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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운 최치원(857~?) 고운 최치원선생은 신라말기 헌안왕 원년(857) 아버지 견일공의 차남으로 사량부에서 탄생하였다. 경주최씨의 시조로 자는 고운,해운,해부 호는 고운이다. 경문왕 9년(869) 12살에 홀로 당나라에 유학 갈 때 "10년 안에 과거에 급제를 못하면 내 아들이 아니다"라는 엄한 아버지의 말씀을 가슴에 새기며, "다른 사람이 백 번할 때 나는 천 번을 한다"는 노력으로 유학 6년만인 건부 원년(874)인 18세 때 예부시랑 배찬이 주관하는 고시(빈공과)에 급제하였다. 20세에 선주 율수현위로 나아가 그 늘력을 인정받아 승무랑 전중시어사내공봉으로 도통순관에 올리 비은어대를 하사받았다. 당나라 의종때 황소의 난(875~884)이 일어나자 토벌대장인 고병의 종사관으로 발탁되었다. 이때 지은 "토황소격문"중에서 "천아의 모든 사람은 너를 죽이려 생각하고, 또한 땅속의 귀신들도 이미 그대들을 죽이기로 의논하였다."라는 구절에서 황소가 혼비백산하여 침상에서 굴러 떨어졌다는 일화가 전해온다.. 창칼보다 강한 문장으로 황소의 전의를 상실하게 하여 마침내 난을 평정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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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나라에 17년 동안 문장을 떨치면서 존경을 받다가 28세(884)에 당나라 의종에게 자금어대를 하사받고 885년에 신라로 귀국하였다. 신라에 돌아온 후 시독겸한림학사, 병부시랑, 지서서감사의 요직에 임명되어 국정에 참여하였으나 뜻을 펼칠 수 없어서 진성여왕(887~897때에 내직을 사용하고 정읍, 함양, 서산등의 지방으로 내려가 태수를 지내면서 도탄에 빠진 백성을 위해 선정을 베풀었다. 점차 어지러운 나라의 앞날을 걱정하여 전성여황 8년에 상서장에서 시무십여조를 올렷으나, 여왕은 아찬의 벼슬을 내렸을 뿐 개혁안이 실현되지 않자 벼슬을 버리고 여러 산천을 다니며 시문으로 세월을 보내다가 가족과 함께 합천 가야산으로 들어가 여생을 마쳤다. 우리나라 최고 한문시집인 "계원필경" 20권과 '문집' 30권, '중산복궤집 5권, 경학대장 3권, 석순옹전, 제왕년대력 등의 저서를 남겼다. 고려 현종 11년(1020) 때 선유존숭 정책으로 문창후로 추봉하고 문묘배향하였으며, 조선의 여러 왕들은 "선현 문창후 최치원은 우리나라 이학지종이요 도독과 문장이 제일인자라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