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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9월30일 수요일 6 (제165호) 관향조 종친회 갈충(竭忠)은 갈충진성위성공신(竭忠盡誠衛聖功臣)에서 비롯되었다.이는임진왜란당시분조(分朝)를 운영하던광해 군을도운공로로책봉된공신80명의훈호(勳號)로갈충공은 3등에 책봉되어 후손들은 훈호를 따 갈충공파(竭忠公派)라 한다. 갈충공의 후손들은 당초 갈충공의 장자 충장공(휘 영신)을 비조로 하여 세계를 이루었으나, 갈충공의 삼남 통덕랑공(휘 영로)의 후손들의 경기 연천지역 토지분쟁이 발생 이들 후손 들이 충장공 문중에 도움을 요청하게 되고. 이에 이를 적극적 으로 중재 해결함으로써 양 문중을 하나로 하고 1代를 상향하 여 갈충공파 종중으로 1989년 종회를 새롭게 구성 지금에 이 른다. 갈충공파는 밀성대군의 후예로 사문진사공(四門進士公) 휘(諱) 원(元)을 중조로 하고 있다. 사문진사공은 고려조에 사문진사 또는 국자진사를 역임했다. 밀성대군(密城大君 휘 언침)의 10世 支孫(시조 39世孫)으로 태사공(太師公) 언부 (彦孚)의둘째아들諱義臣의長子다. 5대 전(傳)하여 정승공(휘 화)의 사남 휘 인익(仁翊)은 고 려조에 간의대부(諫議大夫)로 고려가 기울자 이성계가 조선 을 개국함에 따라 이에 따르지 않고 전북 김제로 낙향 조카인 정재공과 함께 불사이군의 충절을 지켜 충절의 모범을 보였 다. 이에후손들은갈충공파이전간의대부공파라고도한다. 간의대부공의 증손 윤림(允林)은 한성부판윤이고, 그의 아들 명산(命山)은 덕천군수(德川君守)를 지냈 다.5대손호(虎)는무과(武科)에오르고병절교위용 양위부사과, 상장군을 지내고 가선대부 형조참판겸 오위도총부부총관에 증직되고, 정부인 경원박씨(慶 源朴氏)와의 사이에 갈충공은 1551년(명종6, 辛亥) 년에독자로태어났다. 공은 태어날 때 아름다운 기질을 타고나 기개가 호 탕하고 아울러 문재(文才)가 있었는가 하면, 필력(筆 力)도 굳건하였다. 처음에 과거 공부를 하였으나 잘 되지 않자 포기하고 무과를 보아 2등으로 합격하였 고,같은 해에 또 중시(重試)에 합격하여 곧바로 선전 관(宣傳官)에 임명되었다가 기장 현감(機張縣監), 사헌부감찰(司憲府監察)을 역임하였다. 어머니 상 (喪)을 당했는데, 이후 3년 상(喪)이 끝나자 형조좌 랑(刑曹佐郞)을 거쳐 정랑(正郞)으로 승진하여 호조 (戶曹)로 옮기는 등 문무반직을 두루 거쳐 문무를 겸 전(兼全)하였다는평이이어졌다. 이후 절충 장군(折衝將軍), 부령부사(富寧府使), 임진왜란 당시 광해군(光海君)이 세자(世子)로서 조 정을 나누어 거느리고 군사를 어루만지면서 공을 호 행장(護行將)으로 삼았다가 승정원 동부승지(承政 院同副承旨), 병조참의(兵曹參議)로 발탁하였는데, 이는무관반열에서최고의선발이었다. 계사년(癸巳年, 1593년 선조 26년)에 진주 목사(晉 州牧使)에 임명되었는데, 그때 왜적이 부산(釜山)으 로 물러가 웅거하고 있었다. 진주는 영남(嶺南)과 호 남(湖南)의요로(要路)에위치해있어군사의사무가 복잡하였고 요구하는 것도 갖가지로 많았으나 공이 차분히 수응하여 여러 장수들의 마음을 잃지 않았는 데, 충무공(忠武公) 이순신(李舜臣), 충용장(忠勇 將)김덕령(金德齡)과 가장친하였다. 갑오년(甲午年, 1594년 선조 27년)에 공이 관찰사 (觀察使)의 비위를 거슬러 파직되자 원수(元帥,이순 신)가 자기의 막하(幕下)에 두었다. 어느 날 김덕령 등을 불러 그로 하여금 공과 같이 무예를 겨루어 보도 록 하였는데, 공이 항상 과녁을 꿰뚫었으므로 원수가 공을 응양도별장(鷹揚都別將)으로 삼았다. 그 뒤 해 안에서 싸울 때마다 공이 세운 공로가 가장 많았다. 이순신이 조정에 요청하여 공을 주사 조방장(舟師助防將)으 로 삼 아 연 해 안 다 섯 고 을 을 떼 어 관 할 하 도 록 하 였 고 그 뒤 한 산(閑山)븡장문(場門)븡영등(永登)븡견내량(見乃梁)의 전투에 참여하여모두승전하였다. 그러나 충무공이 참소를 받아 하옥(下獄)된 바람에 공의 공 로도 드러나지 않고 말았다. 상주목사(尙州牧使)ㆍ광주목사 (廣州牧使)를 거쳐 회령부사(會寧府使)가 되었다. 이는 북방 의백성이왜적에게빌붙어두왕자(王子)를붙잡아그들에게 주어 미끼로 삼고 있어 조정에서 걱정하였기 때문에 회령에 임명한 것이었다. 공이 방도 있게 어루만지고 방비하니, 오랑 캐들도 귀의한 자가 있었다. 그런데 대사헌(大司憲) 홍여순 (洪汝淳)이 탄핵하여해임하였다. 공이 신축년(辛丑年, 1601년 선조 34년) 6월 10일에 집에서 세상을 떠나 양주(楊州) 마산(馬山) 자좌(子坐)의 자리에 묻 히었는데, 부인 이씨(李氏)도 그 곁에 묻히었다. 부인 태안이 씨는 군수(郡守) 이세준(李世俊)의 딸이 다. 후배(後配)는 순 천이씨이다. 특히 갈충공은 변방의 오랑캐 이탕개(尼湯介)를 소탕하는 데 크게 공헌하면서 무장으로서 책임을 다하였고, 갑신년(甲 申年,1584년 선조 17년)에 비변사(備邊司)에서공이문무(文 武)를 겸전하여 북방을 진압할 수 있다고 추천하는 등 문재 (文才)가뛰어난관료로명성을떨쳤다. 갈충공은 슬하에 4남 3녀를 두었는데, 큰아들은 바로 풍천 부사(휘 영신)이고, 둘째 아들 휘 영민(榮民)은 일찍 죽었고, 셋째는통덕랑공(휘영로),넷째는통정대부(휘영방)로이중 장자풍천부사를지낸충장공후예가가장번성하였다. △충장공휘영신계(系) 충장공은 갈충공의 장자로 무인년(선조10, 1578) 12월3일 에 태 어 났 다 . 1 6 0 5 년 (을 사 ) 무 과 에 올 라 선 전 관 을 거 쳐 웅 천 현감에 제수되었다. 그 때는 임진왜란의 뒤라 정성껏 고을 백 성을 무마하여 인심이 순후해지니 도지사가 광해조에 글을 올려 칭찬했다.1614(광해군6)년 광해군이 영창대군을 죽이려 는 것을 반대하다가 위원(渭原)에 유배되었는데, 그곳은 후 금에 가까운 지역으로 그가 힘센 무장이라 변을 일으킬 것을 염려하여다시진도로이배되었다. 1623년 인조반정으로 오위장이 되었다가 곧 경원부사가 되 었으나 노모봉양을 위하여 가까운 곳으로 가기를 원하여 회 양부사(淮陽府使)를 제수하도록 했으나 그것도 거리가 멀어 서왕의배려로풍천부사가되었다. 이듬해 이괄의 난이 일어나자 고군(孤軍 : 수가 적고 도움 이 없는 외로운 군대)으로 평산의 기탄을 방어해 반란군의 서울 직행을 저지하려 하였다. 하지만 모든 장수들이 반군을 바라보고 먼저 도망했고 저탄수장(猪灘守將) 또한 도주해 숨었다. 이괄의 군사와 충돌하여 그 선봉을 당하지 못하고 또 도신 이 미처 어찌할 사이도 없이 매우 급작스럽게 실조하여 공과 적진을 나누어 맡기지 않거늘 공이 도신을 보고 눈물을 흘려 말하니 도신이 기탄을 지키도록 하더니 얼마 후에 도신이 산 성을 같이 지키고자 돌아오라 재촉하니 대게 공의 충용함을 의지하고자함이었다. 뱚파조별 약사 밀양박씨갈충공파(竭忠公派) 갈충공파종중의요람(搖籃)인남양주시이패동과 선영(先塋)전경 갈충공파는 갈충(竭忠)이란 명칭에서도 나타나 듯 충을 다 한 것으로 충효지사(忠孝之士)가 이 어지는 보기 드문 가문으로 유명하다. 경기도 남양주시 이패동을 중심으로 강원 원주, 경남 밀양,경북청도등에세거하고있는갈충공파의 문호는 임진왜란을 겪으면서 몸소 왜적을 무찌 르며 정의로움을 보인 무장으로 여진족의추장 니탕개의난을진압하는등충의(忠義)의인물로 꼽히는 휘 종남(宗南) 公으로부터 문호를 열고, 그의아들충장공(휘영신)과손자(휘지병)에이 르러 충신과 열녀, 효자 등정려(旌閭)가 내려짐 으로서명문가로서그위치를확고히하고있어 소개해본다. 뱚갈충공파 연원(淵源) 갈충공묘역(남양주시이패동선영) 뱚갈충공파 선원세계(璿源世系) 충장공 박영신 선생 묘 역 충장공과 부인광주이씨,아들효자공지병정려 뱚갈충공파 이하세계(世系) 뱚▶7면으로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