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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2 - 연맹원 학살은 7월 8일 이루어진 것으로 보인다. 학살된 인원은 200여명 이었다. ▶비성골에서 형의 학살 장면을 목격한 동생! 비성골에서 형(兄)의 시신을 수습한 참고 인은 ‘산등성 부근에 참호를 약 60~70m 이상 길게 판 후 사람들을 꿇어앉힌 채 총으로 사살하여 파묻었으며, 현장에는 약 100여구 정도의 시신이 있었다’고 진술하 였다. 지금은 매장 추정지가 나무와 수풀 이 우거져 있지만 사건 당시는 민둥산이 었기 때문에 현장 상황을 생생히 목격할 수 있었다고 한다. 그리고 군인과 경찰이 후퇴한 후에 가족 들과 함께 피난을 갔다가 며칠 지나지 않 아 다시 마을로 돌아왔더니 마을은 이미 인민군이 점령하고 있었다고 한다. 당시 인민군들이 주민들을 동원해 아직 수습되 지 않은 시신들을 수습하도록 독려하였다 고 한다. 당장 장례를 치를 수 없었던 일 부 유족들은 비성골 이곳저곳에 가매장을 하였다가 나중에 이장을 하는 경우도 있 었다고 한다. 경상도나 타지역은 깊은 산 골짜기에 매장지가 분포되어있고 시신을 찾은 사람은 거의 1%도 안 된다. 반면에 충남 연기군 비성골은 민둥산이라 형이 잔혹하게 학살당하는 장면을 숨어서 보았 다고 한다. 학살 장면을 가까이에서 보았 을 그 심정은 두려움과 공포로 가득 찼을 것이다. ▶발굴지에 주인 잃은 고무신들의 행렬 비성골은 끝없이 검정 고무신만 출토되었 다. 필자는 처음에는 영문을 몰랐다. 궁금 해서 단장께 여쭈었다. ‘왜 이 지역은 고 무신만 나오냐고’ 단장님 말씀 “이 지역은 인민군이 시신을 찾아가도록 주민을 동원 해 독려하여 모두 찾아갔다고 한다. 순간 이런 일도 있을 수가 있구나 싶었다.” 경 상도는 언제 어디서 학살되었는지도 모르 는 것이 태반인데 이곳은 시신을 찾아가 다니 참 그나마 다행이라는 생각이 든다. 다시 발굴을 시작하자 자꾸만 검정 고무 신만 출토되었다. 필자는 다시 맘을 가다 듬고 힘을 내어 흙을 파기 시작했다. 살포 시 검정 고무신 밑창이 드러나기 시작하 는데 너무나 반갑고 힘이 솟는 듯 혼신을 다해 흙을 파고 또 파기 시작했다. 순간 살며시 비지고 나오는 신발에서 ‘증’ 이란 상표가 있는 고무신이 출토되는 순 간 하늘 나르듯이 기뻤다. 위 사진 중 오 른쪽 사진에는 ‘송’이라는 성이 새겨져 있 다. 자신의 신발을 알리기 위해 표시해 둔 것으로 볼 수 있다. 희생자들 중 지식인이 거나 부유층일 것으로 추정된다. 출토된 고무신은 일반 검정 고무신이 아니다. 고 급스럽고 상표가 거의 새겨져 있다. 너무 나 신기해서 단장께 또 여쭈었다. ‘왜 신 발에 상표들이 새겨져 있고 그리고 굽이 있습니까?’ 단장님 말씀!! 여기에서 출토 된 고무신은 국산보다 외국에서 수입한 신발이 많다는 것이다. 그리고 유학 다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