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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6월30일 화요일 12 (제162호) 기획 조선시대를 거쳐 근 현대사에 이르기까지 몸을 바쳐 충을 실천하고 절의로서 모범을 보여 온 훌륭한 위인들 이 즐비하다.또 그들이 있었기에 지금이시대가존재한다고보아야 할 것 같 다 . 최 근 들 어 서 는 연 평 해 전 용사들의조국수호의의지는곧충(忠)을실천하였다고 할 수 있 다 . 이 같이국가에전란이일어났을때분연이일어나싸워온선열들의고귀한삶을본받아야할것이다. 조선제16재임금인조,반정을명분으로왕위에올랐지만,인조는논공행상에불만을품은반정공신이괄의반란으로즉위1년도못돼한양을 떠나야했다.조선시대를통틀어내부반란으로도성이점령된것은이때가유일했다.이괄의도성점령은전광석화처럼순식간이었다.충장 공박영신장군은이괄의난에모든장수들이도망가거나의지를잃고있을때적들의한양진격을막기위해얼마되지않은병력으로고군분 투하다사로잡혀온갖회유에도굴하지않고오히려반란군을크게꾸짖는등절의(節義)를지켰으며,부인광주이씨는목숨을걸고전쟁터에 서목이없는 남편의 시신을 찾아수습하여집으로돌아왔다.그리고 아들지병·지원·지번3형제는 아버지의 원수를 갚으면서 효를실천하여 한집안에서충신과열부효자5명이정려를받았으나이또한드문일이기에소개해본다. 충장공의 휘는 영신(榮臣)으로 字는 인보(仁 甫) 號는 지천(芝泉)이다. 밀성대군 후예로 중조 사문진사공(四門進士公)의 휘(諱)는 원(元)으로 고려조에 사문진사 또는 국자진사를 역임했다. 밀성대군(密城大君 휘 언침)의 10世 支孫(시조 3 9世孫)으로 太師公 언부(彦孚)의 둘째아들 諱 義 臣의 長子다. 5대 전(傳)하여 정승공(휘 화)의 사남 휘 인익 (仁翊)은 고려조에 간의대부(諫議大夫)로 고려 가 망함에 따라 전북 김제로 낙향 조카인 정재공 (휘 의중)과 함께 불사이군의 충절을 지켜 충절 의 모범을 보였으며, 공의 넷째 휘 구(球)는 윤림 (允林), 의림(義林)을, 윤림(允林)은 한성부판윤 으로 아들 휘 서(曙)와 명산을 낳으니 차남 명산 (命山)은 덕천군수(德川君守)를 지내고 휘 종 (種)을 낳으니 사헌부 감찰이다.이분이 공의 6대 조이다. 5대조의 휘는 훈(薰)으로 통훈대부 영흥 판관 승정원 승지이고, 고조의 휘는 효간(孝幹) 으로 증 호조판서로 행 돈용교위(敦勇敎尉), 증 조부의 휘는 세형(世馨)으로 통정대부 영흥판관 으로 가선대부 호조참판에 추증되었으며, 조부 의 휘(諱) 호(虎)는 무과(武科)에 오르고 병절교 위 용양위부사과, 상장군을 지내고 가선대부 형 조참판겸 오위도총부부총관에 증직되었고, 아버 지는 임진왜란을 겪으면서 몸소 왜적을 무찌르며 정의(正義)로움을 보인 무장으로 여진족의 추장 니탕개의 난을 진압하는 등 충의(忠義)의 인물로 꼽고 있는 갈충공 휘 종남이고, 어머니는 태안이 씨는 군수(郡守)이세준(李世俊)의 딸이다. 충장공은 만력 무인년(선조10, 1578) 12월3일 에 태어났다. 외양은 순하나 속은 강하여 어려서 부터 굳은 절개가 있다 하였다. 부모 병환에 손가 락 째 어 피 를 내 어 들 이 는 지 극 한 효 성 또 한 갖 추 었다.그리고 용맹함은 조선중기의 무신으로 3,00 0명의 휘하군사로 수만 명의 후금군을 맞아 고군 분투하다가 중과부적으로 패배하고 전사한 김응 하 장군과 같이 대등하다 하였다. 1605년(을사) 무과에 올라 선전관으로부터 웅천현감으로 출사 하였다. 그 때는 임진왜란의 뒤라 정성껏 고을 백 성을 무마하여 인심이 순후해지니 도지사가 광해 조에글올려칭찬했다. 1614(광해군6)년 광해군이 영창대군을 죽이려 는 것을 반대하다가 위원(渭原)에 유배되었는데, 그곳은 후금에 가까운 지역으로 그가 힘센 무장 이라 변을 일으킬 것을 염려하여 다시 진도로 이 배되었다. 1623년 인조반정으로 오위장이 되었다가 곧 경 원부사가 되었으나 노모봉양을 위하여 가까운 곳 으로 가기를 원하여 회양부사(淮陽府使)를 제수 하도록 했으나 그것도 거리가 멀어서 왕의 배려 로풍천부사( 銀川府使)가 되었다. 이 듬 해 이 괄 의 난 이 일 어 나 자 고 군 ( 孤 軍 : 수 가 적 고 도 움 이 없 는 외 로 운 군 대 ) 으 로 평 산 의 기 탄 ( 댔灘 ) 을 방 어 해 반 란 군 의 서 울 직 행 을 저 지 하 려 하 였 다 . 하 지 만 모 든 장 수 들 이 반 군 을 바 라 보 고 먼 저 도 망 했 고 저 탄 수 장 ( 猪 灘 守 將 ) 또 한 도 주 해 숨 었 다 . 이 괄 의 군 사 와 충 돌 하 여 그 선 봉 을 당 하 지 못 하 고 또 도 신 이 미 처 어 찌 할 사 이 도 없 이 매 우 급 작 스 럽 게 실 조 하 여 공 과 적 진 을 나 누 어 맡 기 지 않 거 늘 공 이 도 신 을 보 고 눈 물 을 흘 려 말 하 니 도 신 이 기 탄 을 지 키 도 록 하 더 니 얼 마 후 에 도 신 이 산 성 을 같 이 지 키 고 자 돌 아 오 라 재 촉 하 니 대 게 공 의 충 용 함 을 의 지 하 고 자 함 이 니 라 . 공 이 기 탄 을 지 키 지 않 으 면 적 이 서 울 로 직 행 하 리 라 생 각 하 고 의 로 써 듣 지 않 았 으 니 다 음 날 아 침 에 마 침 내 순 절 한 지 라 , 이 게 1 6 2 4 년 2 월 초 6 일 이 다 . 반 란 군 이 수 도 로 진 격 하 는 것 을 저 지 하 려 하 였 으 나 모 든 장 수 들 이 반 군 을 피 해 도 망 을 가 는 바 그 는 홀 로 반 란 군 을 맞 이 해 언 덕 을 의 지 하 면 서 싸 워 많 은 반 군 을 살 상 했 으 나 화 살 이 다 하 고 활 이 꺾 어 져 사 로 잡 히 고 말 았 다 . 이 괄 은 그 의 용 맹 을 익 히 알 고 있 어 생 포 한 것 을 기 쁘 게 여 기 고 함 께 반 군 에 협 력 할 것 을 백 방 으 로 회 유 설 득 하 였 으 나 끝 내 항 복 을 안 하 자 반 군 의 장 수 이 수 백 ( 李 守 白 ) 이 가 후 환 이 두 려 워 칼 로 그 의 목 을 쳤 으 나 목 숨 이 끊 어 지 는 순 간 까 지 반 군 의 장 수 를 꾸 짖 었 다 . 그 의 목 을 잘 라 서 머 리 를 정 부 군 총 사 령 부 에 보 내 어 항 복 하 도 록 협 박 하 였 다 . 장 군 의 부 인 ( 廣 州 李 氏 ) 이 이 런 비 보 를 듣 고 목 숨 을 걸 고 남 편 을 찾 아 전 쟁 터 로 가 서 마 침 내 머 리 ( 頭 ) 도 없 는 남 편 의 시 신 을 찾 아 혼 자 힘 으 로 메 고 집 으 로 모 시 게 된 것 이 다 . 이 어 찌 전 쟁 터 에 서 남 편 의 수 급 을 수 습 하 기 위 하 여 죽 음 을 무 릅 쓴 만 고 의 열 녀 ( 烈 女 ) 가 아 니 던 가 ? 그러나 청빈한 집안의 내력 때문인지 장례를 치르기 또한 힘들었으나 조정에서 이를 지원했 고, 인조실록에서는 다음과 같이 전한다. 『이중 로(李重老)븡이성부(李聖符)븡박영신(朴榮臣)븡 윤정준(尹廷俊)븡이사주(李師朱)븡권호원(權浩 元) 등에게 증직(贈職)하고, 박영신ㆍ윤정준에 게 장사지낼 물품을 하사하였다. 기탄(岐灘)의 싸움에서 이중로 등은 힘껏 싸우다가 패하여 죽 었고, 윤정준ㆍ박영신은 잡혔으나 굴복하지 않 고 분개하여 역적 이괄(李适)을 욕하다가 난자 당하여 몸에 온전한 살갗이 없었다. 이때에 이 르러 비국(備局)이 박영서(朴永緖)와 마찬가 지로 포증(褒贈)하여서 나라를 위하여 죽은 충 성을 표창하고, 박영신ㆍ윤정준은 집이 가난하 여 아직 염장(斂葬)하지 못하였으니 해조로 하 여금 장례 치르는 물품을 제급하게 하기를 청하 니,상이 따른 것이다.』 그리고 1653년 청 순치 10년(효종 4년) 장군을 정표토록 했는데 이는 효종실록에 나타나 옮겨본 다. 【 이 괄 의 난 때 죽 은 윤정준과 박영신을 정표토 록 하 다 】 『예조가 아뢰기를, 신 이후원(李厚源)이 지 난번 이상안(李尙安)을 정표하는 일 때문에 탑 전(榻前)에서 면대하여 여쭈면서 같은 때에 전 사(戰死)한 복수장(復讐將) 김양언(金良彦)의 일에 대해 언급하며 아뢰기를 ‘이 사람의 전사 는 정표하는 데 부끄러울 것이 없는데, 본조(本 曹)에 문적(文籍)이 없어서 정표의 여부를 알 길이 없습니다. 심지어 고(故) 풍천 부사(豊川 府使) 박영신(朴榮臣)은 이괄(李适)의 변이 있 을 때 저탄(猪灘)의 전투에서 역적을 꾸짖으면 서 굽히지 않다가 죽었는데, 지금 듣건대 당초 정표한 은전이 없었다고 합니다.’ 했더니, 위에 서 다시 더 알아본 뒤에 품처(稟處)하라고 하교 했습니다. 김양언의 일에 대해 관서(關西)에 사문(査問) 하여 보았더니, 그때 이미 벼슬을 추증하고 정려 (旌閭)했다고 하였습니다. 박영신의 일에 대해서 는 [정원일기(政院日記)]를 조사해 보건대, 비국 (備局)의 초기(草記)에 ‘이중로(李重老)·이성부 (李聖符)·박영신(朴榮臣)·윤정준(尹廷俊)·이사 주(李師朱)·권호원(權浩元)이 일시에 패몰하여 전사한 정상에 대해들은 것은 없으나 마음으로 늘 안타깝게 여기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번에 윤정준의 처 이씨(李氏)가 직접 하나의 단자(單 子)를 가지고 직접 본사에 와서 호소하기를 「정 준이 박영신과 동시에 붙잡혔는데 역적 이괄(李 适)을 통렬히 매도하였다.그리고 영신도 그 곁에 서 같은 말로 분연히 매도하자 이수백(李守白)이 항왜(降倭)를 지휘하여 칼을 들어 난자(亂刺)하 게 하였다.」고 했고, 이가 부서지고 혀까지 베임 을 당했다고 했습니다. 이 말이 사실이라면 정준 과 영신은 당연히 박영서(朴永緖, 순천인)와 똑 같이 포증(褒贈)해야 하는데, 전진(戰陣)에서 있 었던 일이어서 증험할 사람이 없습니다. 황해 감 사로 하여금 전진에서 살아서 돌아온 사람에게 상세히 물어보게 한 다음 특별히 증작(贈爵)하는 은전을 가하되, 해조에서 먼저 휼전을 행하게 하 소서. 그리고 영신과 정준의 경우는 집이 가난하 여 아직도 염장(斂葬)을 못하고 있으니, 모두 해 조로 하여금 장수(葬需)를 제급하게 하는 것이 의당하겠습니다.’ 하였는데, 그 즉시 윤허를 받았 었습니다. 이에 의거하여 말한다면 두 사람의 일에는 별 로 다른 것이 없습니다. 그리고 듣건대 옹진(甕 津)의 사인(士人)들이 그 고을의 현령이었던 윤 정준이 국사를 위하여 죽은 정상에 대해 소장(疏 章)을 올렸는데 그 등본(謄本)이 정준의 집에 있 다고 하기에 찾아보았더니, 그 소장에 ‘전쟁에서 패하여 사로잡힌 다음 역적이 그의 무릎을 꿇게 하려 했으나 굴하지 않고 역적을 매도하다가 죽 음을 당했는데 죽는 것을 집으로 돌아가는 것처럼 여겼다.’했습니다.절개를지키다가죽은정상은이 를 미 루어 보 아도 알 수 가 있 는데 , 정표 의 은전 을 그 때 행하지 않은 것이 무슨 이유에서였는지 모르겠 습니다.대신들에게문의하소서."하였다. 전영돈녕이경석(李景奭)이아뢰기를, 뷺이 일에 대한 전말을 상세히 알 수가 없는데 알지도 못하면서 억지로 헌의하는 것은 감히 못 하겠습니다.뷻하고, 영의정 정태화(鄭太和), 좌의정 김육(金堉)은 아뢰기를, 뷺윤 정 준 과 박 영 신 이 동 시 에 절 개 를 지 키 다 가 죽은 정상에 대해서는 사부(士夫)들 사이에 지금 까지 그 이야기를 전하고 있습니다.그리고 [정원 일기]에도 기재된 것이 있으니,두 사람을 똑같이 정표하는 것이 실로 포상하는 법전에 합치됩니 다.뷻하니,따랐다.』 1711년 숙종 임금은 뷺역적 이괄(李适)의 난44 1)때전사(戰死)한사람증(贈)판서(判書)윤정 준(尹廷俊)과 증(贈) 참판(參判) 박영신(朴榮 臣)에게 시호(諡號)를 내리되, 박영신에게는 정2 품으로 올려 추증하라.뷻하였으며, 1717년 (청 강 희 56, 숙종 43) 8월 19일 증(贈) 병조 판서(兵曹 判書) 박영신(朴榮臣)에게는 충장(忠莊)이라는 시호를내렸다. 1803년(순조 3) 12월 18일 공의 처 숙부인 태안 이씨와 아들 박지원·박지번을 정려하고, 당시 함 께 화를 입었던 나해륜의 자손에게 급복(부역이 나 조 세 따 위 를 면 제 하 는 일 ) 하 도 록 했 다 . 당 시 기록을보면다음과같다. 『고(故) 도사(都事) 나덕명(羅德明)과 충장 공(忠壯公)박영신(朴榮臣)의 처 이씨(李氏) 및 그 두 아 들 박지원(朴之垣)·박지번(朴之藩) 을 정려(旌閭)하고, 고 참봉 나해륜(羅海崙)의 자손에게 급복(給復)하였다. 나덕명은 곧 충렬 공(忠烈公)나덕헌(羅德憲)의 백형(伯兄)으로 서, 임진년에 경성(鏡城)에서 귀양살이하고 있 었는데, 평사(評事) 정문부(鄭文孚)와 더불어 의병(義兵)을 일으켜 왜적과 싸워 여러번 승리 를 거두었었다. 박영신은 갑자년에 순국(殉國) 한 후 그 처 이씨는 걸어서 난리 속에 나가 시신 (屍身)을 헤쳐 보고서 떠메고 돌아왔는데, 원수 를 갚지 못한 것을 통분스럽게 여겨 합장(合葬) 하지 말도록 경계하자, 두 아들이 10년 동안 칼 을 갈아 오다가 마침내 흉수(凶씁)를 찔러 죽여 그 머리를 베어 들고 궐문에 나아가 복법(伏法) 되기를 원하였다. 나해륜은 곧 나덕헌의 종질 (從姪)로서, 정유 왜변 때 나이 겨우 15세였는 데, 어버이를 엎고 난리 속에서 도망하다가 왜 적을 만나 붙잡히자, 도리에 의거하여 애걸하니 왜적이 그 효성에 감동하여 놓아 보냈다. 그리 고 갑자년 이괄(李适)의 역변(逆變)과 병자호 란 때에는 의병을 일으켜 전란(戰亂)에 참가하 였다. 이에 예조에서 유생의 상언으로 인하여 복계(覆啓)하여 포장하기를 청하니, 그대로 따 른 것이었다.』 우암 송시열 선생은 공(公) 신도비를 지으면서 “우리 효종대왕 계사년(癸巳年1653) 정월 25일 에 예조판서 이공 후원이 장계에 말하기를 갑자 년 이괄의 난의 변에 풍천부사 신 박영신이 외로 이 겪은 군인으로 평산 저탄에서 적을 막을 때 모 든 장수가 적을 보고 도망치고 저탄을 지키는 장 수도 달아나 바위 사이에 숨거늘 영신이 홀로 적 을 막으니 산으로 알을 누리는 것 같아서 관군은 그들에 밀리어 다 강물에 빠지고 영신이 홀로 언 덕에서 적을 쏘아 사상자 수 없으니 화살 없고 활 부러져 생포되니 괄이 근본 영신의 용력을 아는 지라 산채로 잡음을 기꺼이 하여 같이 일하기를 꼬여 여러 가지로 달래니 영신이 눈을 부릅뜨고 꾸짖어 말하기를 어찌 속히 죽이지 않으오? 내 너 의 소 용 이 안 되 리 라 하 되 괄 은 참 아 가 해 치 못 하는데 적장 이수백이 말하기를 이 사람이 광해 조 때에도 절개로 강직하다 소문났으니 끝까지 우리 소용 아니오 하고 칼로 치며 죽도록 꾸짖기 를 마지않으니 적의 무리도 그 의리에 장하게 여 기더라. 아름답다 박공이여 천성이 즐겁도다. 집에선 효도하여 친병이 단지하고 혼조(昏朝)때 바른 말 로 간신들에 쫓겨나서 10년간 섬에서 죽음도 두 려워 않고 성주(聖主)께서 등극하시니 다시 불러 쓰도다. 병부(符)차고 부사되어 대란을 만났으라 대중은 나와 같이 무너지고 더러는 숨었네. 공이 그 용기를 내어 죽음으로 판가름 했네 생(生)을 버리고의(義)를취(取)하고몸죽고인(仁)이루 니 저 수염 난 여자같이 능히 안 부끄러울까 진운 (陳雲)은 아침에 맺고 여울소리 밤에 오열하네. 이는 공의 여분(餘憤)이 울분이 서렸네. 산악이 높고 강물이 그치지 않을지니 오직 공의 장절(壯 節)은다함이없으리로다. 공의 배 이씨는 자헌 광남군 광악의 딸이요 돈 촌 선생 집의 후손인 탄수선생 연경의 손녀이다. 4남 1녀를 두었는데, 큰아들 박지병(朴之屛)은 봉사(奉事)이고 둘째 아들 박지원(朴之垣)은 첨 사(僉使)이고 셋째 아들 박지번(朴之藩)은 현령 (縣令)이고 넷째 아들 박지용(朴之埇)은 병사 (兵使)이고 딸은 군수(郡守) 이문주(李文柱)에 게시집갔다. 정문(旌門)이란 국가에서 아름다운 풍속을 권장하기 위하여 국가가 모범으로 표창한 충신 ·효자·열녀 등이 사는 마을 입구나 집 문 앞에 세우던 붉은 색의 문을 가리키는 정려문을 말하 며, 작설(綽楔), 홍문(紅門)이라고도 하며 항간 에서는 홍살문이라고도 부른다. ‘忠(충)·孝 (효)·烈(열)’ 등의 글자를 새겨 포창(褒彰)의 종류를 표시하고 해당되는 사람의 이름이나 직 함을 새겼다. 삼정문(三旌門)은 충신(忠臣), 열녀(烈女), 효자(孝子)를 삼정(三旌)이라 하고 이를 기리 기 위하여 모신 정각(旌閣)을 삼정문(三旌門) 이라 한다. 충신은 박공 휘(諱) 영신(榮臣)이 이괄의 난 때 순절(1624)하였고, 열녀는 휘(諱) 영신의 배(配) 정부인(貞夫人) 광주(廣州)이 씨이며, 효자는 휘(諱) 영신의 아들인 휘(諱) 지병(之屛)이다. 경기도 남양주 양정마을에 자리하고 있는 삼정 문은 정면3칸, 측면 1칸 맞배지붕형태의 건물이 고 정문 안에 있는 현판내역은 충신과 열녀, 효자 의 삼정(三旌)에 관한 것이고 1803년(순조3) 박 영신의 충절과 그의 부인 이씨와 아들의 효행을 표창하기 위하여 나라에서 내려진 정문(旌門)이 다. 다만 이 정문은 문화재의 가치가 충분이 있음 에도 불구하고 현판이 한국전쟁당시 소실되고 화 재로 훼손되어 문화재로 지정이 안 되고 있어 안 타까울뿐이다. 정부(貞夫人)인 이씨(1575~1626)는 본관이 광 주(廣州)이니 광남군(廣南君) 광악공(光岳公) 의 따님이시며, 충장공(忠壯公) 贈 병조판서 휘 (諱) 영신(榮臣)의 배위(配位)시다. 성품이 정 절(貞節)하시고 매사를 처리함에 출가(出家) 하신 여장부(女丈夫)였으니 부군이 영창대군 을 역모로 몰아 죽이려는데 반대하여 10년의 유 배생활 하는 동안 가장 없는 큰 집안일을 잘 다 스리시면서 자녀들을 의(義)롭게 동량지촌(棟 樑之村)으로 키우셨고 부군께서 이괄의 반란평 정에 큰 공을 세우셨으나 적장(敵將)이수백에게 참(斬)되어 순절(殉節)하니 애통(哀痛)하시며, 오매불망(寤寐不忘) 원수(怨讐)갚기를 다짐하 면서 거사시(擧事時)를 엿보던 중 마침내 갑술년 (甲戌年1634) 병사 이항(李沆)의 집에서 나오는 이수백을 아들들인 휘(諱) 지병(之屛), 지원( 垣), 지번(藩), 지용(墉)으로 하여금 목을 베어 원한을 푸셨다. 후에 그 일을 가상(嘉賞)히 여겨 열녀(烈女)의 정각(旌閣)을 내리시고 장자 휘 (諱) 지병에게 효자의 정려(旌閭)가 하사(下 賜)되고 충장공(忠壯公)은 이미 충신의 정각을 받으심에 충신(忠臣),열녀(烈女),효자(孝子) 의 삼정문(三旌門)이 서게 된 것이다. 휘(諱) 지병(1601,선조34~1684, 숙종10)은 조 선 후기의 문신으로 본관은 밀양, 자(字)는 여장 (汝障), 시조(始祖) 혁거세대왕(赫居世大王)의 56세손(世孫)이요, 중조(中祖) 사문진사(四門進 士) 휘(諱) 원(元)의 18세손이시고, 간의공(諫議 公) 휘(諱) 인익(仁翊)의 12세손이다. 조고(祖 考)는 형조판서(刑曺判書) 휘(諱) 종남(宗男)이 시고, 豊川護府使 휘(諱) 영신(榮臣)의 큰 아들 이고, 어머니는 이광악(李光岳)의 딸이다. 용력 (勇力)이 절윤(絶倫)하시고 무예(武藝)에 뛰어 나셨으며, 특히 검술(劍術)에 능(能)하셨다. 162 4년(인조2) 이괄의 난 때 그의 아버지 영신(榮 臣)은 풍천성을 사수하다가 방어사 이중광 등과 함께 포로가 되어 반장 이수백(李守白)에 의하여 피살되었다. 이수백은 반란군의 형세가 불리해지 자 이괄의 목을 베어 투항, 죽음을 면하고 절도에 유배되었다가 풀려나 서울로 돌아왔다. 어머니가 돌아가시면서 아들들에게 “내가 죽거든 아버지 의 원수를 갚기 전에는 아버지와 합장을 하지마 라”고 유언을 남겨서 수년간에 걸쳐 오매불망(寤 寐不忘) 원수(怨讐) 갚기를 염원(念願)하시는 어머님의 피 맺힌 원한(念恨)을 풀어드리고자 원 수(怨讐) 갚기를 맹서(盟誓)하고 복수할 기회를 노려왔다. 수백(守白)은 공(公)의 용력(勇力)이 비범함을 알고 두려워서 여주에 은거(隱居)하며 가시울타리를 하고 수년(數年)동안 두문불출(杜 門不出)하니 계교(計巧)로서 공(公)이 거짓 죽 었 다 고 말 을 퍼 뜨 리 니 수 백 이 정 말 로 죽 은 줄 알 고 서 울 로 와 벼 슬 자 리 구 한 다 는 말 을 듣 고 공 (公)의 동생 지원(之垣), 지번(之番) 그리고 이 중광의 아들 문웅(文雄), 문위(文偉) 등과 함께 수백이 병사이항(李沆)의 집에서 술대접을 받고 나오는 수백(守白)에게 아우 지항(之垣)에게 먼 저 활 로 말 을 쏘 게 하 고 공 ( 公 )은 수 백 ( 守 白 )의 머리를 치니 “들어니 네가 죽었다고 하더니 살았 느냐?”하자 공(公)이 “너의 고기를 먹지 않고 어 찌 죽겠는가?” 라고 하시면서 원수의 배를 가르 니 시중의 사람들이 감탄(感歎)하였다. 마침내 1 634년 원수인 이수백을 죽이고 돈화문에 나아가 대죄(待罪)하였다. 공(公)이 원수(怨讐)를 갚기는 하였으나 국법 (國法)을 어겼으므로 인조(仁祖)께서 엄(嚴)히 다스리라고 하여 조정에서 극형에 처하려 하였 으나 대신(大臣) 윤방(尹昉), 김류(金 率), 오윤 겸(吳允謙) 등이 그의 효성의 지극함과 한문공 (韓文公)의 고사(故事)를 들어 이들의 선처를 적극적으로 건의하여 변호를 함으로서 마침내 5인 모두 감등(減等)되어 유배되는데 그쳤고, 그도 창평(昌平)에 중도부처(中途付處)되었다 가 이듬해에 풀려나 정릉참봉(靖陵參奉) 제용 봉사(齊用奉事)로 승진되었으나 곧 사직하고 향리로 돌아왔다가 말년에 노인수직(壽職)으 로 용양위부호군(龍 웹衛副護軍)에 제수되었 다. 1648년 향년 84세로 졸(卒)하였다. 그 후 오 랫동안 부인과 아들 두 분의 정려가 안 되고 있 다 가 효 자 충 장 공 의 5 대 손 인 자 헌 대 부 박 한 명 이 가 1 7 4 0 년 3 월 ( 영 조 1 6 년 ) 임 금 님 이 신 영 조 가 지 나 가 는 어 가 를 세 우 게 하 고 지 병 ( 之 屛 ) 의 효 심 ( 孝 心 ) 을 탄 원 하 는 상 소 문 을 올 려 1 7 4 0년5월16일에 예조로부터 정려의 포상을 받게 되었으며, 부모에 대한 지극한 효(孝)로 인하여 임금께서 윤허하여 효정문(孝旌門)을 세우게 하였다. 충신박영신(朴榮臣) 장군과정려(旌 閭) 선조 유지를찾아븣 충장공의 선원세계 박영신장군의생애 삼정려(三旌閭) 열녀광주(廣州)이씨 효자박지병(朴之屛) 충신박영신장군묘소및신도비. 삼정려-충신박영신,열녀광주이씨 ,효자박지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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