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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6 - 1907년 10월 한국 시찰을 위해 방문하는 일본 황태자를 환영하기 위해 전현직 대신과 관리들이 조직한 신사회(紳士會)의 발기인으로 참여하고 봉영위원 맡음 1908년 7월 장례원경, 1909년 4월 궁내관 전형위원(宮內官銓衡委員) 1899년 3월 사립 시무학교(時務學校) 교감, 1900년 1월 찬무원 1905년 10월 국민교육회에 찬성금 기부, 1908년 10월 관진방회(觀鎭坊會)에 기부금 1909년 11월 도쿄에서 열린 이토 히로부미 장례식에 맞춰 관민추도회를 발의하여 장충 단에서 열린 추도회의 설행위원 겸 제문담임위원(祭文擔任委員) 1910년 7월 일진회가 발표한 ‘합방청원서’에 찬성하고 ‘한일합병’을 관철하기 위해 조직된 국민협성회(國民協成會)의 합병실행 추진단체인 한국평화협회(韓國平和協 會)의 서무부 총장으로 활동 1910년 10월 「조선귀족령」 에 따라 남작 작위 1910년 10월 23일부터 11월 16일까지 조선총독부가 비용 전액을 후원하여 일본 천황에 게 사은의 뜻을 전하기 위해 조직된 ‘조선 귀족 일본관광단’의 일원으로 시모 노세키(下關) · 나고야(名古屋) · 도쿄(東京) · 하코네(箱根) · 닛코(日光) · 교토(京都) 등을 방문 1911년 1월 은사공채 2만 5000원을 받았고, 2월 총독 관저에서 열린 작기본서봉수 식(爵 記本書捧受式)에 의복을 갖추어 참석 1912년 8월 한국병합기념장을 받았고, 12월 종5위에 서위 1915년 8월에는 조선총독부 주도로 식민지배를 정당화하고 시정사업을 선전하기 위한 시정5년기념 조선물산공진회 경성협찬회의 정회원으로 기부금 납부 1915년 11월 다이쇼(大正)천황 즉위기념 대례기념장 1918년 12월 정5위로 승서(陞敍) 1921년 4월 친일유림단체인 조선유교대동회(朝鮮儒敎大同會)의 회장으로 사립 한 문전문 학교(漢文專門學校) 설립취지서를 발표하고 발기인으로 참여 1924년 9월~11월 사망할 때까지 경학원 대제학 경학원은 일제가 조선 유림을 회유 · 포섭하기 위해 종래의 성균관을 폐지하 고 설치한 것으로, 부제학은 무급제였으나 1922년 8월부터 연수당 600원이 지급 되었고, 경학원 대제학은 연수당이 900원 1921년 9월에는 11월부터 미국 워싱턴에서 열리는 태평양회의에 한국인 대표가 출석해 독립을 청원할 수 있도록 국내외 각 단체 대표와 전국의 도 대표 수백 명의 이 름으로 작성한 「한국 인민이 태평양회의에 보내는 글(韓國人民致書太平洋會議 書)」에 유교대동회 대표로 서명 1922년 1월 조선과 만주의 부원(富源)을 개발하고 재외동포의 생활 향상을 목적으 로 한 선만협회(鮮滿協會)를 설립하여 총재로 취임 1922년 3월 경학원 · 대동사문회 · 유도진흥회 연합으로 치러진 공부자 기신사 십주갑 추모예식급기념사업(孔夫子忌辰四十週甲追慕禮式及紀念事業)에 발기인으로 참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