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一. 이모비 및 국역비 건립 취지 임진전쟁(1592년) 시 의병장 충의공 농포(農圃) 정문부(鄭文孚)선생을 비롯한 함경도 의병의 전공(戰功)을 기록한 ‘북관대첩비(北關大捷碑/1708년)’가 러·일 전쟁 때 일본군이 강탈하여 이치(移置)한 동경 야스쿠니 신사로부터 2005년 10월 100년 만에 고국으로 돌아왔다. 이 대첩비는 불멸의 호국정신이 깃들어 그 기상이 늠연할 뿐만 아니라 충의(忠義)로서 기병하여 완승(完勝)을 거둔 북관대첩의 가치(價値)를 한산대첩과 행주대첩보다 더 높이 평가하고 있다. 1978년 박정희 대통령은 임진전쟁의 최고 공로자는 백의종군에서 보여준 ‘이순신의 애국심’과 관리(官吏)도 본받아야 할 ‘북관의 정신’이라 하고, “육(陸)의 정문부, 해(海)의 이순신”을 임진전사의 거울로 삼겠다고 했다. 또한 북관대첩비를 속히 반환 받아 국립묘지에 비를 모시고 진주의 사당에 모탁비(模拓碑)를 세우겠다고 했었으나 이듬해 서거했다. 남북한의 합의에 따라서 북한은 북관대첩비를 함경도 임명의 본래 위치에 복원하고 이를 국보급 문화재로 지정하였다. 동시에 북관대첩비 이모비(移模碑)가 국내의 여러 곳에 건립되었다. 이는 국가누란의 위기를 극복한 의병활동의 역사적 사실(事實)과 위대한 공적(功績) 그리고 의병장 농포 정문부 선생의 숭고한 생애와 사상을 널리 기리고 선양(宣揚)하며 후세에 남기기 위함이다. 이러한 취지를 살펴, 부조(不祧)로써 봉심하는 충의사에 그 이모비(移模碑)와 국역비(國譯碑)를 경건한 마음으로 세운다. 二. 농포 정문부 선생의 일생 충의공 농포 정문부(鄭文孚,1565년-1624년) 선생은 조선 중기의 문신이며 의병장이다. 본관은 해주(海州)이다. 호는 농포(農圃), 자는 자허(子虛), 시호는 충의(忠毅)이며, 명종 20년(乙丑) 2월 19일 서울 반송방 남소동에서 탄생하여 인조 2년(甲子)에 억울하게 옥사하셨다. 선생의 삼불후(三不朽) 농포 정문부 선생의 일생은 학문에 독실하고 행실에 힘써 몸가짐이 맑고 검소하면서 절의(節義)에 차 있어, 천리(天理)에 순응하고 민심(民心)에 부합하는 삶을 사셨다. 효성을 지극히 하며 사물의 덕성(德性)을 밝히고 예(禮)로써 실천하여 쌓으신 높은 덕망(德望), 국가존망의 위기에서 여진족과 반역무리와 왜적의 3적을 물리치고 북방을 수복하여 임진전쟁의 상황을 전변(轉變)시킨 빛나는 공훈(功勳), 서간문과 소장(疏章)들은 소실(燒失)되었지만 시(詩)와 전문(箋文)과 장계(狀啓) 등에 있는 훌륭한 문장(文章), 이러한 위업(偉業)들은 청사(靑史)에 길이 남아 후세 사람들과 끊임없이 사유(思惟)하고 대화(對話)하면서 천도(天道)와 인성(人性)의 지혜를 전할 것이다. 어찌 이와 같은 선생의 立德과 立功과 立言을 삼불후(三不朽)라 하지 않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