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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봉사 사명대사 기적비 건봉사 사명대사 기적비 - 사명당은 젊어서 신묵 화상을 따라 건봉사에 머물렀으며, 승병기의 이후에도 왜적에 탈취되었던 통도사의 사리 일부를 찾아 이 절에 봉안하였다.그 뜻을 기리고자 남공철이 찬한 기적비를 세웠으나(1800년) 일제에 의하여 파괴되었다 하며 기적비의 해석문을 요약하며 다음과 같다. 〈유명조선국 팔도도총섭 의병대장 홍제존자 사명대사 기적비명 병서〉(有明朝鮮國八道都摠攝義兵大將弘濟尊者泗溟大師紀蹟碑銘并序) 가선대부 강원도 관찰사 겸 병마군수절도사 원주목사 원임규장각직각지제교 남공철이 짓고 통정대부 행영월도호부사 겸 원주진관병마사 첨절제사 토포사 허질이 아울러 전서를 쓰다. 금강산은 비로봉으로부터 두 줄기로 나뉘었으니 단발령 서쪽은 내첩이라 하였고, 안문 동쪽은 외첩이라 하였다. 내첩에 자리잡고 있는 표훈사는 서산대사가 가르쳤던 곳이며, 외첩에 있는 건봉사는 사명대사가 의병을 모집한 곳이다. 두사람이 비록 불교에 몸을 담고 출발하였으나 서산대사는 그 곧은 절개로서, 사명대사는 그 높은 공으로 이름을 떨친 곳이기에 모두 소중하게 여기며, 또 이러한 사연이 있으므로 해서 오늘날 국내에서 유명한 사찰로 알려지게 된 것이다. 사명대사의 이름은 유정이요, 본래의 성은 임씨로서 경남 밀주 사람이다. 조상대대로 벼슬을 지낸 가문에서 자랐으며, 성장해서는 은사 중덕을 따라 배웠다. 그 뒤 낙서암에서 삭발을 하고 서산대사를 스승으로 섬기며 연화경 육만 구천여 마디를 익혔다. 만력 20년(1592) 왜구가 조선을 침략하자 휴정은 묘향산으로부터 승려를 불러모아 병사(승병)로 삼고 명나라 도독 이여송과 함께 평양에서 왜군을 크게 쳐부수었으니 이때 목을 베인자 만도 2천여명이나 되었다. 소경왕이 행궁에서 그를불러 직접 묵죽을 그려 주면서 팔도도총섭의병장을 명하고 수레를 타고 서울로 돌아오도록 하였다. 일본에서 사신으로 가서 화합을 바탕으로 일을 성사시켰으며, 돌아올 때 죄없이 붙잡혀간 우리동포 3,000명을 함께 데리고 왔다. 서산대사는 돌아갔지만 우리는 그가 남긴 오롯한 덕업을 반드시 알아야 할 것이요, 사명대사와 같이 훌륭한 업적을 남길 수 없으니 힘껏 그들의 공을 논하고 찬양함이 어떻겠는가. 대체로 서산대사는 경에 가까우면서 그 절의는 높고, 사명대사는 권에 가까우면서도 그 공은 넓었던 것이다. 그러나 전쟁을 그만 두자는 족의 주장을 받아들여 성사시켰으니 이는 당시 많은 선비들이 한결같이 주장해온 터였다. 비록 사명대사가 아니었더라면 이같은 일이 이루어지지 아니함을 근심하지 않은 사람이 있었겠는가. 서산대사를 쫓아 배운 해안과 영규란 제자가 있었다. 해안의 영남에서 의병을 일으켰고, 영규는 일찍이 대열공 중봉이 조헌의 문하에서 의병활동을 하다 금산싸움에서 죽었다. 밀주에 옛 스승의 신주를 섬겨모신 사당이 있었는데 목릉성 새 나라에서 사당이름을 표충이라고 내렸다. 내가 관동을 살펴볼때 이 사찰이 유적을 돌아 보고나서 예부에다 의론을 부치고 또 조정에 청하여 이를 시행하게 하자 신도들이 힘을 입어 대사의 기적비를 세우자고 뜻을 모아 마침내 돈 백꿰미를 마련하여 이를 추진하였으며, 또 사주를 청하는 모연문 다섯 축을 만들어 역사에 보탬이 되도록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