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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10월31일 토요일 6 (제166호) 기 획 지평파는 관향조 휘 진승(進昇)의 9世로 1370년 고려 공민 왕조의 간의대부(諫議大夫)를 지낸 휘는 정(禎, 호 松林)을 파조로 한다. 조부 휘 문오(文晤)의 호는 면남(綿南)으로 벼 슬은 은청광록대부 상주국영동평장사이고 면성부원군에 봉 해졌으며, 아들 다섯을 두었는데 이중 넷째 아들 휘 윤구(允 球)는 숭정대부 호부상서인데 곧 지평파조 송림공의 선고 (先考)이고이다. 간의대부(諫議大夫)는 고려왕조 중앙정부 문하부(門下 部)에 속한 관직으로 임금의 잘못을 건의하는 소임을 갖고 있다. 송림공은 고려 말 국정의 혼란이 날로 심각해지고 인륜과 도덕이 무너지는 혼돈 속에 강직한 성품으로 정사를 바로 세 울 것을 수차례 직간하면서 이를 못마땅하게 여긴 세력의 미 움을사한직인비인감무로좌천성인사를당했다. 비인감무라는 벽지 한직에서 불을 보듯이 뻔 하게 나라가 망하여 가는 것을 바라보며 안타까워하던 공(公)은 나라의 앞날을 걱정하며 말하길 뷺나는 대대로 벼슬하던 집안에서 태 어난 사람으로 벼슬하여 관직에 있었음에도 임금의 잘못을 바로 잡아 백성들을 평화로이 살 수 있도록 선정을 베풀도록 하 는 일 을 다 하 지 못 하 여 내 자 신 이 행 해 야 할 도 를 해 하 지 못하고 무력하게 하염없이 하늘만 쳐다보고 한탄만 하는 처 지로 녹만을 받고 있으니 이 어찌 사람으로서 할인인가!’뷻라 고 한탄하면서 “이제 고려왕조는 망한 것이나 다름없으니 다 시 높은 벼슬을 한다 할지라도 나라와 백성을 구할 수 없다.” 하면서초연히비인감무직위를버리고비인땅을떠났다. 당시는 요승 신돈의 폭정이 거세지면서 많은 사람들이 보 신을 목적으로 신돈에게 아첨하는 일이 비일비재 하면서 생 긴 일이기에 송림공께서는 가족을 데리고 지평 북면(砥平北 面) 괘일산(掛日山) 아래 한터(大 ), 현재 양평군 단월면 보룡리에 은거하면서 소나무 숲에서 은거하는 선비라는 의 미로 스스로 송림거사(松林居士)라 자칭하면서 송림(松林) 을 아호(雅號)하고, 집을 짓고 고려의 서울(개성)을 그리워 하며여생을보냈다. 송림공은 비록 고려를 버리고 숨어서 살았지만 끝까지 고 려 왕조를 배반하지 않고 절의를 지켰다.이성계는 조선을 건 국 후 송림공에게 출사(出仕)하여 도와줄 것을 세 번씩이나 사람을 보내어 불렀으나 이에 응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조 카인 풍정공 휘 의룡이 조선조 개국공신이 되었다는 이유로 서로 왕래를 끊었다. 이는 송림공의 절의정신을 보여주는 대 목이다. 대한민국의 중심은 서울이다. 서울을 기점으로 하여 동해 안에 있는 강릉과 연결된 현 6번 국도를 따라 동쪽으로 60㎞ 달려가면 경기도 양평군 군청소재인인 양평읍에 이르게 되 고 계속하여 그 길을 달려가면 68㎞ 지점에 용문면 광탄리에 도달하게 되는데 이곳을 송림공께서 고려 말 간신배들과 역 적의 무리들을 피하여 개성을 떠나 정처 없이 가다가 용문산 의 자태와 경관이수려함을 보고 이곳근처 어디에 은거할 마 땅한 곳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처음으로 위치를 확보한 곳이다. 이곳에서 지산(砥山븡옛날 지평현 소재지로 지금의 지제면 지평리) 북쪽으로 살터를 찾아 가지 지금의 지평 북 쪽에 있는 6번국도이다. 그 국도를 따라 서울기점 80㎞ 지점 에 이르러 6번 국도에서 북쪽으로 갈라져 들어가면 우뚝 솟 은 봉우리 위에 있는 곳(현 보산정 자리)에 이르러 송림공께 서 타 고 가 던 소 가 가 지 않 고 멈 춰 소 에 서 내 려 주 위 의 지 형 을 살펴보고 삶의 터로 정한 곳이 한터(대벌)로 지금의 단월 면보룡리이다. 그 후 후손들이 계승하여 세거함에 따라 송림공께서 처음 양평에 들어와 지세를 살폈던 지산(옛 지평현)의 지명을 따 지평파라하게되어지금에이른다. 지평파 파조 송림공 은 고려의 명신으로 자신을 모함한 세 력에 의해 사직하고 낙향(落鄕) 은둔하면서도 고려의 수도 개성을 그리워하며 태조 이성계가 수차례 불렀으나 응하지 않으며 절의를 지켰다. 현실정치에서 떠나 있으면서도 보산 정(寶山亭)을 짓고 당대의 인사들과 시문을 주고받으며 저 물어가는 고려의 명운을 걱정하기도 하였으며, 이후 보산정 은 향리의 자제들을 모아 후학을 양성하는 장소로 사용되면 서 훗날 유림지사와 애국지사들의 집회장소로 이용되고 있 어송림공의유훈이길이전해지고있는것이다. 송림공은 슬하에 독자(獨子)를 두었는데 휘는 천룡(天 龍), 호는 운곡(雲谷)으로 고려조 국자진사(國子進仕)로 학 문이 뛰어났으나, 공명을 멀리하고, 은거하였는데 혹자는 상 장군(上將軍)이라 하였다. 아들 성보(誠輔)를 낳으니 성균 진사로 통훈대부 사헌부집의에 추증되고, 전(佃)·중(仲)·의 (儀) 삼형제를 두었는데, 장자 전(佃)은 진사(進士)로 후사 가 없고, 차자 중(仲)은 성균 진사로 통정대부 좌승지로 가 선대부 도승지에 추증되었다. 셋째 의(儀)는 철원파조(鐵原 派祖)이다. 승지공 휘 중(仲븡송림공 증손,4世)은 효순(孝順)·치순(致 順) 등 형제를 두었는데 장자 효순은 성균진사로 통정대부 호조참의를 역임하고 가선대부 호조참판에 증직되고 슬하에 원함(元 )·원겸(元謙)·원근(元謹)·원상(元祥) 등 사형 제를둠으로서크게번성했다. 승지공의차남치순(致順)은성균진사로후동파조이다. 뱚파조별약사 무안박씨지평파(砥平派) 지평파파조송림공이 최초입향한 보룡리마을전경 무안(면성)을 관향으로 하는 박씨는 시조 왕의 28대손 경명왕의 6자 휘 언화(諱 彦華븡완산대 군)의8대손휘진승(諱進昇)께서고려조국학 전주(國學典酒)로 기자팔조지교(箕子八條之 敎)로써 민심을 순화 한 공으로 무안군에 봉해 지고 무안을 식읍(食邑)으로 받아 관향지로 삼 았으며공(公)을기일세(起一世)로하여일천여 년을 이어 오면서, 지난 2000년 기준 24,746세 대78,817명이전국에분포되어세거하는씨족 으로21지파(之派)로분파되어있다.이중지평 파는 경기 양평,강원 홍천,충남 부여,북한 지 역의 개성 등에 집성촌을 이루고 있으며, 절의 와충효의가문으로유명하다. 뱚지평파연원(淵源) 송림공의유허비를문중의원로 21대손용규현종이 설명하고있다. 뱚지평파지명의유래 송림공(휘정)묘소(양평군단월면보룡리) 지평문중재사충효재 뱚지평파세계(世系) 뱚▶7면으로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