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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96 - 제2차 봉기 1 894년(고종 31) 9월 전봉준, 김개남 등은 다시 사발통문을 띄워 궐기를 호소하였다. 전라도, 충청남도 등지에서는 남접과 서포 소속 동학군과 농민군이 궐기하였다. 전봉 준을 중심으로 한 남접은 교주 최시형의 북접에 도움을 청해 연합 전선을 폈다. 이 때 봉기에 동원된 농민군은 남접 10만과 북접 10만을 합해 약 20만 병력이었다. 동학 농민군의 일부가 흥선대원군과 내통 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민씨 내각의 조선 조정은 농민군을 제거할 계획으로 일본과 청에 도움을 요청하였고, 이에 전 봉준, 김개남, 손화중, 손병희, 최경선, 김 덕명, 최시형, 성두환, 김낙삼, 김두행, 손 천민, 김봉득, 김봉년, 유한필 등이 전라 북도 전주부 삼례읍에서 다시 새로운 봉 기를 일으켰다. 일본군의 왕궁 점령에 분 격한 농민군은 이 해 음력 9월 척왜(斥倭) 를 구호로 내걸고 재기하였다. 이제는 내 정개혁을 목표로 하지 않고 일본과 항쟁 한다는 반외세가 거병의 주요 목표였다. 농민군과 조일 연합군은 11월 20일(음력 10월 23일)부터 23일까지 공주 이인과 포 효 등지에서 제1차 접전을 벌였고, 농민군 은 크게 패배해 후퇴했다. 전봉준은 김개 남에게 도움을 요청했으나 김개남은 청주 전투에서 크게 패한 뒤에 도움을 주지 않 았다. 농민군은 곰티와 검상 마을, 곰내, 하고개, 주미산 방면을 공격했다. 홍성 농 민군은 금강 건너편의 유구 쪽에서 맞섰 으나 세성산 전투에서 패배해 후퇴했다. 농민군은 다시 진열을 정비하고, 12월 5 일(음력 11월 9일) 남접과 북접 연합군 1 만여 명이 공주 우금치를 향해 돌진하면 서 전투가 시작되었다. 하지만 동학 농민군은 수적으로만 우세할 뿐 훈련을 받은 군인도 아니었고, 병기도 원시적이어서 신식 무기로 무장한 일본군 과 관군의 상대가 되지 않았다. 농민군은 10월 중순 10만 부대로 공주성을 포위하 고 대공격전을 전개하였으나 패퇴하였고, 11월 다시 공주 부근의 우금치전투에서 패배하여 후퇴하게 된다. 그리고 나머지 농민군도 금구 싸움을 마 지막으로 일본군과 관군에 진압되어 전봉 준은 쫓기는 신세가 된다. 동학농민군은 치열한 접전 끝에, 우세한 화력을 앞세운 일본의 개입으로 고전하다 우금치전투에 서 관군과 일본군에게 패했다. 이후 1895년 1월 전봉준에 이어 손화중 등 동학농민 지도부 대부분이 체포되고 교수형에 처해져 동학농민운동은 실패로 끝났다. 동학농민군을 비롯한 백성들도 조 선관군과 일본군의 소탕작전으로 100만명 이상이 학살당하였다. 조선의 지주들은 사병을 모집하여 조일연 합군과 협력하여 동학농민군을 소탕하는 역사의 아이러니가 조선의 멸망을 가속화 시켰다. 12월 10일(음력 11월 14일) 새벽, 적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