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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6 - (사) 전라남도 제17대 관찰사 김규창 述懷』 김규창 金奎昌 : 생몰년 미상 일진회 총무원 1888년 11월 병조판서 민영환(閔泳煥)의 추천으로 부장(部將)에 임명 1903년 12월 징세주사, 1904년 1월 경무청 총순(摠巡) 1904년 8월 일진회 평의원에 선출, 9월 일진회 총대로서 정부에 파견, 11월 일진회 전라 남북도 조사위원 1905년 1월 일진회 총대 자격으로 군부를 방문해 원주진위대 병정(兵丁) 사건 등 을 조 사할 것을 권고, 4월 일진회 임시 전주지회장 선출, 12월 경기관찰부 파주군수 1907년 6월~1908년 6월 전라남도관찰사 겸 전라남도 세무감 겸 전라남도재판소 판사 1907년 9월 전라남도관찰사 재직 중 내부에 “각 군에 소위 의도(義徒 : 의병)가 날로 더욱 심하니 군대를 많이 보내 진압케 하라”는 전보(電報)를 보냈고, 관할 지역 군수들을 모아 단발하도록 종용 1908년 3월 김태원(金泰元) 의병장을 총살한 것을 내부에 보고 1908년 12월 일진회 총무원에 선출 1909년 12월 일진회가 이른바 ‘합방청원’을 결의할 때도 총무원으로서 적극 찬 동 1909년 11월 4일 일진회 주최로 열린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 추도예식에서 집 례위원 (執禮委員) 담당 1910년 3월 9일자 『황성신문』 「비위난정(脾胃難定)」에는 김규창이 “금번의 합방은 단단무의(斷斷無疑) 성립될 터이오, 합방이 성립된 후에는 내각을 일진회가 조직 할 터인데 총리는 송병준(宋秉畯), 내대(內大 : 내부대신)는 이용구(李容九), 학대 (學大 : 학부대신)는 민영찬(閔泳瓚)이오, 법대(法大 : 법부대신)는 복설(復設)하여 유학주(兪鶴柱)가 피임(被任)한다.”고 주장했다고 전해짐 1934년 11월 일본 우익단체 흑룡회가 도쿄(東京)의 메이지(明治) 신궁교 옆에 세운 일한 합방기념탑의 석실 안에 ‘일한합방공로자’로 이름을 올림 [참고문헌] 『日省錄』 ; 『舊韓國官報』 ; 『梅泉野錄』 ; 『大韓季年史』 ; 『皇城 新聞』 1905.6.30, 8.15, 1909.3.9, 1910.3.9 ; 『元韓國一進會歷史』(1911.7) ; 『日韓合邦記 念塔寫 眞帖』(193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