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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7 - (아) 전라남도 제18대 관찰사 신응희 신응희(申應熙) : 1859~1928 중추원 참의 · 도지사 · 동민회 상담역 1859년 서울 출생 1883년 5월 일본으로 건너가 게이오의숙(慶應義塾)에서 일본어 학습 1883년 10월 육군 도야마(戶山)학교에 들어가 1884년 5월에 졸업 1884년 8월 남행(南行 : 음직)으로 부장(部將) 겸 사과(司果)에 임명, 9월에 후영 군사마 (後營軍司馬), 10월 남행 군직 1884년 갑신정변 때 행동대원으로 활동하고 12월 일본으로 망명하여 3년을 지낸 뒤 미 국으로 건너가 7년간 머무름 1895년 7월 김홍집 내각이 성립되면서 사면을 받고 귀국 1896년 1월 훈련대 정위를 거쳐 2월 육군 참령으로서 훈련대 제1대대장을 지휘하 던 중 아관파천이 일어나자 다시 일본으로 망명 1907년 7월 일본에서 귀국한 뒤, 11월 중추원 부찬의에 임명 1908년 6월 내부대신 송병준의 추천으로 전라남도관찰사(칙임3등)를 맡아 전라남 도재판 소 판사를 겸임 관찰사로 재직 중이던 1909년 8월 의병운동 탄압작전인 일제의 남한대토벌작전 을 지원하고 의병들을 회유하는 공작에 적극적으로 나섬. 일제는 많은 한국 관 원 중에서도 신응희를 지목하여 폭도의 절멸에 열중하여 군대 간부와 함께 전 후 2회 폭도가 창궐하는 지방을 순시하면서 군수 이하를 경고 · 장려하고 민 중을 훈유하는 등 백방으로 수단을 강구했다고 높이 평가 1908년 3월 대동학회 평의원, 5월 대한학회 찬성회 발기인, 6월 대한협회 회원 등 계몽 운동단체에 두루 관계 1910년 5월 공립 광주농림학교 교장 1910년 10월 함경남도장관 1912년 8월 한국병합기념장, 11월에 학교 건물 신축비를 기부하고 목배를 받음 1915년 11월에 다이쇼(大正)천황 즉위기념 대례기념장 1914년~1918년 도장관으로서 함경남도 지방토지조사위원회 위원장을 맡아 일제의 토지 조사사업에 협력 1918년 9월 황해도장관, 11월에 훈4등 서보장과 금배 1조(組) 하사 받음 1919년 4월, 3 · 1운동을 진정시키기 위해 도장관 명의로 경고문을 발표 경고문에서 민족자결은 조선의 독립과 하등 관계가 없는 망설(妄說)이며, 앞으로 시위에 참가하는 자는 가차 없이 탄압할 것임을 경고했다. 이후 황해도 각지를 돌아다니면서 각 군에 자제단을 조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