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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0 - 후 일본 정부가 주는 금배(金杯) 1조를 받음, 5월 고려삼(高麗蔘)주식회사 설립 발기인으로 참여했으며, 7월에는 매일신보사가 주최한 부인수예품전람회의 고문 에 추대 1921년 3월 경성신사기원제(京城神社祈願祭)에 참석했고, 9월 전선 내선인실업가(全鮮內 鮮人實業家) 제2회 간담회에 발기인으로 참여, 11월 조선불교대회(朝鮮佛敎大會) 고문 1924년 5월에는 임시총회에 자작 권중현(權重顯)에 이어 회장에 선출 1925년 5월 조선불교대회가 재단법인 조선불교단(朝鮮佛敎團)으로 명칭을 변경하면서 단장 겸 법인이사 역임 조선불교단은 명목상 불교를 통한 사회교화사업을 내걸고 조직되었지만 실제로 는 조선 불교에 대한 영향력 강화, 내선융화의 보조, 조선인의 사상 통제에 목적 1921년 12월 조선과 일본의 유력자를 망라해 토지 매매 · 신탁과 증권신탁을 목적으로 설립한 일선(日鮮)신탁주식회사(동아증권신탁주식회사의 개칭)에 조선인 측 발기 인 고문 1922년 1월 평화박람회 조선협찬회 부회장 선임, 4월 대륙호모(고무)공업주식회사(大陸 護謨工業株式會社) 발기인 및 창립위원장, 8월 감사역 선임 1923년 2월 농업개량회사 고문 위촉 1924년 6월 ‘국가와 민족을 위해 순직한 경찰관’을 추도하기 위해 치러진 초혼제(招 魂祭)에 왕공족을 대표해 이완용과 함께 참석 1926년 4월 순종 장의(葬儀) 고문으로 국장에 참여, 5월 배종(陪從) 감독에 임명 1927년 7월 조선과 일본 귀족이 주축이 돼 설립한 조선토지흥업주식회사 위원에 선임 1929년 9월 식민통치 20주년을 기념하는 조선박람회가 개최되었는데, 이를 준비하기 위 해 1928년 2월 조선박람회 경성협찬회를 발기하고 평의원에 선출 1928년 10월 조선총독의 자문기구인 조선총독부 중추원의 정4위 고문으로 임명되어 1937년 10월까지 두 차례 연임하고 곧바로 고문(종3위)에 세 번째 임명, 1938년 9월 사망 때까지 10여 년 동안 네 차례 연임, 매년 3000원씩 수당 1928년 11월에는 처 김씨와 함께 쇼와(昭和)천황 즉위기념 대례기념장 받음 1930년 5월 상무사(商務社) 총재, 12월 수양단조선연합회본부(修養團朝鮮聯合會本部) 찬 조원 수양단조선연합회본부는 도쿄에 본부를 두고 조선지부 성격으로 조직되어 1930 년대부터 국민정신 작흥을 내걸고 조직 정비와 통제를 강화 1933년 7월 열린 제14회 중추원 회의에서 의례준칙(儀禮準則)심사위원회 위원장과 시정 연구회 위원장 1934년 4월부터 1938년 9월 사망할 때까지 조선총독부 직할기구인 조선사편수회 고문 1934년 4월 일본국방의회를 본떠 조선 각 지역에 설치했던 국방의회를 하나로 묶어 결 성한 조선국방의회연합회(朝鮮國防議會聯合會)의 고문에 위촉, 7월 일제가 농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