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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상태는 충북 영춘 남청(永春 南川 혹은 東面) 출신으로 그 지방에서 양반으로 행세하였으며, 명망도 높았다. 이를 기반으로 1차·2차 의병전쟁에 모두 참여한 인물이다. 1차 의병전쟁 때, 김상태는 1896년 이강년(李康秊)이 문경(聞慶)에서 의병을 일으키자 형제지의(兄弟之誼)를 맺고 그 휘하에서 중군장(中軍將)으로 활약하였다. 호좌수(湖左帥) 유인석(柳麟錫)이 영월(寧越)에서 의병을 일으키자 이강년과 함께 유인석 의진에 가담하여 싸웠다. 유인석의 중군장이며 가장 신임 받던 제천 의병장 하사 안승우(下沙 安承禹)가 순절하자, 유인석은 만주로 망명하였다. 그때 김상태는 이강년과 함께 유인석을 따라가 섬기다가 3년 뒤에 귀국하였다.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김상태는 동지 정운경(鄭雲慶)과 함께 제천에서 의병을 일으켰으며 1907년 이강년의 의진과 합세하였다. 그 해 4월 그들이 영춘 고을 용소동(龍沼洞)에 머물렀을 때 밤중에 갑자기 적의 습격을 받아 군사들이 제각기 흩어지고 이강년이 부상당하였다. 김상태는 백남규(白南奎)와 함께 청풍·단양 등지의 정두용(鄭斗容)·이진원(李進源)·신태원(申泰元)·조동기(趙東驥) 등의 집을 전전하면서 치료해 주었다. 1907년 7월 이강년은 40여진을 주천(酒泉)에 모아 회맹하고, 도창의대장(都倡義大將)에 추대되었다. 이강년은 이를 극구 사양하였으나 김상태가 4군 방면으로부터 군사를 거느리고 와 "공께서 만일 끝내 여러 사람들의 소망을 저버리신다면 모든 것을 그만 두고 돌아가겠다." 고 강권하여 추대받기에 이른 것이다. 도창의대장에 추대된 이강년은 군대를 재편성하여 김상태를 중군, 백남규를 우선봉, 하한서(河漢瑞)를 좌선봉으로 삼았다. 후에 이강년이 적에게 체포되었을 때 "후일 나보다 더 나은 사람이 일어날 것이다." 라고 한 말은 바로 김상태를 지칭한 말이라고 한다. 이처럼 이강년과 김상태의 관계는 남다른 관계이었다. 그는 이강년과 함께 순흥(順興)·봉화(奉化)·풍기(豊基)·영춘(永春)·영월(寧越) 등지에서 활약하였다. 1908년 이강년이 체포되자 그의 군사지휘권을 인계 받아 단양(丹陽) 일대에서 활약하였다. 그러나 적의 세력이 더욱 치열해짐에 의병을 이끌고 소백산중으로 들어가 계속하여 유격전을 전개하였으며 일헌병과 교전한 것이 무려 50여 회에 달하였다. 1909년 3월에는 단양군내 순사주재소를 습격하여 순사 2명을 사살하기도 하였다. 이와 같이 저항운동이 끊임없이 지속되자 총독부는 그에게 상금 오백금(五百金)을 걸고 체포에 혈안이 되었다. 그 돈에 눈이 먼 종사 우중수(禹中守)가 그를 배신하여 고발하였으며, 그는 국내 순흥 남목리(順興 南木里)에서 적에게 체포되어 대구경찰서로 압송되었다. 3차에 걸친 심문 끝에 그는 감금 삼년형을 선고받았다. 의분을 참지 못한 그는 순사의 칼을 빼앗아 치려 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그러자 "적의 손에 욕보느니 차라리 자처하겠다" 는 결심을 하고 단식을 하였다. 일인들은 기계로 그의 입을 열어 먹이고자 하였으나, 단식 13일째인 1912년 9월 21일 옥중에서 순절하였다. 그의 시신은 유언에 따라 주장(主將) 이강년의 무덤 곁에 반장(返葬)되었다가 1984년에 제천시의 "의병묘역성역화계획"에 의거 제천시 고암동 의병골에 이장되었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63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출처 : 보훈처 공훈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