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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6 - 의종 당시에는 인종의 기일(忌日)을 피하기 위하여 정월 연등을 행한 것으로 나타난다. 또한 명종 때에는 15회 연등행사를 거행하였는데 대부분 2월에 열렸다. 『고려사』에 따르 면 인종의 기일이 정월이므로 2월로 하자는 청에 의하여 그렇게 된 것임을 밝히고 있다. 이 밖에도 연등은 망일(望日)에 여는 것이 원칙이었으나, 그날이 한식(寒食)인 경우에는 15일 미리 앞당겨서 열기도 하였다. 그리고 정기적인 연등회뿐만 아니라 특설 연등회가 수시로 열렸음이 기록되어 있다. 1067년(문종 21) 흥왕사(興王寺)가 낙성되었을 때 축제와 함께 연등회가 5일 밤낮 동 안 성대히 행해졌다. 또한 1073년 2월에는 봉은사(奉恩寺)에서 불상을 새로 조성하고 경 찬(慶讚)을 위한 연등회가 열려 관등(觀燈)과 주연(酒宴)이 밤늦도록 베풀어졌음을 볼 수 있다. 이 밖에도 문종 때는 경령전(景靈殿), 중광전(重光殿)에서 성대한 연등회가 있었고, 선종이 8월부터 11월 초순까지 서경(西京)에 머무르는 동안 서경의 흥국사에서 연등도량 (燃燈道場)이 열렸고 거리에도 등을 달았다. 1102년(숙종7) 9월에도 궁궐에서 신호사(神濩寺)까지의 길에 수만 개의 등을 달았고, 1296년(충렬왕 22) 5월에는 공주가 신호사에 가서 연등을 하였는데, 주옥(珠玉)으로 등을 만들어 매우 화려하였다고 한다. 1314년(충숙왕 1) 2월에는 묘련사(妙蓮寺)에서, 3월에는 왕륜사(王輪寺)에서, 1319년 2월에는 강안전(康安殿)에서 공주가 연등하였고, 1324년에는 상왕이 정경궁(廷慶宮)에서 5일 동안 점등하였다고 한다. 12월에는 정경궁에서, 1331년 (충혜왕 1) 정월에는 연복사(演福寺)에서 각각 승려 2,000명을 공양함과 동시에 2,000개 의 등을 밝혔을 뿐만 아니라 만등회도 열렸다고 한다. 만등회는 등 1만 개를 점등하여 공양하는 의식으로, 이 만등회는 이미 1166년(의종 20)에 열린 기록이 있다. 또한 공민왕 도 문수법회(文殊法會) 때 성대하게 연등하였다고 한다. 이와 같은 연등 외에도 고려에는 사월 초파일의 연등이 있었다. 이날은 석가탄신일로 서 매우 성대하게 행해져 인도(印道: India)를 비롯하여 여러 곳에서 널리 행해졌다. 고 려의 경우에는 4월 8일부터 3일 밤낮 동안 미륵보살회(彌勒菩薩會)를 설하였다는 기록이 전한다. 사월 초파일에 관한 최초의 기록은 의종 때 백선연(白善淵)이 4월 8일에 점등하 였다는 것이며, 그 후 궁중에서도 사월 초파일연등이 행해졌음을 알 수 있다. 공민왕은 직접 초파일에 연등행사를 열었고, 이때부터 초파일연등은 일반 서민에까지 이르게 되었 던 것이다. 연등은 고려시대에 본격화되어 어린이들까지 참여하게 되었다. 어린이들이 연등 비용 을 만들기 위하여 한 달 전부터 종이를 오려서 대나무에 기를 달고 성중(城中)을 다니면 서 쌀과 베를 구하는 호기풍속(呼旗風俗)이 생겨났고, 恭愍王도 두 차례에 걸쳐 어린이들 에게 쌀을 하사한 적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