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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년동안 매일 산소에 가서 곡하였다. 농포 선생의 후손들은 진주에 전거한 이후 강우의 성벌을 이루었으나 나라가 망하고 왜인들이 학정을 자행하니전통있는 명가의 풍건도 점점 쇠퇴해져 가자 공은 분연히 일족들을 창수하여 문호를 잘 지켜나갔다. 노정헌집 등 조선의 유고를 간행하여 그 학덕을 세토에 천양하였고 선산에 석의를 갖추고 재사를 건립하는 일에 정성을 다 쏟았다. 농포 선생을 향사하는 사우가 전부 함경도에 있는 상황에서 남북이 분단되자 유림이나 후손들이 앙모의 마음을 붙일 곳이 없었다. 공은 선생을 향사할 서원 건립의 뜻을 세워 농포집을 중간하여 널리 반포하고 전국의 향교의 서원에 통문을 보내고 또 일일이 심방하여 성원을 얻는 등 혈성을 쏟아 건립사업을 주도하여 마침내 가호서원을 이룩해 내었고 충의사라는 박정희 대통령의 친필 현액을 받음으으로서 조선 시대 사액서원과 동급의 격을 갖추도록 하였다. 늘 가뭄이 극심한 하곡지구에 저수지를 축조하여 넓은 옥토를 만들어 지역민들이 영구히 그 혜택을 입게 만들었다. 몽이민들이 송덕비를 세워 그 은공을 잊지 않고 있다. 평소에 배운 것을 실천하는데 비중을 두었기에 저술에 마음을 두지 않았고 간혹 지은 글도 초고를 간직해 두지 않았다. 얼마간 남아있는 시문을 자녀들이 수집하여 야은유고를 간행하였다. 1986년 6월 2일에 향년 80으로 고종하여 진주시 이반성면 계룡 후산 선산 자좌의 언덕에 안장되었다. 배위는 함안조씨로 형규의 따님인데 부덕이 있어 내조가 많았다. 1903년 정월 2일에 출생하여 1980년 12월 8일에 향년 78로 작고하였는데 묘소는 쌍분이다. 아들은 태민 태환 태류인데 태환은 생가의 사손이 되었다. 따님은 전주 최재룡에게 출가하였다. 손자 인근 두근은 태민의 아들이고 재근은 태환의 아들이고 경근은 태류의 아들이다. 외손은 최홍석이다. 증손 광섭 충섭은 인근의 아들이고 민승 승현은 재근의 아들이고 도헌은 경근의 아들이다. 아아 공은 천성이 순정하고 덕량이 관홍하였다. 윤리를 실천하고 절조를 확수하여 사정의 구분에 엄격하였고 행신이 고이하였다. 그러나 자신을 과시하거나 외형을 수식하는 일 없이 늘 양공한 마음으로 묵묵히 선비의 자세를 지켜나갔다. 어려서부터 중부 만산 준교의 영향을 많이 받았고 자라서는 족숙 죽상 은교 민암 박태형 등 유림의 거벽과 종유하여 유학의 정수를 탐구하고 월헌 이진림과는 도의지교를 맺어 학문을 강토하고 유림의 일을 논의하였다. 그러나 공이 태어난 시대는 왜인의 강점기라 온축한 경륜을 펼칠 수 있는 여건이 아니었다. 시골에 묻혀 조용히 살면서 자신을 깨끗이 간직하고 전통문화를 계승하여 후세를 계도하는 것을 자신의 임무로 삼았다. 오늘날 강우지역에 유교문화가 얼마간 보존되어 있는 것은 공의 노력에 힘입은 바 적지 않다. 공이 서세한지 어언 이십년의 광음이 흘렀는데 더 지나면 그 의적이 민멸될까 저어하는 초자 태류변호사가 야은 유고와 관계문적을 들고 불초를 방문하하여 현각할 글을 요청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