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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8월31일 월요일 4 (제164호) 서원탐방 한빛신문은 성손여러분이함께 만들어가는소중한자산입니다 1인 2명의 구독자 배가운동븡자녀들에게 신문보내기 운동에 적극 동참 하시어 한빛신문이 더 많은 자료를 만들어 후손들에게 물려줄 수 있도 록힘을실어주시기바랍니다 뱚※성손여러분이납부하여주신구독료는신문발행에큰도움이됩니다. 구독료및후원금계좌453013-55-000691농협한빛신문뱚 2007년부터본보에150회에걸쳐연재된 蘆江선생 한자이야기 가책으로발간되었습니다 蘆江선생한자이야기는무너져내리기쉬운오상(五常)을깨우쳐주고 근본(根本)을제시하고있습니다. -정가20,000원 뱚 뱚※제보및구독신청안내:053-588-7300,070-4250-0078 뱚뱚 Fax053-581-0067 e-mail:parkss1012@hanmail.net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전남순천시상사면흘산리동백마을에있는이천서원은18 27년(순조 27) 호남 유림이 발의하여 조선 중기의 문신 박세 희(朴世熹, 1491~1530), 박증손(朴曾孫, 1496년~1573), 박대 붕(朴大鵬,1525~1592)등 상주박씨 3인의 유풍(儒風)을 추모 하기 위하여 건립하였다. 1868년(고종 5) 서원철폐령으로 훼 철되었다가 1961년 후손들이 기금을 모아 옛 자리에 복설하 였다. 건물은 외삼문과 동백정, 내산문과 이천사, 이천서원 (강당), 관리동으로 구성하고 있다. 외삼문을 들어서면 마주 보이는 동백정(冬柏亭)은 서월철폐령으로 훼철됨에 따라 신 주를 모시고 제사하였던 곳으로 보인다. 동백정 왼쪽 문 위에 적선여경(積善餘慶)이라고 적은 현판으로 보아 많은 사람들 이 이곳에서 복을 누렸을 것으로 짐작된다. 정면 오른쪽 문위 에는 목판에 새긴 ‘운곡선생원운븯(雲谷先生元韻)이라는 7언 율시가걸려있다. 사당과강당은나란히일자형으로되었는데,내삼문으로들 어가면 제향공간인 사당 이천사(伊川祠)와 강학의 공간인 강 당이 있다. 이천사는 왼쪽의 산기슭을 제외하고 삼면에 돌담 이 있으며, 서원 강당은 오른쪽으로 돌담이 있으나 그 외에는 모두개방하고있다. 경내에 있는 ‘영모단이천사기적비븯(永慕壇伊川祠紀蹟碑) 에 서원의 내력을 기록하고 있다. 서원이 있는 동백마을은 16 세기 중반 이 마을에 정착한 박동수(朴東秀) 公이 이천위에 동백나무를 심고 우거하며 동정(冬亭)이라 자호하는데서 비 롯되었다.동정공은성리지학에밝고후진을지도하고장려하 였으며, 겨울추위에도 변하지 않은 절개와 뜻을 함께한 동백 나무를심어온것은배향선조의고절(孤節)을연상케해볼수 있을 것 같다. 한편 이천사라 이름 한 것은 순천부 서쪽 10리 지점에와룡한아래이천(伊川)가에있어이천사라이름지은 것이다.축문과 의절(儀節)은 우암 송시열의 6대손인 강재(剛 齋)송치규(宋穉圭,시호문간)선생이지었다. △도원재(道源齋)박세희(朴世熹) 박세희(朴世熹)선생의 본관은 상주, 자는 이회(而晦) 호는 도원재(道源齋), 고려 말(高麗末)에 불사이군(不事二君)의 충절(忠節)을 지킨 명사(名士)이셨던 상암(商巖 諱安義)공 의 증손(曾孫)으로 천성이 굳세고 정직하여 본시 중망(重望) 이있었는데과거의방목(榜目)이나아감에조정에서모두사 람을얻었다고하례(賀禮)하였다. 중종9년(1514년)에 24세에 별 시문과(別試文科)에 장원급제 (壯元及第) 이후 호당(湖當에 뽑혀 수학한 다음 5년간에 걸쳐 홍문관(弘文館) 수찬(修撰), 사 간원(司諫院) 정언(正言), 이조 (吏曹)좌랑(佐郞), 충청도도사 (都事), 사헌부(司憲府)장령(掌 令), 홍문관(弘文館) 응교(應 敎), 사간원(司諫院) 사간(司 諫) 등에 봉직 하는 등 조정에서 신예 신료로서 주목을 받고 있었 다. 정암(靜菴, 조광조)과 함께 오 랫동안 경연(經筵)에 있으면서 나라 다스리는 법도를 상론해 왔던 선생은 승정원(承政院) 좌부승지(左部承旨)로 있을 때 에 입시(入侍)하여 주강(晝講-임금 앞에서 하는 낮 강의)시 에 “지금 인물이 가히 모든 관직에 있어 세도(勢道)를 유지하 고 있어 재주와 덕이 성취되고 경륜의 큰 업(業)을 닦은 이가 적다” 면서 정암(靜菴) 선생의 인물됨에 대해 “젊어서 김굉 필(金宏弼)을 스승으로 섬겨 배우더니 장성하여서는 스스로 분발하여 도학에 전념하여 장구(章句)에 구애하지 않고 의리 를 탐구하니 세상에서 헐고 비웃는 사람이 많아 혹은 미친 사 람이라 하고 혹은재앙(災殃)의모태(母胎)라하여 벗들이 다 절교하고 사귀지 않았습니다. 광조가 이 때를 당하여 뜻을 세 워 더욱 돈독히 하여 조금도 흔들려 굴하지 아니하고 비로소 그학문으로써창도(倡導)하니후생이따르고감격하는자심 히 많 았 으 며 신 (臣 )의 학 문 이 개 발 된 것 도 또 한 이 사 람 때 문 이다"라며중용할것에대한장계(狀啓)를올려그뜻이받아 들여져 선생은 정암 조광조선생과 함께 도학정치를 강력히 추구하게되었다. 선생은악을미워하길원수같이하였으니 당대에위세가등 등하였던 남곤(南袞)이 본시 사람됨을 미워하여 일찍 여럿이 모인 좌석에서 직접 그 간사함을 배척하고 소인들을 바른 의 론으로서 용납지 않으니 정암 선생은 9세나 연하되는 선생을 븮나의 경외(敬畏)하는 벗븯이라 할 정도로 개혁신료들 중 좌장 과 같은 역할을 하였다. 그러나 방만하게 남발되었던 중종반 정(中宗反正)의 공훈에 대해 위훈삭제(僞勳削除)를 서두르 는등여러면에서급격한개혁에피해를보게된소인배(小人 輩-훈구파 신료)들, 특히 남곤(南袞) 심정(沈貞) 등 이적(二 賊 - 두 역적)을 중심으로 조광조의 혁신정치에 반발한 훈구 파 신료들이 동료인 홍경주(洪景舟)의 딸 희빈(熙嬪)과 짜고 나뭇잎에 꿀로 븮주초위왕븯(走肖爲王)이라는 글씨를 써서 그 것을 벌레가 먹게 하여 走와 肖라는 글자를 합치면 븮趙븯자가 됨을 이용하여 븮조씨가 왕이 된다븯로 풀이해 백성이 조광조를 왕으로 세우려 획책한다는 말을 궁중에 퍼뜨리는 잔꾀로 중 종의 마음을 움직여 개혁정치를 서둘렀던 조광조를 중심으로 하는 신진 사림계 신료들을 일거에 타도하려 할 때 영의정 정 광필이 울면서 만류함에도 결국 정암 선생은 사사(賜死)되고 선생 등은 정상(鄭相-정광필) 간청으로 귀양을 가게 되어 선 생은상주로유배되었다. 상주 유배 이후에도 여러 간신들이 또 서로 임금에게 무고 하여 조광조가 지난날에 박세희의 무술이 특출함을 열거하며 병조판서를 제수(除授)할 것을 청한바 있었으니 앞으로도 비 상한 일을 도모 할 수 있음이라며 참소(讒訴)하여 상주 땅에 유배되어 있던 성생을 다시 극북(極北)의 변방에 있는 강계 (江界)로 이배(移配)시켜버렸다. 선생이 사어(射御-활쏘고 말타는 무술)를 배우지 않았었으나 능숙하니 사람들이 문무 를 겸한 인재라 하였는데, 이를 참소의 교묘한 구실을 삼았던 것이다.이와 같이 선생께서 어린 나이에 도를 들어 뜻을 세움 이 심히 견고하여 불행히 일찍 높은 과거에 올라 임금의 특별 한 총애를 입어 학문을 궁구하고 행의를 실천하는 실력을 크 게 떨치지 못하고 또 강직한 배짱과 곧은 말로서 간신의 노여 움을 사서 마침내 북문(北門)의 사화를 만났으니 때에 나이 2 9세였다. 유배 중에도 선생은 오히려 경적(經籍 -성인이 지은 책 즉 사서오경)으로 스스로 날을 보냈으며 그 중용(中庸)과 대학 (大學)에 공력들임이 더욱 많았으나, 임오(壬午-중종 17년- 서기1522년)에 모친의 부음(訃音)을 받고 통곡하며 마지막 가시는 길에 효행을 행하지 못함으로 슬퍼함이 과하여 병이 더 악화되어 1530년(庚寅,중종 25년) 7月 7日마침내 적소(謫 所)에서돌아가시니향년겨우40세였다. 중종께서 만년에 마음이 점점 깨우쳤으나 돌아가시고 인종 께서즉위하여비로소선생이복관(復官)되고그후가선대부 사헌부 대사헌 겸 동지경연춘추관성균관사 홍문관제학의 증 직을 내리셨다. 또 영조 22년 병인(서기1746년)에 영의정 김 재로(金在魯),좌의정송임명(宋寅明)등이나라에아뢰어기 묘명헌(己卯名賢)으로 학문과 절의가 특이한 분 18인을 해당 관서에 명을 내리어 증직(贈職)과 증시(贈諡)를 청하니 임금 께서 쫓으시니 선생께서도 같이 자헌대부, 이조판서 겸 지경 연 춘추관 성규관사 홍문관 대제학, 예문관 대제학 오위도총 부도총관 세자좌빈객의 증직을 받게 되었고, 문강(文剛)이라 는시호를받게되었다. 선생의 묘소는 남양에 있는 백형인 송촌공의 묘소 왼쪽 을 좌(乙坐)의 언덕에 반장(返葬)되었고, 위패(位牌)는 선생을 추모하기 위해 남양현감(南陽縣監) 민중기(閔耆重)공이 현 종 8년에 묘소 인근에 창건한 안곡서원(安谷書院)에 배향(配 享)되었으며,그직후선생의스승이자백형(伯兄)인송촌(松 村)공 휘 세훈(諱世勳)과 동향(同享)하게 되어 지금도 매년 문중인사들과 남양의 유림 및 이 지역 문화원장 등이 춘추로 대제를올리고있다. △운곡(雲谷)박증손(朴曾孫) 박증손(朴曾孫)의 호는 운곡당(雲谷堂)으로 운곡공으로 불리고, 1496년 경기도 남양에서 태어났으며, 기묘명현으로 순천지역입향조이다. 천성(天性)이 침착하고 품행이 확실하더니 배워 물으며 힘 써 기억하여 문예(文藝)를 일찍 이루어 관례 전 사마시에 합 격하여 족대부 도원재(휘 세희) 선생을 배알하니 흠연(歆然, 마음이 크게 움직여)하는지라 마음이 기꺼이 이르기를 ‘도 (道)가 이에 있다.’하고 즉일로 공명(功名)의 업(業)을 물리 치고 그 문하에 들어가 경전(經傳)을 강토하며 항상 소학(小 學)으로 자신을 단속하여 진퇴와 언동을 고훈(古訓)에 한결 같이 쫓으니 도원재공이 항상 사랑하고 소중하게 여겼다. 이 때에정암조광조선생이일찍도원재와더불어교유(交遊)하 는데 공(公)이 종일토록 모시고 앉아 있되 거동이 단정하니 선생께서 한번 보시고 기이하게 여기시어 말씀하시기를 ‘군 자(君子)는 저 같은 사람이다.’하면서 인하여 소학(小學)의 방도(方途)를 묻는데 공이 응대(應對)함이 보는 것과 같거늘 선생이 도원재를 돌아보며 말하기를 ‘이 아이를 가히 사랑하 여반드시선도(善導)한다면그큰그릇이되리라’하였다. 기묘사화가 일어나 선류(善類, 착한 인재)가 거의 다 잡혀 죽게 되어 도원재공께서 강계로 유배길에 오르는데 公이 이 별에 임(臨)하여 정이천(程伊川)선생이 오강의 자발지승(정 이천이 유배중 온갖 고초를 격으면서도 돌아올 때 에는 수염 과 모발이 그전과 같았으므로 모두들 학문의 힘에 탄복했다 는 뜻에서 유래함)으로 더욱 힘쓸 것을 말하니 도원재께서 또 한 주자(朱子) 해돈지의(晦遯之義, 숨어들어가 지키는 義)로 경계하여 말하기를 “세도(世道,세상을 올바르게 다스리는 도 리)의 병이 날로 깊으니 너는 모름지기 영진을 구하지 말라” 당부하여 십여년간 몸을 감추고 도학에 전념하던 차 1530년 도원재공의 부음을 듣고 단신으로 강계로 가서 시신을 수습 하여 남양으로 운구 안장한 후 부인 청주한씨와 아들 기(奇), 매(梅) 형제와 가족 그리고 사위 양천인 허형을 대동하고 남 하하여 전남 순천 황전을 거쳐 상사면 쌍지에 정착했다. 이후 족대부 도원재공의 유훈을 받들어 향촌을 자경골 당호를 운 곡당(雲谷堂)이라 하고 평생토록 향리 후세들에게 학문을 강 론하다 1573년 향수 78세의 일기로 영면하니 당대의 큰 사표 가 되었다. 운곡공에 대해 조선후기 문인 강재(岡齋) 정재현 (鄭再玄,조선말기 학자)은 강재문집 6권(발문)에 ‘운곡 박공 유사 뒤에 씀 [書雲谷朴公遺事後]’에서 다음과 같이 기록하 고있어옮겨본다. 븮세상에 상주 박씨(尙州朴氏)가 있다는 것을 아는 사람이라면 어찌 정 숙공(貞肅公)의 강직(剛直)한 절개와 도원재(道源齋)의 학행(學行)의 아 름다움을생각하지않겠는가. 운곡공휘증손(曾孫)은자가태이(太而)이 고정숙공의방계후손으로,도원재의문하에들어가배웠으며정암(靜菴) 조선생(趙先生)에게칭찬을받았으니실제자취를고찰할필요도없이 그 사람됨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아! 공은 세가(世家, 대대로 나라의 중요한 자리에있거나큰녹을받았던집안을이르는말)자제(子弟)로 일찍사마 시에합격하여문장과 행실이 모두유명하였으나만난 때가불행한 데도 어진스승의가르침도있어서더이상과거시험에나아가지않았다. 스승 이 귀양지에서돌아가시자먼시골로 가서은거하여새집에옛당호를걸 고서는 경전과 역사를 혼자 즐기고 충효로 가르치면서 종신토록 원망과 후회가 없었으니 진실로 수양한 것이 두텁고 지키는 것이 튼튼하지 않은 사람이 아니면어찌이러하겠는가. 애석하게도증거로 세울 문헌이 없어 서 그 학문의 본말을 자세히 알 수 없다. 산 이름이 운곡(雲谷)이고 마을 이름이 자경(自京)인 것은 모두 공에게서 나왔으니 당시 사람들이 공을 존경하고 사랑한 정도를 상상할 수 있을 것이다. 또 공의 후손인 주부(主 簿) 대붕(大鵬)은 일찍이 진사(進士)로 선묘(宣廟) 기축년(1589, 선조22) 에 정암수(丁巖壽) 등이 소를 올릴 때 참여하고 임진왜란 때에는 의병을 이끌고왕실을지키기위해노력하기도하여원종(原從)공신에책록되었 으니 비록 충의(忠義)가 떳떳한 본성에 근거하겠지만 집안 대대로 전해 온 가르침이 있다는것도또한 속일수없을것이다.공의후손정일(禎一) 은 나를 따라 배우는데 어느 날 공의 유사(遺事)를 가지고 와서 보여주었 다. 받아서 읽어보고 감개한 나머지 이 글을 뒤에 써서 부지런한 뜻에 감 사한다.븯 △남포(南浦)박대붕(朴大鵬 남포공 박대붕은 병절교위 부사맹 휘 매(梅)와 숙인 청주양 씨와의 사이에서 1525년 태어났다. 효성과 함께 불의를 보면 참지 못하는 강직한 성품으로 사마시에 급제하여 주부로 내 금위승위부위에봉직하였다.1589년 정여립의변란인기축옥 사(己丑獄死)때에상소를올렸다가투옥된후풀려나낙향하 였다. 당시 상소는 간신을 소탕해야 한다는 것인데 오히려 간 신들에 의해 투옥된 것이라 하겠다. 이때 올린 상소는 대부분 호남 유생들로 진사(進士) 정암수(丁巖壽)븡박천정(朴天挺)븡 박대붕(朴大鵬)븡임윤성(任尹聖)븡김승서(金承緖)븡양산룡(梁 山龍)븡이경남(李慶男)븡김응회(金應會)븡유사경(柳思敬)븡유 영(柳瑛)등이다.고봉 기대승과 교유(交遊)하였으며,시(詩) 에 뛰어나 많은 시문을 남겼을 것으로 짐작하지만 전해지지 않고고봉선생의죽음에5언4수의장문의만사(挽詞)가고봉 전서(高峯全書) 2권 만장편에 전해지고 있는데 그 구절이 애 절하고 고봉에 대한 연민이 잘 드러나고 있다.그리고 문장 또 한뛰어나문무를겸했다할것이다. (만시참조)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병창의한사실이호남의병 사에 전해진다. 중봉 조헌, 제봉 고경명과 함께 금산전투에서 많은 왜적을 물리치고 장열하게 전몰하였으니 상사 동백 와 룡산 아래에 초혼 장사했다. 남포공의 활약상은 금산사재 절 의록,호남절의록에 전해지고 원종공신 3등에 책록되었다.남 포공의 기축,임진 두 절의과 천고의 유풍을 세운 행적을 기리 기 위해 이천서원에 족대부 도원재공, 조부 운곡공과 함께 배 향되었다. 【고봉기대승에대한輓詩,박대붕(朴大鵬)】 하늘이 만들어 낸 저 무등산(天作山無等, 천 작산무등)/ 최 정상 산봉우리 기묘하구나(奇峯最上頭, 기봉최상두)/ 천지 음양 기운이 감돌아(扶輿二儀氣, 부여이의기)/ 오행이라 그 흐름 충만하여라( 왈 五行流,앙알오행류)/높고 밝은 하늘 에 솟아오르고(標挺高明域, 표정고명역)/ 넓디넓은 땅속에 뿌리 뻗어서(根蟠廣博 , 근반광박추)/ 우뚝할사 언덕마루 뛰어넘었고(嵯峨超培 類,차아초배루)/드높아라 숭구라도 맞 먹 고 말 고 ( 崔瑩嵩丘,최줄질숭구)/맑은 옥 그림자 남해에 비끼고(玉影橫南海,옥영횡남해)/상서로운구름 전역을 비추 네(祥雲映九州, 상운영구주)/ 강풍 몰아쳐도 흔들리지 않고 (剛風吹不動, 강풍취부동)/ 짙은 안개 덮어도 가릴 수 없어라 ( 쳄霧蔽無由, 음무폐무유)/ 멀리 연봉의 달과 맞닿아 있고(逈 接蓮峯月, 형접련봉월)/ 멀리 태악의 가을과 잇닿았는데(遙連 泰岳秋,요련태악추)/봄날에 지초 난초 향기 토하고(芝蘭春馥 郁, 지란춘복욱)/ 풍설에 솔과 잣이 쏴쏴 운다네(松柏雪씔 , 송백설수류)/종산의 험준함은 진작털어 버렸고(已碎鍾山險, 이쇄종산험)/귀곡의 유심함은 아예없는데(初無鬼谷幽,이쇄 종산험)/ 천하를 작게 봄은 노에 오름이요(小天登自魯, 소천 등자로)/ 바다를 보았나니 식견이 추와 통했네(觀海見通鄒, 관해견통추)/ 우뚝함은 한진이 될 만도 하고(赫可爲韓鎭, 혁 가위한진)/거대함은 보후가나기에마땅하지(蔥宜降甫侯,총 의강보후)/단심은백악을향해 기울고(丹心輸白嶽,단심수백 악)/인의는동주에뜻을두었네(仁義志東周,인의지동주). 온화한 빛 명봉을 맞아들였고(和色迎鳴鳳, 화색영명봉)/ 향기로운 바람 취유를 제거했는데(馨風拔臭 찬,형풍발취유)/ 공동에서 거마를 멈추어 서고( 꼰뚫 期挽駕, 공동기만가)/ 요 포로 돌아가리 마음먹었네(瑤圃誓回 퍅, 요포서회주)/ 해와 달의 광명을 열고 닫으며(日月 켯開闔, 일월재개합)/ 음양의 조화를 수답하면서(陰陽此獻酬,음양차헌수)/구름을 일으키 고 단비도 내려(興雲兼致雨, 흥운겸치우)/ 상서 만들고 길운 빚었네(生瑞且陶休, 생서차도휴)/ 남쪽의 천주로 길이 간주 하였고(永擬南天柱, 영의남천주)/ 북쪽의 두우로 한창 우러 렀는데(方瞻北斗牛, 방첨북두우)/ 어찌하여 두 기둥 꿈을 꾸 어서(如何兩楹夢, 여하량영몽)/ 우리 유가 근심으로 변했단 말가( 붕作孔門憂, 번작공문우)/ 무너져 내린 사록에 통곡 심 하니(哭甚崩沙鹿, 곡심붕사록)/ 밀려오는 초휴를 누가 당하 리(疇堪壓楚 , 주감압초휴)/ 쓸쓸한 천지에 속절없이 섰 노라니(乾坤空獨立, 건곤공독립)/ 떨어진 맥 하염없이 서글 프기만(墜緖慨悠悠,추서개유유). 이 세상에 참 남자 몇몇일런고(世幾眞男子, 세기진남자)/ 선생이 그중에서 우뚝하여라(先生獨擅雄,선생독천웅)/마음 은 성정 위에 보존하였고(心存誠正上, 심존성정상)/ 기운은 호연지기에서 우러나왔네(氣發浩然中, 기발호연중)/ 환로에 선 이름 구하기 멀리하였고(宦海求名倦, 환해구명권)/ 학문 에선 도에 들기 깊이 하였네(書林入道 , 서림입도궁)/ 사람 들은 범에게 물은 말을 가지고(人將問虎語, 인장문호어)/ 전 하여 몽매한 자들 깨우쳤다네(傳作啓 綠蒙, 전작계군몽)/ 기 맥은 서로 통하는 자 찾는 법(聲氣相求合, 성기상구합)/참으 로 알아준 분 퇴옹 계시어 (眞知有退翁, 진지유퇴옹)/ 공통된 견해는 격물에 있고(一揆存物格, 일규존물격)/ 합치한 덕은 신통에 있었네(合德在神通, 합덕재신통)/ 전해 오는 남녘의 맥 끊어져 버려(道絶曾南脈, 도절증남맥)/ 첫째가는 산봉우 리 무너진 뒤에(山頹第一峯, 산퇴제일봉)/ 연달아서 나라 쇠 할 재앙 만나니(連逢邦殄 , 련봉방진췌)/ 어디서 높은 풍 도찾아볼건가(何處遡高風,하처소고풍). 우리 동방 가르침 이루어 놓아(成敎吾東國, 성교오동국)/ 넉넉하게 예의가 나타났는데(優優見禮儀, 우우견례의)/ 몇 년 수명 하늘이 허락 아니해(數年天不假, 수년천불가)/ 하룻 밤 새 우리 도 부칠 데 없네(一夕道無依, 일석도무의)/ 용 사 라진 날 구름은 쓸쓸해지고(雲冷龍亡日, 운랭용망일)/ 범 가 버린 때 바람은 힘이 없어라(風殘虎逝時, 풍잔호서시)/ 이내 후생 눈물을 뿌리는 뜻은(晩生揮淚意, 만생휘루의)/ 모두가 공과 사를 위하기 때문(都只爲公私, 도지위공사)/ 나라 다스 릴 뜻은 속절없이 되었고(已矣經邦志, 이의경방지)/ 세상 구 제할 기대 쓸쓸해졌네(蕭然濟世期, 소연제세기)/ 강호는 흘 러 흘러 다함이 없고(江湖流不盡, 강호류부진)/ 천지간에 한 스러움 끝이 없어라(天地恨無涯, 천지한무애)/ 평소의 각별 한 정 그리워하고(爲憶平生處, 위억평생처)/ 꿈속에서 자주 서로 만나 본다오(時多夢裏隨, 시다몽리수)/ 어찌 알랴 서울 의 한 번 이 별 이 (那 知 京洛別, 나지경락별)/ 뜻밖에도 영원한 헤어짐될 줄(忽作永離違,홀작영리위) 동백마을이천서원 <전남순천시상사면동백길56> 이천서원 전경, ①이천사 ②강당 ③내삼문 ④동백정 ⑤기적비 ⑥외삼문 ⑦관리사 동백마을전경,동백마을은이 마을에정착한 박동 수(朴東秀)公이 이천위 에동백나무를심고우거하며동정(冬亭)이라자호하는데서비롯되었다. 뱚▶배향인물 도원재공신주,사당내부의벽화 는 소나무를 소재로 하여 배향 인물의절의를상징하고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