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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5 - 민추도회(官民追悼會)의 수부담임위원(受付擔任委員)을 역임 1911년 4월 대동전문학교 강사를 사직했으며, 11월에 경성전수학교(법학교의 개칭) 교유 (고등관 7등)에 임명되어 1913년 3월까지 근무하다가 사직 1912년 1월 종7위에 서위, 8월 한국병합기념장, 12월 보성전문학교 법률학전문과 강사를 사직 1913년 3월 주식회사 호서은행 설립 발기인, 4월 경성거류민단 교육기금으로 60원을 기 부한 공로로 목배(木杯)를 받음 1913년 5월 주식회사 호서은행 지배인으로 재직 1917년 2월 주식회사 한성은행으로 자리를 옮겨 심사과장으로 근무 1918년 4월 조선지(朝鮮紙)주식회사 상담역, 5월 주식회사 한성은행 본점 지배인, 12월 경성의 유지들이 중심이 되어 “내선인 융화, 관민 교정, 식산흥업 장려” 등을 표방하며 조직한 내선융화단체인 대정친목회 평의원에 선출(~1922년 11월) 1919년 7월 경성제사(京城製絲)주식회사 전무취체역, 9월 주식회사 서울호텔 설립 발기 인, 11월 주식회사 경성취인소(京城取引所) 설립 발기인 1920년 3월 조선상사(朝鮮商事)주식회사와 경성제사주식회사를 합병하여 조선제사(朝鮮 製絲)주식회사를 설립하고 대주주로 참여, 4월 주식회사 대동상회(大東商會) 후 원 찬성원으로 활동 1920년 12월 조선인 교육을 통제하려는 목적하에 추진된 제2차 조선교육령 개정을 위해 임시로 구성된 자문기구인 임시교육조사위원회 위원으로 활동 1921년 2월 전라남도 참여관에 임명 전라남도 참여관으로 근무 당시 지역유림들을 체제에 포섭하는 데 많은 노력을 기울임 1921년 8월 (전라남도) 유교창명회에 참여, 9월 24일 지방교화를 목적으로 전라남도 관 내를 순회하다가 전남 광양에 도착하여 지방교화와 관련한 강연회에서 강연 이 강연회에서 시대(時代)와 유교(儒敎)라는 제목으로 “제군이여, 공명정대한 국가가 국민에서 인재를 등용하기에 여사(如斯)한 장벽을 설(設)한 일에 대하여 여하(如何)히 생각하십니까. 그러나 금일에는 일한합방(日韓合邦)의 대업(大業)이 성취하여 같이 일가(一家)의 춘(春)을 위하는 국가에서 인재를 등용하기에 하등 장벽이 무(無)하니 국민된 다음에야 누구든지 상당히 학식을 구비하고 국가가 정한 시험에 급제한 경우에는 국가에 등용될 것이외다. ...... 국어(國語 : 日語)도 불어(不語)하며 양어(洋語)도 불운(不云)하고 또 양복(洋服)도 불착(不着)하며 화 복(和服)도 불착하고서 여행도 하며 포교도 할 수가 있겠습니까. 시세에 순응하 며 대세에 통(通)하시오. 그리고 노력하시오. 여사(如斯)히 한 후에야 비로소 유 림이 소생하며 보(步)할 수가 있을 터이올시다.”라고 연설하면서 한일합병에 대 해 긍정적으로 평가하고 유림들에게 시세에 순응할 것을 강조 1924년 12월 충청남도지사(고등관 2등)로 승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