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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10월31일 토요일 7 (제166호) 기 획 뱚▶6면에서계속 참판공(휘 효순)의 장남 원함은 진사시에 합격하고, 무과 에 급제하는 등 문무를 겸하는 절도사를 지냈는데 아들 분 (芬)은 현감으로 응련·응립에 이르러 후사가 전해지지 않는 다. 참판공의 차남 원겸(元謙)의 호는 항양(恒楊)으로 1504년 진사시에 오르고, 중종 갑술년(1514년)에 문과에 급제하여 호당에 뽑히는 등 문장과 도의가 많은 선비들 중에서 뛰어나 당시의 거유 조광조, 김안국 등 명현들과 교유가 깊었다. 그 러나 남곤(南袞)·심정(沈貞)·홍경주(洪景舟) 등의 훈구 재 상에 의해 기묘사화가 일어나 조광조(趙光祖)·김정(金淨)· 김식(金湜) 등 신진사류들이 화를 당하면서 사직하고 낙향 하여 여러 번 불렀으나 나아가지 않고 어버이를 종신토록 봉 양함에힘썼다. 1526년 사간(司諫)에 배수되었으나 다섯 번이나 상소하여 부모를 봉양(養親) 할 것을 빌어 양근군수로 외임에 보직되 어 치적과 교화로 조정에서 알게 되어 안악군수로 전임되었 으나 다시 양친(兩親)할 것을 원하므로 양근에 1년 더 연장 되었다. 이후 광주 목사, 승지, 충청도 안찰사로 공평과 덕화로 광 주와충청도등호서지방의백성들이송덕비를세웠다. 이후 성균관 대사성,예조참판에 이르렀고,아버지와 조부, 증조부등3대추증을받았다. 참판공의 삼남 원눌(元訥)은 1516년 문과에 급제하여 호 당에 뽑혀 형제가 나란히 문과 급제와 호당에 뽑히는 광영을 안았으며, 북평사(北評事)에 오르고, 가선대부 호조참판에 증직되었으나 무후(无后)이다. 사남 원근(元謹)원평파조이 고,오남원상(元祥)은무후이다. 항양공(휘 원겸)의 아들 삼(蔘)은 진사시에 올라 상주목 사이고,아들 기생·두생·태생·규생·성생·진생 등 6형제를 두 었는데,장남 기생(箕生)은 성균 생원으로 정릉참봉(定陵,조 선 태조의 아버지 환조 이자춘의 능), 통훈대부 장악원정에 증직되었으며,후손들은종파(宗派)로세계를잇고있다. 차남 두생(斗生)은 진사인데 후사가 없고, 삼남 태생(台 生)은 남면파조, 사남 규생(奎生)은 부여파조, 오남 성생(星 生)은국수파조,육남진생(軫生)은무후이다. 지평파는 이와 같이 종파(宗派), 남면파(南面派), 부여파 (扶餘派), 국수파(菊水派), 송경파(松京派), 성산파(城山 派), 원평파(院平派), 후동파, 철원파(鐵原派) 등 9개지파로 각기 분파되고, 양평군 단월면을 중심으로 강원 홍천, 충남 부여 등에집성촌을 두고있으며,산업화로 인해현재는이들 지역에 많은 후손들이 도회지로 나가면서 전국에 세거하고 있다. 지평파의 종파는 파조 휘 정(禎)의 7세에 이르러 각 지파 로 분파되면서 성균 생원으로 정릉참봉(定陵)으로 통훈대부 장악원정에증직된휘기생(箕生)의후손들을말한다. 종파의 파조 휘 기생(箕生)은 슬하에 택(擇)븡륜( 맹)·간 (揀) 등 삼형제를 두었는데 장남 택은 손자 수대(壽大)에 이 르러 무후이고,셋째 간(揀)또한 아들 대에 이르러 무후로서 차남륜의후예로세계가이어진다. 휘 륜 ( 맹)은 학 문 과 덕 행 이 높 아 여 러 번 감 역 (監 役 )에 천 거되었으나 나아가지 않고 오직 후학양성에만 전념하였으 며, 아들 상인(尙仁)븡상검(尙儉)을 두었는데 장남 상인(尙 仁)의 號는 만은(晩隱)으로 학문과 덕행이 뛰어나 감역(監 役)에 수차 천거되었으나 이를 사양함은 아버지보다 더 엄격 했으며, 병자호란에 남한산성에서의 굴욕적인 항복에 때를 가리지 않고 경전만을 읽으니 세인들이 인경거사(麟經居士) 라 칭했으며, 가선대부 형조참판에 증직되고, 차남 상검(尙 儉)은성균진사이다. 만은공(휘 상인)은 신(愼)·침( )·념(恬) 삼형제를 두면 서번성한다. 장남 신(愼)은 1605년 태어나 1633년 생원시에 합격하여 인조 경진년(1640년) 목릉참봉(선조와 의인왕후·인목왕후 의 능)을 시작으로 양덕·청도군 등 양(兩) 군수를 지내는 동안 많은 치적을 남기시어 청도군에는 청덕비(淸德碑)가 군민들에 의해 세워졌고, 가선대부 동지중추부사에 이르렀 다. 그의 후손들은 이후에도 걸출한 인물이 많이 배출되었는 데, 현손 민효(敏孝)는 부모에게 효도함이 남보다 뛰어났고, 우애함은 더욱 돈독히 하였다. 아버지(휘 경래)의 병환(중 풍) 3년을 지극정성으로 봉양하고 계모(繼母) 봉양에도 소 홀함이 없어 주변사람들을 감동시킨 효자로 그의 유덕(遺 德)공(公)의 아들 손자 증손에 이르기까지 효자가문으로 명 성이이어진다. 부사공(휘 신)의 9세(지평19세) 두성(보명 두현)은 맹인 점자(點字)를 창작하여 맹인교육의 일대 혁신하는 등 맹인 들의아버지로인천에기념관이있다. ▶12면참조 부사공(휘 신)의 11세(지평21세) 정재(丁在)는 자수성가 를 이루고 후학양성에 뜻을 두어 용문중·고등학교를 설립 인 재양성에 크게 기여했다. 公은 어려서 혈혈단신(孑孑單身) 상경하여 양복 제조기술을 습득 한영양복점, 삼진복장(주) 를 설립 수많은 기술인을 배출하고 국제대회를 통해 외국에 선양하였으며, 용문중학교를 인수 정상화시켰으며, 이후 고 등하교를 설립했다. 이에 그 공로로 국민훈장 석류장을 비롯 굵직한 상을 많이 수상했다.이밖에도 종중의 재사 충효재 건 립과 지평파 재경종친회 창립 등 위선 사업에도 크게 기여했 다. 부사공의 12세(지평22세) 호준(鎬俊)은 경희대 한의학 과 졸업 후 신한의원을 개원하는 등 우리나 한의학발전에도 크게 기여하였으며, 용문중학교 교장을 역임하고, 단월중 학교를 설립 인재육성에 대한 공로로 대통령 훈장을 수상했 다. 만은공(휘 상인)의 차남 침은 성균진사이고, 7대손 영회 (永會)는 자신의 살을 베어 시탕한 효자이고,그의 손자 희규 (熙奎)는 1894년 태어났다. 천성이 순박하고 진실 되어 부모에게 효도하고 친족 간에 우애가깊었다. 조부(휘 영회)께서 중병으로 거동도 못함에 중원산에 있 는 약수가 효험이 있다는 말에 산세가 험하고 야생동물(호랑 이)의 출현으로 근접하기 어려운 곳에 어린나이에 홀로가 약 수를 입으로 물어다가 조부의 입에 넣어드리니 이를 본 사람 들이효심에놀라지않은이없었다. 그리고 부보 봉양에도 소홀함이 없었으며, 부인 이씨의 몸 이 불편함에도 하늘이 정하여준 운명이라면서 조금도 부부 의 신의를 저버리지 않아 현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교훈 이 되 고 있 다 . 진사공(휘 침)의 손자 희로(熙魯)의 호는 신암(信庵)으로 유학자 성암 박정화, 금계 이근원 선생에게 수학하여 성리학 과시문에뛰어났으며,신암집이전해진다. 일제강점기 일제하에 처해있던 시대적 상황에서 민족해방 과 자주독립 역량을 기르기 위해서는 우리의 전통적 가치와 사상으로 바탕을 튼튼히 하고 외국의 앞선 문물제도를 수용 하여 사회를 개혁 발전시켜야 한다는 사상에서 성리학 연구 외에 주시경 선생의 한글 연구 서적을 통하여 한글학의 이론 을 연구 발전시켰으며, 당시 유행하는 자유주의 사상과 마르 크스 사상체계의모순을 정확히 지적비판함으로써 마르크스 주의를 신봉하는 신진지식인들을 전향케 해 해방 후 6븡25 동 란시목숨을보전케하는등민중교육에크게힘썼다. 만은공(휘 상인)의 삼남 염(恬)의 9대손(지평15세) 희복 (熙福)의 호는 춘포(春圃), 문장력이 뛰어나고 효행으로 크 게이름을떨쳤다. 公의 아우 희적(熙績)의 아들 철재(哲在)는 1940년 일본 에서 이학박사 학위를 취득 환국하여 성균관대, 서울대에서 후진교육에 진력하였고, 문교부 기술교육국장, 국립과학관 장, 원자력 평화이용 수석대표로 미국을 다녀오는 등 이학계 의 대부로 통한다. 대한민국 국민훈장과 문화훈장을 수상했 다. 성균 진사 상검(尙儉븡 맹의 차자)의 아들성(惺)은 찰방(察 訪)으로 가선대부 공조참의에 증직되고, 손자 만정(萬鼎)은 통정대부에가자되었다. 남면파는 진사시에 오르고 상주목사를 지낸 휘 삼(蔘)의 셋째아들휘태생(台生)으로부터문호가열린다. 휘태생은성균진사로통정대부첨지충추부사이다. 부여파는 남면파 휘 태생(台生)의 아우로 상주목사를 지 낸휘삼(蔘)의넷째아들이다. 휘는 규생(奎生)으로 진사이고, 통정대부 홍주목사에 증 직되었다. 아들 활은 통덕랑으로 无后이고, 차남 찬은 성균 진사로통정대부예산현감에증직되었다. 국수파는 부여파 휘 규생의 아우이고, 상주목사를 지낸 휘 삼(蔘)의다섯째아들이다. 진사이고 그의 아들 지(持)는 통덕랑 손자 해일은 장사랑 으로 아들 둘을 두었는데 장자는 응발(應發)이고, 차자는 성 발(成發)이다. 송경파는 참판공 휘 원겸의 차자 휘 영을 파조로 한다. 사 마시에 오르고 묘가 고려의 서울 송도, 지금의 개성부근에 있어 송경파라 부르고 후손들이 여전히 이북에 거주함으로 써 족보에 누보가 많으며 일부 후손들이 남하하여 산재한 다. 성산파는 참판공 휘 원겸의 셋째아들 휘 총( )을 기일세 로한다. 통정대부 부호군인 휘 총의 아들 휘 창생(昌生)의 호는 취 송(翠松)으로 통덕랑이다. 양평 단월에서 강원도 홍천군 화 촌면성산1리입향조가된다. 공 께 서 잦 뫼 (栢 山 ) 을 가 던 중 말 이 갑 자 기 걸 음 멈 추 고 꼼 짝하지 않아 주변을 돌아보니 산수가 수려하여 세거지로 정 하고 많은 전답을 개간하여 후손에게 물려주니 번성하게 되 고 자녀들에게 효는 사람의 가장 기본적인 근본으로 화목과 의리는 인간생활의 요체임을 강조하고 행여 조상을 찬양하 되 벼슬을 과장하지 말 것과 탐욕을 버릴 것을 유훈으로 남겼 다. 공의 7대손 휘 빈(彬)의 호는 채암(蔡庵)으로 어린나이임 에도 어머니가 위중함에 손가락을 깨물어 단지하여 병을 낳 게 했다. 천성적으로 효성스러워 부모를 봉양함에 있어 부모 의 뜻 과 몸 을 모 두 함 께 받 드 는 데 조 금 도 잘 못 되 는 점 이 없 었 다.장성하여서는 학문에 조예가 깊었을 뿐만 아니라 몸소 행 동으로실천하였다. 순조 때 손위 처남 구(具)모(某)가 죽산 군수로 발령을 받 았으나 군수로서의 자질이 부족하여 사무처리 능력이 없었 으므로 처가의 권유로 책실(冊室)로 따라가 임기동안 심신 을 다 바쳐 관청 사무를 처림함과 동시에 백성들을 위한 애민 을 실천함으로써 군민들이 송덕비를 세웠을 때 군주인 구 (具)씨는 거명하지 않고 공에 대한 덕을 기리는 글을 비문에 새겼다. 취송공(휘 창생)의 8대손 휘 영철의 호는 연사(蓮史), 효 행과 덕행이 뛰어나 1893년(고종 임진)에 효행 정려가 내려 졌으며, 그의 아들 석주(奭周)의 호는 봉암(鳳庵)으로 사헌 부감찰을지냈으며,효행과우애로이름을떨쳤다. 공의 아들 종락(鍾洛)은 효도하고 형제간에 우애가 돈독 하였으나 조졸하여 아쉬움을 남긴 가운데 그의 부인 기계유 씨는 남편의 병환에 지극정성으로 간호하였으나 남편의 상 (喪)을 당해 함께 죽으려 물 한 모금 마시지 않았으나 연로하 신 부모봉양과 어린 자녀들을 위해서는 순간 이래서는 안 된 다고 생각을 고쳐 부모봉양과 자녀들을 훌륭히 키워 효열부 로전해진다. 원평파는 화천군 성산2리 원평마을을 말하는데 파조는 성 균진사 휘 효순의 셋째아들이며 참판공 원겸의 아우로 휘는 원근(原謹)으로성균생원이다. 그의 아들 서(薯) 또한 성균 생원, 손자 준민(俊民)은 찰 방,동지중추부사,증손개는무과로첨정을지냈다. 현손 태정(泰貞)의 아들 경하(慶夏)는 원평마을 입향조이 다. 후동파는 성균 진사 휘 중(仲)의 차남 휘 치순(致順)으로 부터문호가열렸다. 성균 진사이고, 그의 아들 원심(元諶)은 성균 진사, 손자 진(震)은 음서(蔭敍,벼슬하지 않고 관직만 주어짐)로 양덕 현감이다. 증손 무궁(無窮)은 음서로 전주판관, 현손 응남 (應男)은 월사 이정구 선생에게 수학하여 학문과 덕행으로 이름났다, 효행으로 여러 번 천거되었으며, 예산현감에 임명 되었다. 철원파는 성균 진사 휘 성보(誠輔, 지평파조 손자)의 셋째 아들휘의(義)다. 손자 휘 양(樑)은 원종공신이고 그의 아들 원형(元亨)은 현감, 손자 주(柱)는 주부이고 증직은 사복시정, 증손 세은 (世殷)은 부사로 증 호조참의, 현손 호(浩)는 첨지중추부사 로증좌승이다. 철원파는 원래 이북지역에 살고 있어 남북이 분단되면서 수차례 간행된 족보에 누보되면서 선조의 관직과 생애가 전 해지지않는다. 다만 지난 1994년 갑술보 발행 시 부산에 거주하는 종원 몇 명이 보소에 찾아와 관련 자료를 내놓으면서 고증을 거쳐 수 보하게되었다. 보산정은 지금으로부터 600여년전(1375)년 고려 우왕 원 년 송림공(휘 정)께서 이곳으로 낙향하면서 시회장(詩會 場)으로 건립한 것으로 그 후 예 들 이 중 건 하 고 수 축(修築)하면서 경건(敬 虔 ) 히 보 존 관 리 되 고 있 다. 그 후 송림공의 5대손 인 항 양 공 (恒 楊 公 ) 휘 원 겸(元謙)의 수학당(修學 堂 )으 로 서 이 후 저 명 한 유림문사와 애국지사들 의 시회장(詩會場)으로 서 혹은 유한야사(有閑野 士)의 소요지(逍遙地)로 사용되었다. 오랜 세월이 흐르는 동 안 여 러 차 례 중 건 을 거 듭 현재의 건물은 1955년 마 루를 축조했고,1974년 무 안박씨 지평파 종중에서 기둥벽등을시멘트콘크리트조로복원한것이다. 지붕은 팔작지붕에 골기와를 얹은 정면 2칸 측면 2만 정방 향의굴도리집으로겹처마에단청을하였다. 정자 주변에는 몇 그루의 노송이 운치 있게 둘러싸여 있으 며, 전면에는 전설이 담긴 신비로운 연못이 있어 한층 아취 (雅趣)를더해준다. 박윤겸의 자(字)는 희익(希益) 호는 항양(恒楊)이며, 본 관은 무안으로 지평파 파조 송림공의 현손 박효순의 아들이 다. 일찍이 이 고장 보산정에서 수학했고, 1504년 사마시에 합 격하여 진사가 되었고,1514(중종9)년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 제하여양근군수,풍천부사,성균관대사성,예조참판에이르 렀다. 신도비는 팔작지붕형의 옥개(屋蓋)와 장방형(長方形)의 비좌(碑座)를 갖추었고, 비신(碑身)은 대리석이다. 비의 건 립연대는 뒷면에 숭정기원후사정사월일립(崇禎紀元後四丁 巳月日立)이라 음각된 것으로 보아 철종 8년(서기 1857)에 세워졌음을알수있다. 비문은 매산 홍직필이 글을 짓고,심의면이 글씨를 썼으며, 서승보가 전(篆)하였다. 비의 규모는 높이가 127㎝, 폭 49㎝, 두께는23㎝이다. 븮항양각븯(恒楊閣)이란 편액(扁額)이 달린 비각은 맞배지 붕에 한해 골기와를 얹은 겹처마 시멘트조의 건물로서 좌우 측방에는방풍판(防風板)을달았다. 정면 245㎝, 측면 200㎝의 규모이며 주위에는 오래된 느티 나무 몇 그루와 송림공의 유허비를 비롯 한 종중에 공헌한 분 들의사적비가있다. 지평파의 선대는 대대로 개성에서 관직에 있어 지평파의 파조 송림공께서 낙향한한터(大 븡대벌)로 지금의 단월면 보룡리를중심으로집성촌을이루고있다. 이후 자손들이 번성하면서 각기 이거해 곳에 집성촌을 이 룬다. 종파(宗派)는 단월면에 남아있고, 남면파는 양평군 지전 면 일대, 부여파는 부여 외산, 국수파는 양평 서면, 용문, 송 경파는 개성과 양평 양서,성산파는 강원도 홍천군화천면성 산1리, 원평파는 화천면 성산2리(원평마을), 후동파는 홍천 읍,철원파는철원(이북),부산등지에각각세거한다. 뱚종파(宗派) 뱚■남면파(南面派) 뱚■부여파(扶餘派) 뱚■국수파(菊水派) 뱚■송경파(松京派) 뱚■성산파(城山派) 보산정-향토유적제11호(경기도양평군단월면보룡리산33-2)원평문중재사명륜재(홍천군화천면성산2리원평마을) 뱚■후동파 뱚■철원파(鐵原派) 성산문중재사숭모재(강원도홍천군화천면성산로 210-13) 뱚■원평파(院平派) 뱚주요유적 원평문중재사명륜재(홍천군화천면성산2리원평마을) 뱚▲보산정(寶山亭) 뱚▲박원겸신도비 향토유적제12호항양공박원겸신도비(경기도양평군단월면보룡리산 337) 뱚집성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