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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5년 10월 : 출옥 후 다시 중국(북경.상해 등)을 무대로 의열단의 새로운 의거활동을 전개. 활동에 필요한 자금조달에 착수. 경북 달성과 포항.경남 하동 등지에서 활동 중 1925년 10월 15일 자금 수령 장소인 경북 달성에서 경북 경찰부의 습격을 받아 체포되다. 1927년 12월 : 징역 3년형을 받고 대구형무소에 두번째 형극의 옥고를 치루고 석방되다. 1943년 1월 : 두번이나 옥고를 치룬 후 극도로 쇠약해진 몸으로 계속 초인적인 정신력으로 독립운동에 투신하던 중 태평양 전쟁의 혼란한 시기를 틈타 일제 요인 암살과 관청 폭파 임무를 띄고 거사를 추진 중 다시 체포되어 영어의 몸이 되다. 1944년 1월 : 대구 형무소에 수감된 단정 배중세 지사는 갖은 고초와 악형의 심문에도 끝내 거사 내용을 밝히지 않고 수차례 혼절 끝에 가사 상태에서 급거 도립 포항병원으로 이송. 일제 헌병의 삼엄한 경비와 감시하에 치료 중 이듬해 그토록 그리던 조국의 광복을 보지 못한 채 1944년 1월 23일 향년 49세의 아까운 나이로 옥중 순국하다. 단정 배중세 지사는 1919년 5월 청년의 꿈을 오직 조국광복에 두고 중국으로 망명. 하나뿐인 생명을 도긻운동의 성스러운 재단에 바치고 일신을 초개같이 버리면서 과감하고 처절한 무력투쟁으로 피의 항쟁을 선택하고 뜻을 함께 한 동지들과,「정의(正義)의 사(事)를 맹열히 실행한다」고 결의. 일제(日帝)의 간담을 서늘케 한 공포의 대상이였으며 광복운동사에 찬연히 빛나는 거룩한 업적을 남긴「義烈團(의열단)」창단의 핵심단원을 순국의 그날까지 「의열단」결사의 강령과 기개를 끝까지 지킨 義(의)와 烈(열)과 忠(충)의 귀감이였으며 자랑스런 義烈團(의열단)의 화신이였다.광복 후 대한민국 정부에서는 단정 배중세 애국지사의 공훈을 기리거 1963년에 대통령 표창을 1977년에 건국포장을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