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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2 - 1907년 5월 탁지부 대신에서 물러난 직후 중추원 고문에 임명, 6월 일본국 박람회 시찰 1908년 12월부터 1911년 4월까지 동양척식주식회사 부총재 1907년 10월 일본 황태자가 한국을 시찰할 때 환영과 편의 제공에 기여한 공로를 인정 받아, 1909년 7월 일본 정부가 수여한 일본황태자도한기념장(日本皇太子渡韓記 念章)의 패용(佩用)을 허가 받음 1896년 중교의숙(中橋義塾)을 설립했고, 1899년 1월 화폐의 융통과 상무(商務)의 흥왕을 목적으로 설립된 대한천일은행(大韓天一銀行)의 발기인으로 참여 1899년 3월 사립 시무학교(時務學校) 교장, 1906년 4월 현성(玄成)의숙 교장, 1907 년 1월 동아개진교육회 찬성장, 1908년 5월 대한여자흥학회 고문 1896년 11월 독립협회, 1905년 10월 국민교육회(國民敎育會), 1906년 4월 사립 일 동(壹 洞)소학교 등에 보조금과 찬성금을 기부했고, 1910년 3월에는 대동교회(大同敎 會)에 의연금(義捐金)을 냈으며, 이외에 기호흥학회와 태극학회 등에도 의연금을 기부 1906년 4월 교육확장을 위해 교과서 인쇄 · 출판을 담당하는 회사인 광학사(廣學 社)의 찬무원 1907년 6월 인쇄공업조직회사 사장 1908년 2월 유림계를 회유하기 위해 통감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의 후원으로 조직된 대동학회(大東學會)의 회원으로 참여, 8월 기호흥학회 찬무부(贊務部) 주무원(主 務員)에 이어 12월에 특별찬성회원 1908년 9월 동양협회 경성지부 취지에 찬성 · 입회하여 찬성금 50원을 기부했으 며, 10 월 일본적십자사 특별사원으로 참여 1909년 10월 빈민구제를 위한 활민원(活民院)을 설립하는 한편, 자신 ‘소유’의 남녀 노비에게 “자유 생활”을 하도록 함 1909년 12월 14일 일본적십자사와 일본애국부인회 한국지부가 주최한 이토 히로부 미 사 망 50일 기념추도회에 참석 1910년 2월 수산합자회사(水産合資會社), 3월 대해(大海)어업회사 설립 1910년 10월 「조선귀족령」에 따라 남작 작위 수여 1911년 1월 은사공채 2만 5000원을 받았고, 2월 총독 관저에서 열린 작기본서봉수 식(爵 記本書捧受式)에 의복을 갖추어 참석 1911년 3월 사립 오성학교(五星學校) 농림강습소가 개최한 농담회(農談會)의 찬성 원으로 활동, 4월 운산금광(雲山金鑛) 부총재 1911년 3월부터 1921년 4월까지 10년여 동안 조선총독의 자문기구인 중추원 고문 을 지 내면서 매년 1600원의 수당 1912년 8월 한국병합기념장, 12월 종5위에 서위, 1913년 7월 정5위로 승서 1915년 1월 조선총독부 주도로 식민지배를 정당화하고 시정사업을 선전하기 위한 시정5 년기념 조선물산공진회 경성협찬회의 발기인으로 참여, 5월에는 특별회원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