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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8 - 의 창건을 시작하였으며 이듬해에 완성하 였다. 이 당시 궁의 규모는 390여 칸으로 크지 않았다. 정전(正殿)인 근정전(勤政殿) 5칸에 상하층 월대(月臺)와 행랑·근정문·천 랑(穿廊)·각루(角樓)·강녕전(康寧殿) 7칸, 연생전(延生殿) 3칸, 경성전(慶成殿) 3칸, 왕의 평상시 집무처인 보평청(報平廳) 5칸 외에 상의원·중추원·삼군부(三軍府) 등이 마련되었다. 궁의 명칭은 『시경』 주아(周雅)에 나오 는 “이미 술에 취하고 이미 덕에 배부르 니 군자만년 그대의 큰 복을 도우리라(旣 醉以酒 旣飽以德 君子萬年 介爾景福).”에 서 두 자를 따서 경복궁이라고 지었다. 정 종이 즉위하면서 도읍을 다시 개성으로 옮기어 궁을 비우게 되었으나, 제3대 태종 때 또 다시 환도하여 정궁으로 이용되었 다. 태종은 궁내에 경회루(慶會樓)를 다시 지었는데, 연못을 넓게 파고 장대한 누각 을 지어 임금과 신하가 모여 잔치를 하거 나 사신을 접대하도록 하였으며, 파낸 흙 으로는 침전 뒤편에 아미산(蛾眉山)이라는 동산을 만들었다. 세종은 이곳에 집현전을 두어 학문하는 신하들을 가까이에 두었으며, 경회루 남쪽 에 시각을 알리는 보루각(報漏閣)을 세우 고 궁 서북 모퉁이에 천문관측시설인 간 의대(簡儀臺)를 마련하였으며, 강녕전 서 쪽에는 흠경각(欽敬閣)을 짓고 그 안에 시 각과 사계절을 나타내는 옥루기(玉漏器)를 설치하였다. 1553년에는 궁내에 불이 났 는데 강녕전에서 불이 나 근정전 북쪽의 전각 대부분이 소실되었다. 이듬해에 강녕 전 외에 교태전(交泰殿)·연생전·흠경각·사 정전(思政殿)을 복구했다. 그러나 1592년 임진왜란으로 궁은 전소 되고 말았다. 이때 창덕궁·창경궁 등도 모 두 불에 타버려 난이 끝나고 왕이 환도하 였을 때 정릉동의 구(舊) 월산대군가(月山 大君家)를 임시 어소(御所)로 정하였다. 궁 의 복구 문제는 왜란 직후부터 논의되었 으나 실천에 옮겨지지는 못하였다. 선조는 환도한 뒤 경복궁에 가가(假家)라도 지을 것을 명하였고, 1606년에는 궁궐영건도감 (宮闕營建都監)을 설치하고 광화문과 근정 전 등 주요건물만이라도 우선 지을 계획 을 세웠으나, 일부 대신들이 ‘공사가 커서 1, 2년에 끝낼 수 없으므로 후에 일을 시 작해야 한다’며 만류하자 실행에 옮기지 못하였다. 여기에다 경복궁이 길(吉)하지 못하다는 의견도 있어서 결국 왜란 후 경복궁 대신 에 창덕궁을 재건하기에 이르렀다. 이것은 과거 경복궁에서 단종이 쫓겨난 일이 있 고 중종 때에는 조광조(趙光祖)가 사정전 뜰에서 왕의 친국(親鞫)에 이어 사약을 받 은 일 등이 작용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이 후 광해군도 한때 경복궁성을 수축케 하 고 중건의 뜻을 보이기도 하였으나 결국 실현되지 못하였다. 궁의 중건이 완료된 것은 소실된 지 약 270년이 흐른 1867년의 일이다 1865년, 중건공사 완료: 1867년 말]. 흥 선대원군 이하응(李昰應)의 강력한 의지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