이 가끔 보충해주어 어렵게 대학 을 마치면서 한(恨)으로 남은 것은 “나처럼 형편이 어려워 제 때에공부하지못한학생들에게힘이되어줄사람이되겠다.” 고다짐하고또다짐했단다. 1966년 고향 학암국민학교에첫발령을받아교직자의길을 걸은 박윤엽 현종은 30여년의 교직생활동안 오직 학생들만 생각했지만 부인과 함께 3남 2녀의 가장으로의 삶은 고달프 기만했다. 밤을 낮 삼아 일을 해야 했다.엽연초(담배)농사를 짓고 누 에치기를 하면서 돼지를 길러 새끼를 낳으면 시장에 내다 팔 아 소를 사고, 논을 사 밭 포함 1만8천여평( 90마지기)의 전답 을 모 으 면 서 어 느 정 도 가 난 을 벗 을 수 있 었 다 . 그러나 교사로서 학생들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교직 생활동안 따라다니는 수식어가 있다. ‘우산선생님’, ‘자전거 수리공’,‘이발사’등이다. 1977년 임실 동중학교 재직 때의 일이다. 시골 형편상 통학 하는 학생들이 멀리는 수 km를 걸어 다니는데 아침에 화창하 다 오 후 에 돌 변 하 여 방 과 후 에 는 꼼 짝 없 이 비 를 맞 을 수 밖 에 없어비닐을구입한마씩끊어나누어주었다. 그러다 생각해 낸 것이 뒷산에 풍부한 싸리나무를 베어다 빗자루를 만들어 팔아 우산을 구입하는 것이었다.700여 자루 의 빗자루를 전주시내 학교에 지인 선생님을 통해 팔아 60여 개의 우산을 구입 학생들에게 빌려주면서 ‘우산 선생님’으로 불러지고 이후 학교를 옮길 때마다 우산을 구입하여 빌려주 는 일은 일상이 되었으며 학생들이 타고 온 자전거 수리와 머 리를깎아주는일은다반사였다. 그리고 학생지도에서도 탁월했다. 담임을 맡아 9시 이전과 야간자율학습 지도, 어려운 학생의 학비 지원 등을 통해 학생 들의 면학분위기 조성은 지역의 우수한 인재를 키워내는데 일조했다. 지역 명문고의 수석합격을 배출하면서 ‘한국교육 자대상’,‘오늘의스승’상등이이어졌다. 박윤엽 현종은 1965년 3월 육군에서 만기제대 후 고향 임실 군 청웅면 학암리에 돌아와 가난 때문에 진학하지 못한 아이 들을 데려다 야학을 열었다. 먹고살기도 힘든 마당에 공부를 가르쳐 뭐하냐는 어른들을 설득하며 손수 셋 칸짜리 흙집을 지어 야학을 개설하여 주변 지인들의 도움으로 헌 교과서를 구입 많은 학생들을 가르쳤다. 그리고 정식교사로 교단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며 가난 때문에 중도에 학업을 포기하는 학 생들을보아왔다. 1995년 교직에 있으면서 함양박씨 익산시 종친회장을 맡아 그해 11월 다섯 명의 학생을 추천받아 중·고등학생은 1인당 2 0만원,대학생은 40만원의 장학금 전달했다.장학금을 전달하 면서 어렵게 공부했던 지난 일을 회상하며 눈물을 흘렸단다. 장학금 지급대상은 주로 종친자녀를 대상으로 하였고, 96년 부터는일반인가정의학생도소수포함시켰다. 2006년부터는 함양박씨의 존재감을 부각시키기 위해 매년 달력을 제작하여 나누어 주면서 상급종친회에 참석하여 장학 회 설립을 주창하였다. 그러나 누구 하나 귀를 기울인 사람이 없었다.이에지난2019년 달력에는 장학금 1천만 원을 전달하 겠다며 달력 하단에 공고하기에 이르러 금년 5명의 학생이 신 청을하여장학금을전달했다. 장학금 전달 후 내년에는 더 많은 학생들이 혜택을 받을 수 있도록 신청을 하여줄 것을 간곡히 호소하기에 이른다. 이렇 듯 장학금 지급에 혼신의 힘을 다하는 데는 본인 스스로 어려 운환경에서공부했기때문이다. 17평의 낡은 집에서 난방을 켜지 않는 검소한 삶속에서 피 어나는 장학 사업은 어느 무엇보다도 더 화려한 찬사가 이어 질 것 같다. 교직에 있으면서도 부부가 피나는 노력으로 부를 일구었고, 여기에 조성된 태양광 사업에서 연 3천만원 정도 수익이 발생해 최소한의 생활비만 지출하고 전액 장학 사업 에 활용하려고 한다는 박윤엽 현종의 큰 뜻에 찬사를 보내지 않을수없다. 일상생활에서고아와한자녀가정,독거노인은사회적관심 사항이다. ‘가난은 나랏님도 구제하지 못한다.’는 말이 있다. 하지만 박윤엽 현종은 이들을 돕기 위해 결연을 맺어 꾸준히 보살피고 있다. 그리고 고향 청웅면의 불우이웃과 거주하고 있는익산시의소외계층을찾아쌀과라면등을전달해왔다. 아무런수입도없고자식이없는독거노인들은명절이되어 도 굴비 한 마리 못 먹을 것이며 고기란 맛이나 보겠는가 싶어 어려운 내 고향 노인들이 생각이 나서 고향 친구에게 청웅면 의 독거노인 현황을 알려 달라 부탁하여 명절 때 나누어 드리 기도한다. 박윤엽 현종 문중의 사우 추모사(追慕祠)에 들어서면 적선 지가 필유여경(積善之家必有餘慶)의 표구가 눈에 띤다. 독거 노인이 고맙다며 직접 써준 것으로 이후부터 더욱더 신경을 쓰고있다고말한다. 박윤엽현종은지금도학업을중도에포기해야하는학생들 을 볼 때 면 남 의 일 같 지 않 다 고 한 다 . 그 만 큼 학 업 은 우 리 인 생에 있어 제일 큰 문제인데 훌륭하게 성장해야 할 학생의 꿈 이 좌절된다면 이는 재앙이라고도 한다. 이에 장학생 선발 기 준이 첫 번째 재산세 납부기준이고,두 번째가 성적이다.그리 고 금년에는 1천만 원을 주었지만 내년에는 2천만 원이 목표 라며 대종회 차원의 장학회 규정을 만들어 중단 없이 장학금 전달이이루어지길간절히소망하고있다. 박 윤 엽 현 종 은 지 난 달 말 편지 한 통을 받았다. 이화여자대학교 3학년에 재학 중인 박수진 양이 다. 지난 추향 때 장학금 을 받은 학생으로 함양박 씨를 빛낼 수 있도록 다 짐한다는 내용이다. 이처 럼 장학금을 받은 학생들 은 가끔 편지를 보내 감 사함을 전달하고 있다. 특히 종중에서 전달하는 장학금은 뿌리를 알 수 있는 계기가 되고 있어 남다르다. 평생 교직에 몸담아 인재 육성에 헌신한 박 윤엽 현종은 지 금도 어려운 시절 학생들과 동고동락하면서 함께 했던 일을 잊지 못한다.특히 야간 자율학습시간 큰 통에 라면을 끓여 수 개월 동안 먹여가며 입시를 준비했던 일은 지금도 생생해 제 자들은 선생님에 대한 고마움을 사은비 건립으로 이어졌다. 지난 2017년 5월 스승의 날을 기념하여 세운 사은비 비문을 옮겨보면서 박윤엽 현종의 큰 뜻이 파동이 되어 종친사회와 더나아가우리사회가아름답고따뜻한세모(歲暮)가되길기 대해본다. 박윤엽 선생님은 함양박씨 문원공의 후예로 1938년 2월 23 일 출생하시어 가구점 점원으로 경기대학교를 졸업하시고 군산 남중학교에 89, 90, 91, 92년 3학년 담임하시면서 야간 자율학습 저녁에 매일 라면을 끓여서 두 달간 찬밥을 먹지 않 게 보살펴 주셨고, 종례시간에 비오는 날 우산을 빌려주셨으 며, 자전거 통학생들을 위하여 부속 품을 사다 놓고 수리하여 주셨고, 어 려운 학생들 수업료를 내주셨으며, 교단수기 수상록을 출판하셨고, 교 실출입문, 교탁, 화장실 수리하는 등 제자 사랑과 정성을 다 하셨기에 교 육부 장관의 ‘고마운 스승상’과 한국 교육자 대상, 문화방송 봉사대상, 종 친회장을 역임하신 참 스승이기에 이 를 기리기 위해 은사님을 잊지 못하 는 제자들의 마음을 모아 사은비를 세워드립니다. (글쓴이 이성우 서울달려 라병원장) /박상섭 편집국장 parkss1012@hanma il.net 뱚종친탐방 장학사업을평생의업으로살아온박윤엽현종 박윤엽 현종이 지난 11월 15일 함양박씨 영명재에서 장학금을 전달하고 있다. 박윤엽 현종이 서재에서 고마우신 선생님 수기공 모집을 꺼내어 보이고 있다. 1995년첫장학금을주던날 종친회원로분과 장학생들이 함께하고있 다. 달력하단에장학생추천공고를하고있다. 장학금을 받은 박수진 학생이 고마움 을편지로 보내어훗날을다짐한다. 지난11월15일함양박씨영명재에서는첫장학 금전달식이있었다.5명의대학생에게1천만원 의장학금이전달된것이다.장학금은박윤엽현 종의 개인 장학금으로 언뜻 보아도 촌로(村老) 의이미지가 풍겼다.당일은 속함대군과 상서공 의제향을봉행하고총회를갖는뒤끝이라어수 선 하기만 하여다음에 찾아뵙겠노라 인사하고 지난10일익산의자택으로찾아가보았다. 뱚▶장학사업은평생의업(業) 뱚▶나눔과봉사는기쁨을준다 뱚▶뷺장학금수혜자가더늘었으면 븣 뷻 뱚▶장학금수혜자의아름다운답장 학산박윤엽선생사은비 경북 경산시 진량읍 다문·대원·당리·속초리 등에 큰 집성촌을 이 루고 있는 참판공 후 요산공 문중의 시향이 지난 달 24일(음10.10) 부터29일까지각처(各處)에서봉행되었다. ▲ 24일 시향에는 입향조인 요산공의 향사를 본보 박방무 명예기 자의집례로재균종친회장이초헌관으로헌작하고이어정두,병환 현종이 각각 헌작하고 창균 총무의 독축으로 봉행되었다. 경산문중 의 입향조의 휘(諱,이름)는 운달(雲達) 호(號)는 요산(樂山)이다. 고려 사헌부 규정을 지낸 휘 현(鉉,규정공파 파조)의 8세(世)로 조 부의 휘는 근손(根孫)으로 봉사(奉事)를 지냈고, 호(號)는 경근당 (敬謹堂)으로 부인 진성이씨는 부사 정(楨)의 따님으로 퇴계선생 의 왕고모이기도 하다. 부친의 휘는 빈(彬)이고 성균생원(成均生 員)을 지냈으며 어머니는 고흥 류씨(高興柳氏)로 진사 광제(光齊) 의딸이다. 요산공은 1491년 3월 12일 서울에서 태어나 1516년 26살에 무과 에 등제하여 여러 차례 승진하여 선전관사 포서별검 봉상시주부(종 6품)에 이르렀고 직분을 받듦에 공정하게 처리했다. 아첨하거나 물 러나는 태도가 전혀 없어 동료들이 모두 공경하면서 꺼려했다.이후 “벼슬은 나의 학문을 펼치고 나의 뜻을 행하여 임금에게 충성하고 백성에게 은혜를 베푸는 것이다.그렇게 되지 않는다면 내가 좋아하 는 것만 못하다.”고 하고 마침내 벼슬을 버리고 호서(湖西)의 청주 로 물러나 살면서 경전에 힘써서 그 앎을 지극히 하였고 자신에게 돌이켜 실천하였다. 뒤에 또 다시 영남의 자인현 대원리(현 진량읍 대원리)로 옮겨 은거하며 성리(性理)를 탐구하며 오직 책만을 가까 이하였다. 부인 원주원씨와의 사이에 한명의 자식을 낳았는데, 성균 생원을 지낸 휘 근손(謹遜, 호 松齋)으로 이날 향사가 이어졌다. 송재공은 성균생원으로 손자 응득(應得)이 영달(榮達) 함으로써 통정대부 호조참의에증직되었다. ▲ 25일(음10.11)은 정재공(貞齋公, 휘 번)과 죽고공(竹皐公, 휘 응득)의시향이진량읍신제리선영에서봉행되었다. 정재공은 송재공의 차남으로 휘 번(蕃), 무과에 급제하여 태천현 감을 역임하고 아들 죽고공으로 인해 승정원좌승지 경연참찬관에 추증되었다. 정재공의아들죽고공 은 휘 응득(應得,1578~1 639)은 선조 30년(1597) 정유재란이 일어나자 2 0 세 가 되 어 4 월 에 경 상 좌도 방어사 권응수에 게 달려가 큰 공훈을 세 우는 등 정유재란에 뛰 어난 활약으로 국가의 안위를지켰다. 그후 1598년 11월에 왜군이 철군하였으므로 12월에 귀가하여 159 9년(선조32)사월 유시번 선생에게 다시 가서 수학하였고 1600년에 는모당손처눌(慕堂孫處訥)선생에게수학하였다. 1606년(선조39) 29세에 무과에 급제하여 권지훈련원참군(정7 품)에 이어 요직을 두루 거쳐 절위장군용양위상호군(정3품)에 이 어 1634년(인조12)가선대부로 승차하여 3대 추증이 되어 아버지 (휘 蕃)는 가선대부 병조참판 겸 동지의금부사 오위도총부부총관, 조부( 휘 謹遜)는 통정대부 호조참의, 증조부(휘 雲達)는 통정대부 통례원좌통례로각각추증되었다. 1636년(인조14) 병자호란에 인조가 삼전도에서 굴욕적인 항복을 함에따라 주전(主戰)을 주장하다 이에 미치지 못하자 벼슬을 버리 고 향리로 돌아와 은거하며 후진양성에 매진하다 3년만인 1639년 (인조17) 별세, 가정대부 병조참판 겸 동지의금부사 오위도총부 부 총관에추증되었다. ▲28일은 백헌공 요산공(휘 운달)의 손자 백헌공 이하 48위 시향 이지난10일압량읍추모제단에서봉행되었다. ▲29일 일요일은 진량읍 속초리 소재 경사재와 숭조당에서 요산 공 의 아 들 송 재 공 의 사 남 송 고 공 (松 皐 公 , 휘 苞 ) 과 그 의 아 들 죽 와 공(竹窩公, 휘 繼得)과 후손 190位의 제향이 각각 봉행하였다. 경사 재에 위패가 봉안된 송고공(松皐公,휘 苞)과 죽와공(竹窩公,휘 繼 得)은 학행(學行)으로 명성이 드높다. 숭조당(崇祖堂)은 2006년 석천공 을 비롯한 선조 묘역이 있던 경 산시 진량읍 신제리 일대가 진량 제2차지방공단부지로 개발 편입되 어 기존 분묘를 부득이 이장하여야 하게 된 차에 분묘설치에 의한 자연훼손을 막고 후세에 물려줄 금수강산을 보전하며 정부에서 추 진하는 다양한 장례문화 개선을 위해 마련되어, 190여 位의 위패와 유골이 안치되어 후손들의 참여도가 높아 화합과 돈목을 함께 이루 고 있 다 . 한편제관분정은다음과같다.(초·아·종·집례·축관순) △송재공:방무,창균,재정,재균,병목.△정재공:용정,병식,순일, 명정△죽고공:병찬,도군,병식,방무,철수△숭조당:병우,병현,병 순,재균,창균.-이상 /박방무명예기자(경북 경산시지부) 밀양박씨참판공후(后)경산요산공문중 시향봉행 밀양박씨참판공후경산요산공문중의시향이 지난달 24일부터29일까지봉행되었다.(사진요산공시향제관) 송재공제향광경 정제공제향광경 죽고공제향광경 숭조당제향광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