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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32 - 교·도교의 가르침을 모두 깊게 이해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의 글에서는 승려의 비 문(碑文)에서도 불교만이 아니라 유교와 도교의 경전이 폭넓게 인용되고 있다. 이 는 그가 유(儒)·불(佛)·선(仙)의 3교(敎)가 서로 모순되는 것이 아니라 출발점은 달 라도 궁극적으로 하나로 통합될 수 있다 고 보았기 때문이다. 사상적 영향과 주요 저술 최치원의 유·불·선 통합 사상은 고려 시 대의 유학과 불교에 큰 영향을 끼쳤다. 유 교 정치이념을 강조한 최승로(崔承老)와 같은 유학자조차도 ‘불교는 수신(修身)의 근본이고 유교는 치국(治國)의 근원’이라 고 말할 정도로 고려 시대에는 유교·불교· 도교가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며 다양하게 발전하였다. 특히 민간 신앙과 풍습에서는 그것들이 서로 긴밀히 융합하는 모습을 띠었다. 그리고 고려 말기의 선승(禪僧)인 진각국사(眞覺國師) 혜심(慧諶)은 “이름을 들어보면 유교와 불교가 서로 멀어 다른 것 같지만 그 실상을 알면 유교와 불교가 다르지 않다. (認其名則佛儒逈異 知其實則儒佛無殊)” 며 ‘유불일치설(儒佛一致說)’을 제기하기도 하였다. 조선 말기에 민족의 고유의 경천 (敬天) 사상을 바탕으로 유·불·선의 사상을 융합하여 형성된 동학(東學)에서도 최치원 사상과의 연관성이 나타난다. 최치원은 문학에서도 뛰어난 성취를 보여 후대에 숭앙되었다. <사시금체부(私試今體 賦)>, <오언칠언금체시(五言七言今體詩)>, <잡시부(雜詩賦)>, <사륙집(四六集)> 등의 시문집은 오늘날에는 전해지지 않고 이름 만 남아 있지만, <계원필경(桂苑筆耕)>과 <동문선(東文選)>에는 그가 쓴 시문(詩文) 들이 다수 전해지고 있다. 또한 ‘대숭복사 비(大崇福寺碑)’,‘진감국사비(眞鑑國師碑)’, ‘지 증 대 사 적 조 탑 비(智證大師寂照塔碑)’, ‘무염국사백월보광탑비(無染國師白月光塔 碑)’등 이른바 ‘사산비문(四山碑文)’과 <법 장화상전(法藏和尙傳)> 등도 전해지고 있 다. 그는 대구(對句)로 이루어진 4·6 변려 문(騈儷文)을 즐겨 썼으며, 문장이 평이하 면서도 고아(高雅)한 품격이 있다는 평가 를 받았다. 그 밖에도 <제왕연대력 帝王年代曆>, <중산복궤집(中山覆集)>, <석순응전(釋順 應傳)>, <부석존자전(浮石尊者傳)>, <석이 정전(釋利貞傳)> 등의 저술이 있었지만, 오늘날에는 전해지지 않는다. 글씨도 잘 썼으며, ‘사산비문(四山碑文)’ 가운데 하동의 쌍계사에 있는 ‘진감국사비 (眞鑑國師碑)’는 최치원이 직접 짓고 쓴 것으로 오늘날까지 그의 필적을 전해준다. 이 탑비(塔碑)는 대한민국 국보 47호로 지 정되어 있는데, 최치원이 해서체(楷書體) 로 쓴 비문은 모두 38행 2,414자로 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