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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의 휘는 인수(寅秀)이시며 자 경수(敬壽)이시고 관향은 해주이시니 시조는 고려검교 정승(正丞) 휘 인유(仁裕)이시고 좌령호군 휘 희보(希保)의 14세손이며 파조처사공 휘 윤충(允忠)의 8세손이시다. 고종5년 무진 2월 2일 양지군 원삼면 죽릉리 어동에서 부친 휘 태한의 3남으로 출생하어 성장한 후 유인 안성이씨와의 사이에 4남매를 장남은 휘 광선(光鮮)이요 장녀는 휘 태순(泰順)이며 차남은 휘 건성(乾成)이고 차녀는 휘 언년(言年)이다. 선생께서는 유년시부터 활달호방하여 사냥을 즐겼으며 18세부터는 화포계에 참여하고 용인 안성 죽산 여천 등지에서 선생의 솜씨를 따를 사람이 없는 명포수로 이름이 높았다. 광무9년 마침내 일본과의 을사늑양이 체결되자 약소민족의 울분을 참지 못한 선생께서는 빼어난 사격솜씨로 구국전선에 뛰어들어 의병장 정원욱선생과 용인출신 정철화의병장과 합세한 후 중군장을 맡아 양지 죽산 안성 등지의 일본군 헌병대 경찰주재소를 습격하는 등 혁혁한 대일항쟁을 전개하던중 안성군 매봉재 전투에서는 일본군 1개대대와 일주야에 걸쳐 치열한 교전을 치루었으나 최신의 장비로 무장된 일본의 정예군을 부족한 식량과 열세한 화력으로 어찌 당할수 있었으리오 마침내 의병의 주력은 속속 기세를 잃고 대세가 기울어져 뿔뿔이 흩어지니 선생꼐서는 빈 총을 메고 충견과 함께 산야를 헤메이며 풍찬노숙하다가 지친 몸으로 야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