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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씨개명(創氏改名)에도 강력히 반대하야 불응하고 일본말을 종신토록 쓰지 아니하였으며 그 항일정신(抗日精神)이 어찌 이와 같으랴. 1945年 을유광복(乙酉光復) 후에는 일선(一線)에서 활약하여 대한민국독립촉진국민회(大韓民國獨立促進國民會) 화순군지부를 결성하고 임태현(任泰賢) 배석(裵錫) 최종선(崔鍾善) 조기옥(曺基玉) 박민기(朴珉基)와 더불어 자유민주의식화(自由民主意識化) 작업에 매진하였다. 신탁통치(信託統治)를 결사반대하고 자주독립운동(自主獨立運動)을 전개하니 자유독립정부수립(自由獨立政府樹立)에 많이 공헌(貢獻)하였다. 1948年에 동면(東面) 면장(面長)에 부임하여 신애일념(信愛一念)으로 많이 구휼하고 면민(面民)을 안도(安堵)케 하였다. 육영사업(育英事業)에 매진하고 동면초등학(東面初等學)의 교실난(敎室亂)을 관계요로(關係要路)에 누차 건의하고 정성을 다해 주시어 교실(敎室)을 증축하고 확장하였다. 화순중학교(和順中學校) 설립추진위(設立推進委)를 구성하여 문교부(文敎部)에 건의 애로난관을 극복하고 문교부의 승인(承認)을 얻어 매 4年制(년제) 화순중학교(和順中學校)를 설립하였다. 공(公)의 슬기로운 선견지명(先見之明)과 강력한 추진저력은 후진양성과 지역발전의 선구자(先驅者)라고 칭송이 자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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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年 6.25에 북한(北韓)의 남침(南侵)후 10月에 수복(收復)후 귀향(歸鄕) 복직(復職)하였다. 동면일대(東面一帶)는 아직 수복이 되지 아니하여 공비(共匪)의 잔당(殘黨)들이 출몰(出沒)하고 습격하여 인명을 살상하고 재물을 약탈해가 면민(面民)들이 전전긍긍(戰戰兢兢) 사방으로 유산한지라 치안유지(治安維持)와 민심(民心) 수습의 일환(一環)으로 당국에 누누히 호소하야 경찰관을 주둔케 하였으나 공비의 야습(夜襲)으로 경찰들이 살상되어 서장(署長)이 진두지휘 치열히 교전한 중에 공(公)은 만란을 무릅쓰고 공비의 뒤를 따라 밟으면서 인명을 구출하고 재산을 보호하며 동분서주하다가 뜻밖에 유탄(流彈)에 피격당해 개연히 순직(殉職)하였다. 그때 나이가 48세(歲)이다. 아~ 위대하여라 다만 면민(面民)만을 알고 자기의 몸은 알지 못한 그 희생한 정신과 고상한 의기(義氣)는 역사에 빛나게 실려서 영구히 썩지 아니하리라. 면민(面民)들이 추모하고 의(義)로이 여겨 아름다운 돌을 깎아서 실적을 기록할세 군의회의장(郡議會議長) 조봉주(曺奉鑄)가 36개 이장(里長)과 더불어 여론을 수렴하여 나에게 비문을 청하여 나도 또한 의로이 여겨 즐겁게 짓노라. 명(銘)을 지어 가로대 일제의 창씨개명에 항거하야 사람들은 건너가나 나는 아니했도다. 영재를 양성한 뜻이 간절함이여 학교를 건립하고 문학을 일으켰도다. 자나 깨나 독립(獨立)하는데 진력하였으니 기여하고 공헌한바 극히 많했도다. 순의비(殉義碑)가 높이 서있으니 지나는 사람이나 보는 사람들이 눈물을 흘리리라. 1987(정축)년 10월 4일 전주 이진백 짓고, 동면 면민 비를 세우다 출처 : 화순금석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