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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 광무 9년(1905) 11월 17일 일제와 그들 앞잡이 내각이 을사늑약에 찬동하자 전국 각지에서 국권회복을 위해 의병이 일어났으니, 호남에도 예외가 아니었다. 그리하여 1906년 11월 광양에 은거하던 전주출신 백낙구(白樂九)가 거의 했으나 실패한 후 이듬해인 1907년 1월 창평에서 고광순(高光洵) 3월 3일(음력 1월 19일) 능주(현 화순군 이양면 쌍봉리)에서 양회일(梁會一)이 거의(擧義)하였다. 공이 참여한 양회일 의진(義陣)에는 안찬재(安贊在) 이광언(李光彦),이윤선(李允善),이항선(李恒善), 임창모(林昌模)등 원근의 우국지사들과 100여명의 능주, 화순 의병들로 구성되어 능주 계당산(桂堂山)에 쌍산의소(雙山義所)를 설치하고, 능주 군아로 진격하니 그날이 4월 21일(음력 3월 9일)이었다. 이틀 뒤 양회일 의진은 동복 군아와 분파소를 습격한 후 광주 방면으로 진출하다가 도마산(刀摩山) 너릿재(板峙)전투에서 관군과 일본군에게 패하고 말았다. 양회일을 비롯