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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3 - 학교 졸업 1900년~1903년 도쿄(東京)경시청 경찰제도 연구생. 경찰사무와 감옥제도 연구 1903년 6월 관리서 주사에 임용되었으나 바로 그만 둠 1904년 2월 러일전쟁이 일어나자 고등통역관으로 일본군에 종군하여 인천 · 진남포 · 용암포와 중국 안둥현(安東縣) 등지에서 활동, 11월 농상공부 주사 1906년 5월 군부 군기창 주사로 근무. 군부 파견원으로서 의친왕을 수행하여 일본에서 열린 관병식(觀兵式)에 참석하고 일본 정부가 주는 훈6등 서보장을 받음. 1906년 7월 통감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의 후원으로 주전원(主殿院) 경위국(警衛局) 경 무관을 거쳐 경상북도 대구군수 겸 경상북도관찰사 서리로 승진 대구군수로 재직할 때 대구성을 허물고 도로를 만들어 일본인이 상권을 장악하 도록 협조. 이때 내부의 허가를 받지 않고 일을 처리하여 징계를 받을 상황이었 지만 이토의 도움으로 오히려 영전 1907년 6월 평안북도관찰사로 승진, 평안남도 세무감, 평안남도재판소 판사, 평안남도 관립 일어학교 교장 등을 겸임 1908년 2월 통역관으로 러일전쟁에 협력한 공을 인정받아 훈5등 서보장, 6월 경상북도 관찰사 겸 경상북도재판소 판사 1908년 12월 일한민 간친회(日韓民懇親會)에서 “소생이 일신을 바쳐 이 땅을 위해 진 력하고자 함에는 일본인 제군의 지도편달에 달려 있습니다. 이 땅의 한국인들이 희망하는 바는 귀국인이 스승으로서 책임을 느껴야 한다는 것입니다.” 라면서 일본인의 지도를 요구 1909년 1월 순종과 이토 통감이 경상도를 순시할 때 대구 수창학교에서 일본 국기를 게 양하지 않은 일로 수창학교를 폐지할 것을 학부(學部)에 건의, 7월 재조선 일본 인 농업관계자와 유지들이 만든 한국중앙농회의 경상북도지회장에 선임 1910년 9월 경상북도 각 면의 면민들을 모아놓고 합병 조건을 설명한 후 일본 천황의 충량한 신민이 될 것을 주장했다. 이후 “폭풍과 홍수를 방어할 지력이 없고, 대세를 저항할 실력이 없다. ...... 요로에 있으면서 민족을 위해 노력하는 것이 취할 길”이라고 자신의 친일행위를 합리화하면서 조선총독부의 고급 관료로 활동 1910년 10월~1915년 3월 충청남도장관 1912년 8월 한국병합기념장, 1913년 6월 훈4등 서보장 1915년 3월 조선총독의 자문기구인 중추원의 찬의를 맡아 1921년 2월까지 재임하면서 매년 1200원의 수당을 받음 1915년 11월 다이쇼(大正)천황 즉위기념 대례기념장 1918년 4월 종4위에 서위, 5월 대구상업회의소 특별평의원, 경상북도 제2회 물산공진회 평의원 등에 선임 1919년 3 · 1운동이 일어나자 “국민이 독립생활의 능력이 없으면 국가가 부강할 도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