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page

2020년10월31일 토요일 4 (제166호) 관향조 종친회 소학당은 한훤당 김굉필 선생께서 은거 수도하시던 곳이 라. 성종 4년 임진(1472)에 선새의 장인이신 부사맹공 박예 손께서 비계산 아래 남교천 위 탁 트인 곳에 집을 지어서 선 생의 독서하는 곳을 삼으니, 한훤당 선생이 시(詩)를 지어 가로대 ‘홀로 처하고 한가로히 거하여 오고감이 없으니 다 만 밝은 달이 있어 외롭고 차게 비쳐주네, 그대들은 번거롭 게 인생사를 묻지 말라. 두어이량 연기 물결 두어 첩 산이로 다.’하였으니 당시에 朴 선생 연세가 90세이라. 소학당으로 이름 한 것은 대개 산을 좋아하고 물을 좋아하는 뜻인데 마 음 쏟아 글을 읽고 소학으로 종지를 삼아서 항상 소학동자 라 칭하고 일두 정여창 선생과 더불어 뜻이 함하고 도가 같 으므로지동암(志同岩)위에소요하고자주토론하셨다. 후인들이 불조심을 아니 하여 선조 원년 정묘(1567)에 화 재를 당하고 돈옹 박분구, 남계 이중무, 화음 권양 제현들이 군과 도의 선비들과 더불어 중건하고 옛 이름을 고쳐 소학 당이라 이름 함은 대개 선생께서 소학에서 발달한 뜻을 취 하여항상추모함이라. 이 남계(藍溪)가 상량문을 짓고 박 돈옹(遯翁)이 실기를 지었다. 이로부터 모여드는 자 많아서 글 읽는 소리가 끊어 지지 않더니, 풍우에 훼손되어 숙종 29년 임진(1712)에 당 시 중수하여 시강원 사서 김상직이 상량문을 짓고 해마다 선비들을 모아 학문을 강습하고 제사를 드리면서 일두 정 선생도 병향하더니 1910년 경술국치 이후 강학은 폐지되고 채례(采禮)는지금까지거행한다. <파평윤영보삼가씀> 숭현사는 옛 이연서원(야로 하빈리)이 있었는데 숭정연 간(1629~1644)에 고을 유림에서 한훤당 김굉필 선생과 일 두정여창선생을향사하기위하여서원을세웠다. 정당(正堂)은 명성(明誠)이라하고, 동재(東齋)는 존양 (存養)이라 하고, 서재(西齋)는 진수(進修)라 하고 문(門) 은 조도(造道)라 하고 사판(祠版)을 모시고 하니 현종 경자 년(1660)에 이연서원으로사액(賜額)되었다. 그 후 서원이 훼철되고 유림에서는 소학당 마루에서 매년 4월 15일에 한훤당,일두 두 선생의 향사를 채례(采禮)로 치 르다가 서기 1998년에 정부에서 사당을 지어 주셨기에 이름 을 숭현사(崇賢祠)라 하고 여기에 두 선생의 향사를 드리고 있음. <벽진임하이원방삼가씀) 군북(郡北) 가야면 매안리에 위치하고 있다. 영조 42년(1 766)에 창건하였다. 래암 정인홍의 유년시 사부이신 성균진 사 복재 박양좌, 임진란 때 창의종군하여 정운원종공신에 녹훈되시고 란후(亂後) 현풍 장수 양 현감을 역임 후 성주 목사로 제수되신 화음 권양 선생을 비롯 사공(四公)의 공 (功)과 유덕(遺德)을 추모하기 위하여 회산서원(會山書院) 을건립하여향사를봉행하여왔었다. 고종 5년 무진(1868) 9월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에 의하여 훼철된 후 추모향사는 중단되었다. 그 후 후손들과 사림에 서는 이를 애탄(哀歎)하여 오던 중 광복을 맞이하게 되자 후손들이 누차 서원복원을 논의한 후 다시 후손들이 사림과 서원 복원을 재론하여 공의로서 1948년에 소학당 서변(西 邊)에 회산사로 복건하게 되었으며, 이로써 그동안 중단되 었던 사공(四公)의 추모향사는 계승 봉향(奉享)하게 되었 다. 향사는 매년 음 3월 중정일에 유림향사로 봉행하고 있 다. <2002.2.권대향 記> ‘진광불휘(眞光不輝)’라 했던가. “참된 물은 향기가 없고 참된 빛은 반짝이지 않는다”는 진리처럼 550년의 만고풍상 의숭산역사가농축(濃縮)되어있는소학당이다. 이곳이 소학당 정신의 표상(表象)이요 산실(産室)이다. 소학당 정신은 조용하고 온화한 집(정와븡靖窩), 본심을 잃 지 않도록 착한 마음을 기르며(존양븡存養), 고아한 학문을 닦는 곳(한묵청연븡翰墨淸緣)이다. 비계산(飛溪山)을 주자(朱子)의 무이산에 견주어 영남 주자학의 본산(本産), 실천의 산실로 숭산에는 한훤당(寒 暄堂)이 자리매김하고 있다. 여백서원(如白書院), 즉 ‘맑은 사람들이 모여 늘 공부하는 곳’과 같이 맑은 정신을 소유한 사람들을 위해 시(詩)를 위하여 후학(後學)양성을 위하여 존립한 지식의 공유, 사회 전체 공공의 이익을 중시한 숭고 한정신이소학당정신이다.(이하생략)<유산이관수지음> 김굉필(金宏弼)의 본관은 서흥(瑞興)으로 어릴 때 이름 은 효동(孝童)이며 자(字)는 대유(大猷)이고 호는 한훤당 (寒暄堂)이다. 조선 단종 2년(1454년) 5월 25일 한양 정릉 (지금의 정동)에서 아버지 절충장군 김유(金紐)와 어머니 청주 한씨(淸州韓氏) 사이에서 쌍둥이로 태어났으나 형은 자라지못했다. 김종직(金宗直)의 문인으로 븮소학(小學)븯에 심취해 ‘소학 동자(小學童子)’로불리었다. 1498년 무오사화가 일어나자, 김종직의 문도로서 붕당을 만들었다는 죄목으로 원방부처(遠方付處)의 형을 받고 평 안도 희천에 유배되었다가 2년 뒤 순천에 이배되었다. 유배 지에서도 학문 연구와 후진 교육에 힘써, 희천에서는 조광 조(趙光祖)에게 학문을 전수해 우리나라 유학사의 정맥을 잇는계기를마련하였다. 학문적으로는 정몽주(鄭夢周)븡길재(吉再)·김숙자(金叔 滋)·김종직으로 이어지는 우리나라 유학사의 정통을 계승 하였다. 1610년(광해군 2) 대간과 성균관 및 각 도 유생들의 지속 적인 상소에 의해 정여창(鄭汝昌)·조광조·이언적(李彦迪) ·이황(李滉)등과함께오현(五賢)으로문묘에종사되었다. 한훤당 선생이 이처럼 큰 인물로 영원히 추앙받고 있기까 지는부인순천박씨가있다.한훤당선생의장인(휘예손)은 경북 성주에서 1495년 합천 야로 숭산 남교(현 야로면 매안 리)로 이거하여 아들과 사위(한훤당 김굉필)의 학업을 위 해 숭산(현 매안리 989번지)에 소학당(小學堂)을 건립, 이 들에게학문의대성을이루게하였다. 그리고 부인 순천박씨는 ‘정숙하고 단정한 자질로 타고난 위에 선생의 큰 덕과 넓은 규모에 물들어서 아내로서 도리 를 잘 닦아, 서로 대하기를 손과 같이 하였으며 안살림을 다 스림에 있어서 정길(貞吉)하고 예절에 맞지 않음이 없었 다.’고그후손김규화는묘갈에기록하고있다. 1480년(성종 11) 생원시에 합격해 성균관에 입학하였다. 이때에 장문의 상소를 올려 원각사(圓覺寺) 승려의 불법을 다스릴 것을 포함한 척불과 유학의 진흥에 관한 견해를 피 력하기도하였다. 1494년 경상도관찰사 이극균(李克均)이 이학(理學)에 밝 고 지조가 굳다는 명목의 유일지사(遺逸之士)로 천거해 남 부참봉에 제수되면서 관직 생활을 시작하였다.이어서 전생 서참봉·북부주부 등을 거쳐, 1496년 군자감주부에 제수되 었으며,곧 사헌부감찰을 거쳐 이듬해에는 형조좌랑이 되었 다. 1498년 훈구파가 사림파를 제거하기 위해 무오사화를 일 으켰을 때, 김종직의 문도로서 붕당을 만들었다고 하여 장 형을받고평안도희천에유배되었다. 조광조(趙光祖)가 그에게서 븮소학븯을 배운 것은 이때의 일이다. 2년 뒤에 유배지가 순천으로 옮겨졌다가 1504년 갑 자사화가 일어나자 무오당인이라는 죄목으로 죽음을 당했 다. 중종반정 뒤 신원되었으며, 1507년(중종 2) 도승지에 추 증되고 1517년 홍문관부제학 김정(金淨) 등의 상소로 다시 우의정에추증되었다. 조선 전기 사림파의 대표적인 학자로서 훈구파가 일으킨 사화(士禍)로 죽었다.본관은 하동(河東).자는 백욱(伯勖), 호는 일두(一 亮). 아버지는 함길도병마우후 육을(六乙)이 다. 김굉필(金宏弼)·김일손(金馹孫) 등과 함께 김종직(金 宗直)에게서배웠다. 일찍이 지리산에 들어가 5경(五經)과 성리학을 연구했다. 1490년(성종 21) 효행과 학식으로 천거되어 소격서참봉에 임명되었으나 거절하고 나가지 않았다. 같은 해 과거에 급 제하여 관직에 나간 후 예문관검열·세자시강원설서·안음현 감 등을 역임했다. 1498년(연산군 4) 무오사화에 연루되어 경성으로 유배되어 죽었다. 1504년 죽은 뒤 갑자사화가 일 어나자부관참시되었다. 중종 정묘년에 왕명으로 복작되어 도승지로 추증되고,정 축에 조광조와 연계로 인하여 의정부 우의정으로 벼슬이 더 해지고 선조 8년 을해에 문헌(文獻)으로 시호가 내려지고, 광해 2년 경술에 문묘에 종사(從祀)되고, 또 영의정으로 추 증되었다.함양남계서원에배향되었다. 복재공 박양좌의 본관은 순천으로 字는 신로(藎老), 고려 말 개성 판윤을 지내고, 속세를 피해 가야산으로 들어가 절 의를지킨휘가권(可權)의후예이다. 조선에 들어와 휘가 유성 (柳星)이란 분이 있었는데, 의주 목사를 지내고 청백리 에선발되었다. 휘 예손(禮孫)은 부사맹 (副司猛)을 지냈는데, 단종 이 왕위를 물러주자 은거하 여 벼슬에 나아가지 않았다. 휘 한하(漢何)는 사복시 정 에 추증되었는데, 동생 휘 한 삼 ( 漢 參 )과 함 께 한 훤 당 (寒暄堂) 김 선생을 스승으 로섬겼다. 이분들이 고조부와 증조 부, 조부이다. 부친의 휘는 식(埴)으로 통정대부 승정원 좌승지에 추증되었는데, 진사 로 경릉 참봉(敬陵參奉)을 지냈다. 어머니는 하빈 이씨(河 濱李氏)로 생원의필(義必)의딸이다. 정덕(正德)신사년(1521)에 부군이 합천 남교촌(藍橋村) 집에서태어났다. 성품이 매우 효성스러워 부모를 봉양함에 음식을 부드럽 고 매끄럽게 하는 일과 맛있는 음식을 드리는 것에 힘을 다 해 갖추었고 매번 먼저 맛보도 드렸다. 결혼한 지 겨우 2년 만에 모친상을 당하였다. 봉양하며 천수를 다하게 할 수 없 었기 때문에 매우 슬퍼하여 몸을 상한 것이 더욱 심하였다. 장사를 지내고 즉시 시묘하고자 하였으나,할아버지께서 엄 하게 금하자 그만두었다. 조부의 상을 당하여는 자기의 뜻 대로 할 수 있어, 3년 동안 죽을 먹으며 시묘하였다. 부모의 묘소에 날마다 가서 반드시 성묘하였는데, 비록 추운 겨울 이나한여름이라도또한그렇게하였다. 일찍이 부친의 뜻에 따라 과거 공부를 하였는데, 나이 스 무 살인 가정(嘉靖) 경자년(1540)에 사마시에 합격하였다. 이에 이르러 곧 과거 공부를 그만두고 “내가 비록 크게 이름 이 나더라도 그 누가 기뻐하겠는가.”라고 하였는데, 마침내 세상에 뜻이 없었다. 뒤에 유일로서 경기전 참봉에 제수되 었고, 또 서열을 뛰어넘어 승지에 승진되었다. 평생 자신을 봉양하는 데는 소홀하고 다른 사람을 대하는 데는 후하여, 가산이 넉넉하지 않았지만 도와주어야 할 의리가 있으면 노 비와 전답이라도 문서를 만들지 않고 자녀에게 나누어주면 서 “말이 문서보다 낫다.” 라고 하였으니 품성과 도량이 대 개 이 와 같 았 다 . 같은 군에 사는 이요당(二樂堂) 주이(周怡), 옥동(玉洞) 문익성(文益成) 등 여러 분과 도의로 사귀었으며, 븮천곡동 금록(泉谷同襟錄)븯을편찬하였다. 향교가 퇴폐하고 선비의 취향이 바르지 않은 것을 개탄하 여고을의사우들과븮입학록(入學錄)븯을편찬하였다. 또 사는 곳에 지동재(志同齋)를 지어 여러 학생들에게 학 문을 익히게 하니 배우는 사람이 많이 모여들었다. 부군께 서는 매우 자애롭고 선량하면서도 엄하게 가르쳐 지도하였 는데, 책을 읽는 여가에 옛사람의 좋은 말과 착한 행실을 두 루열거하여간절하게가르쳐인도하고면전에서타일렀다. 향약과 향형(鄕刑)으로 착한 일을 권장하고 악한 일을 징 계하며 민간의 풍속을 인도하니, 당시 사람들이 그것을 남 교동약(藍橋洞約)이라고 하였는데, 예전의 남전(藍田)을 본받은것이다. 일찍이 고령(高靈)용담리(龍潭里)에 우거하다가 만년에 고향으로 돌아왔다. 이 때문에 호를 복재(復齋)라 하였다. 깨끗한 바위와 맑은 물, 푸른 소나무와 대나무는 그윽한 흥 치를 돋우었다. 때로 명아주 지팡이와 짚신으로 지동암(志 同巖)에서 소요하면서 선현의 유적에 흠모하는 마음을 붙 였는데실로영원히은둔할것을맹세한것이다. 만력 기해년(1599) 3월 27일에 천수를 누리고 세상을 떠 났다. 남계 박이문은 복재공(휘 양좌)의 장남으로 용담공 휘 이장의 형이다. 1544년에 태어나 1628년에 작고하였 다. 공은 7세때 책 한권을 들 고 배우기를 청하였는데 이 책 은 즉 주 역 (周 易 ) 의 총 목 (總目)이었다. 이때 복재공 은 두어 줄을 시험하자 공은 그 뜻 을 본 래 배 운 글 처 럼 잘 해석하므로 복재공은 매 우 기 특 하 게 여 겼 으 나 그 것 은 어린아이들이 배울 것이 아니므로 주문공(朱文公) 의 소학(小學)을 가르치자 공은 한결 같이 깊이 음미하였으며 10여세에 때에는 경서의 대의를 통달하고 문장을 능숙하게 지어 모든 사람들을 놀라 게 하였으며,융경연간(1568년)에는 진사가 되어 한강 정구 선생과 도의지교를 맺었다. 그리고 공의 천성은 지극히 효 성스러워 복재공이 병을 앓고 계시자 공은 옷을 벗지 않고 주야로뫼시면서간호를하였다. 하루는 공이 그의 아우 용담공에게 ‘부모님이 늙으셨으니 벼슬은 네가 책임지고 나는 부모님 봉양을 맡겠다.’고 한 후 과거공부를 그만두고 성의를 다하여 부모를 섬기므로 조정 에서는 공의 효성을 듣고 경릉참봉을 제수하였으며,임진왜 란때에는 공이 분연히 일어나 의병장 망우당 곽재우 장군의 진영에 있으면서 군량을 조달하였는데 이때 학봉 김성일이 영남의 도백(道伯)으로 계시다가 경북의 도백으로 전임하 려고 하므로 그 의병 진영은 장차 한심스러운 처지에 놓이 게 되자 공은 열읍(列邑)의 선비들과 함께 김선생의 전임을 취소하라는 상소를 하여 결국 윤허를 얻어내고 또 낙동강 이서지역을 잘 보존하여 곽 망우당 선생과 김 선생은 늘 그 의충절을칭찬하였다. 그 후 공에게 좌승지를 증직한 것도 모두 이런 이유가 있 기때문이다. 남계 이중무의 본관은 벽진 이씨이다. 벽진 이씨의 시조 이총언(李 悤言)은 신라 말에 벽진태수 (碧珍太守)를 지낸 인물이다. 그의 나이 61세에 왕건(王建) 을 도 와 고 려 창 업 에 공 을 세 워 삼중대광(三重大匡) 개국원훈 (開國元勳) 벽진장군(碧珍將 軍)에 올랐고,벽진백(碧珍伯) 에봉해졌다. 선생의 고조의 휘는 장성(長 成) 운봉현감을 지냈다. 장곤 (長坤)은 호가 금헌(琴軒) 좌 찬성에 이르고, 장배(長培)는 한훤당 김선생의 사위이다. 선생은 1586년 선조1년 의령군 부림면감암에서출생.1629년 졸하였다. 휘는 중무(重茂)자는 회부(晦敷),호는 남계(枏溪).아버 지는 장사랑 이진(李縉)이며, 어머니는 순천박씨(順天朴 氏)로 박양좌(朴良佐)의 딸이다. 조선학자(朝鮮學者)로 학 문이 전정(專精)하여 성리학을 일찍 깨달았고 성품이 깨끗 하고 선비의 뜻과 仁義禮智의 행실(行實)을 지켜오면서 권 세(權勢)를 탐내지 않았고, 한강 정구 선생의 처질서로 그 門에수학하였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외가 곳인 남교동으로 피신하여 오 시게 되었으며, 외조부 박양좌 외숙 남계, 용담의 사랑을 받 아오면서 학계동(鶴溪洞)에 거주하게 되었고, 학문은 날로 깊이를 더하였으며, 1617년 인목대비 폐비론이 대두할 때 강고(江皐) 김시추(金是樞) 양촌 이선립(楊村 李善立) 등 과 극 간 항 소 를 올 리 기 도 했 다 . 선생의 부인은 광주이씨로 슬하에 삼남을 두었고 묘는 묘 산면안성후산복호등신좌쌍분이다. 이곳 동지암에서 한훤당 김굉필 일두 정여창 양 선생께서 학문으로 주고받으며 국정정사를 걱정 의논하고 후학을 양 성하며 지역민을 모집 가르치시던 업적을 만세에 전하고자 외종 박돈옹과 협력하여 소학당을 중건하여 금일에 이르게 되었다. 이로 인해 수많은 선비들을 배출하게 되었으며,선생께서 세상을 떠나시자 유림에서 숭산 사현(四賢) 복재 박양좌, 남계 박이문,남계 이중무,화음 권양 선생들의 그 공적은 후 세토록 귀감이 되어 이를 본받아서 후학들에 영원히 전하고 자 1780년(정조 4)숭산 회산서원(會山書院)에 봉향되었다. 저서로는븮남계문집븯4권이있다 조선조 초기 거듭된 사화로 사림은 원기가 조상(阻喪)하 여 나아갈 바를 모르고 방황 (彷徨) 할 때 남명선생이 경의 지 학 을 가 르 쳐 서 출 처 (出 處 ) 의 대 절 ( 大 節 )을 알 게 하 니 부 귀(富貴)를 뜬구름보다 가볍 게 여기고 절의(節義)를 목숨 보다 무겁게 여기니 임진왜란 에 창의하여 풍성(風聲)을 세 워 청 사 ( 靑 史 )에 빛 난 분 이 4 8 가(家)였는데 권 화음선생도 그중한분이이다. 선생의 휘는 양(瀁)이요 자 (字)는 경지(景止)며 호는 화 음(花陰)이요 관향은 安東이며 태사공 행(幸)이 시조이며 증조의 휘는 시민(時敏)이요 조의 휘는 일(逸)이니 호조정 랑 이 며 고 (考 )의 휘 는 여 겸 (汝 謙 ) 이 니 증 승 지 이 고 비 는 청 주한씨상호군세원(世瑗)의따님이다. 1555년 8월 21일 삼가 대평 죽촌에서 태어났으며, 총명하 고 효제충신(孝悌忠信)하였으며 자라서는 내암 정인홍 선 생 문하에서 경의의 오지(奧旨,어떤 사물이 지닌 매우 깊은 뜻)를배워학덕이고명하였다. 선생의 지효(至孝)는 조야(朝野)를 감동시켜 효행으로 예빈시 별제를 제수받았으며, 임진 오월 10일 전 장령 정인 홍 김면 하혼 조응인 권양 문경호 박이장 문려 문홍도 강익 문 등 여러 의사와 같이 창이하고 격문을 별읍에 보내니 남 명 문도들이 모두 창의하고 낙동강 서안을 방어하여 전라도 곡창이 보장되고 7년 왜란을 승리로 이끌었다. 선생이 직접 참가한 전투는 무계2차전 마진전 성주성 3차전 진주성 구원 전악견산성전이다. 왜란 이후 전공으로 내린 벼슬을 유곡 찰방 상주 가수 장 흥 직장 종부시주부 현풍현감을 제수 받고 선정을 베풀었으 나 이같은 미관말직(微官末職)으로는 온축( 좋蓄)한 포부 (抱負)의 만일(萬一)도 전희(展希) 할 수 없음을 깨닫고 호 연(浩然)히 귀향하였다. 상국(相國) 이정구가 벼슬 할 것을 누차권유(勸誘)하였으나불응하고도의를자려(自勵)하여 유유자적(攸攸自適)했다. 만년에 도곡촌으로 이거하는 선 고 묘 아랫니며, 효성의 소치이다. 광해 1년 무오년 정월 초 3일에 역책(易혠)하였으니 향년이 64세였으며,졸후 3일 만 에 성주목사를 제수 받고 그해 3월에 두무산(逗霧山) 건좌 에예장했다. 인조반정 후 남명학파는 몰락하여 반 역행으로 지목받아 국가의 포전(褒典)도 받지 못하고 냉대(冷待)를 받고 삼백 년을 지냈으니 그 한이 오죽했으랴 사림이 선생의 명절과 도덕을 추모하여 회산서원을 짓고 향사를 드린 지 오래였으 니 선생의 후손들이 회산서원 뜰 안에 유적비를 세우니 선 생이 수립한 충효대절은 이제 그윽한 빛을 발하여 온 겨레 의 가슴속에 영원히 간직하게 되었으니 숭고하기가 北斗와 같 고 빛 나 기 가 日 月 과 같 으 니 어 찌 조 선 조 의 작 은 恩 典 에 비할소냐,선생이 걸어온 거룩한 발자취는 겨레의 자랑이요 만고의사범(師範)이네. <합천문화원장김연(金煉)撰유적비문에서> 뱚숭현사실기(崇賢祠實記) 뱚회산사기(會山祠記) 회산사-입구에 복재 박양좌, 남계 박이문, 남계 이중무, 화음 권양선생 의유적비가있다. 순천박씨판윤공문중의노길(左), 재동(中) 현종과 벽진이씨이명수(유 사)씨가소학당을안내하고회산사앞에서기념촬영에응하고있다. 뱚소학당정신(小學堂精神) 뱚 배향인물 뱛한훤당김굉필(寒暄堂金宏弼) 뱚일두정여창(1450~1504) 뱚복재박양좌 뱚남계박이문 뱚남계이중무(枏溪李重茂) 뱚화음권양(花陰權瀁) 뱚소학당실기(小學堂實記) 뱚 ▶3면에서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