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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94 - 주장하면서 조선 사회에 그 敎勢(교세)가 확산되었다. 이에 조선의 위정자들은 동학 을 사교로 금지하고 1864년 惑世誣民(혹 세무민)의 죄로 교조 최제우를 처형하였으 며, 이후 동학교도들에 대한 조선의 탄압 은 계속되었다. 그러나 동학 제2대 교주 최시형에 의해 동학이 농민 대중에게 더욱 확산·조직화되 면서 동학의 창시자였던 최제우에 대한 억울함을 해소하고 동학교도들에 대한 탄 압을 중지할 것을 요구하는 敎祖伸冤運動 (교조신원운동)이 전개되었다. 교조신원운동 이후에도 계속되는 정부의 묵살과 더불어 전라도 군수 조병갑의 불 법착취와 동학교도 탄압에 대한 불만이 도화선이 되어, 동학교도들은 1894년 1월 전봉준을 중심으로 전라도ㆍ충청도 일대 농민들을 모아 고부 관아를 습격해 고부 민란(古阜民亂)을 일으켰다. 관아를 점령 한 전봉준은 정부에 대하여 조병갑의 횡 포를 시정 할 것과 외국 상인의 침투를 금지하라는 등의 요구사항을 제시한 결과, 정부로부터 弊政(폐정)을 시정하겠다는 약 속을 받고 10여 일 만에 해산하였다. 그러나 고부민란을 조사하러 온 按覈使(안 핵사) 이용태가 오히려 민란 관련자들을 역적죄로 몰아 혹독하게 탄압하여 동학농 민운동 봉기의 원인이 되었다. 동학농민운 동은 비록 실패했지만, 이 운동은 안으로 는 갑오개혁과 밖으로는 청,일,러의 시발 점이 되었으며 이후 1919년 3.1만세운동 에도 영향을 미쳤다. ​동학농민운동은 1894년 3월의 고부(백산) 봉기(제1차)와 9월의 전주·광주 궐기(제2 차)로 나눌 수 있다. 제1차 봉기 고부 농민봉기로 뜻을 이루지 못한 전봉 준은 무장지역의 손화중과 손을 잡고 다 시 수천 명의 농민들을 모아 1894년 3월 21일 최시형의 탄생일을 기하여 고부 백 산에서 궐기하였다. 이 사태를 접한 정부 는 장위영 등의 군대를 파견하였으나 농 민군은 황토재승리에 이어 정읍, 흥덕, 고 창, 영광, 함평, 나주, 장성, 태인, 부안 등에서 관군을 무찌르고 삼남지방을 휩쓸 고, 전주성을 점령하였다. 전주성을 점령한 후 관군과 농민군은 접 전을 벌였고, 서로 타격을 입었다. 이즈음 조선 정부는 청에게 원군을 요청하여 5월 5일 청나라 군대가 아산만에 상륙하였다. 이에 나라 안팎에 위급상황을 認知(인지) 한 전봉준은 5월 8일 관군과 폐정개혁을 실시한다는 전주화약(全州和約)을 맺었다. 그러나 일본군은 텐진조약(조선에 대한 청 과 일본의 동등 파병권)에 따른 청나라 군 의 개입을 빌미로 5월 6일 조선에 군대를 파견, 인천에 상륙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