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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75 - 특히 러시아는 1897년 9월부터 석탄기지로 사용하겠다고 부산의 절영도(絶影島) 조차 를 요구하고, 이의 관철을 위해 1898년 1월 군함을 부산에 파견하고 군대를 상륙시켜 한국 정부를 압박하고 있었다. 이 같은 압력에 굴복하여 정부가 이를 승인하려고 하자 선생은 이에 강력히 반대하였다. 그리하여 선생은 독립협회를 중심으로 대중적인 반대운 동을 전개하도록 지도하였다. 이에 따라 독립협회는 1898년 3월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적 주권 수호 및 이권 침탈 반대 민중대회로서 만민공동회를 서울 종로에서 개최하였다. 여기에 모인 8,000여 명의 군중들은 열강의 한국 침략정책을 규탄하면서 러시아의 절영도 조차를 결사반대하고, 나아가 러시아인 재정 고문과 군사교관, 그리고 한러은행의 철수를 강력히 요구하여 이 를 관철시켰다. 이와 같은 선생의 활동은 우리 민족의 독립사상과 민권사상을 크게 신장시켰으나 수구 파 대신들과 한국에서의 이권획득에 혈안이 된 열강의 미움을 샀음은 두말할 나위도 없 었다. 따라서 일본과 러시아 공사의 술책과 위협으로 정부는 선생을 중추원 고문에서 해 임함과 동시에 미국 공사에게 선생의 추방을 교섭하였다. 미국 공사 또한 한국 정부의 요청을 받아들여 출국을 종용함에 따라 선생은 당초 의도했던 국민계몽을 통한 조국의 근대화와 자주 독립 기틀 마련이라는 목적을 달성하지 못하고, 1898년 5월 14일 독립협 회 회원들과 작별하고 미국으로 떠나고 말았다. 사실상 열강들에 의해 미국으로 추방 당해…3․1운동 계기로 다시 독립운동에 투신 ▲안창호와 서재필이 찍은 사진(1925). (왼쪽이 서재필이고 오른쪽이 안창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