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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7 - 1895년 춘생문사건(春生門事件)에 가담했다가 실패하자 11월 중국 상하이(上海)로 망명 1896년 2월 아관파천 후 귀국 1896년 3월 군부협판 1896년 4월 육군 부령(副領) 친위 제1연대장 1896년 5월 육군 참장(參將) 1896년 8월 전라남도관찰사, 전라남도재판소 판사 겸임 1898년 12월 법부협판, 고등재판소 판사 겸임. 법부대신 겸 고등재판소 재판장 1899년 1월 귀족원경 1899년 12월 군부대신 1902년 2월 궁내부 특진관 1902년 10월 임시서리 원수부 군무국 총장(元帥府軍務局總長) 1902년 11월 임시서리 평리원 재판장 사무 1903년 7월 원수부 기록국 총장, 군부대신 1903년 10월 육군 부장(副將), 원수부 검사국(檢査局) 총장 1904년 1월 군부대신 1905년 3월 군부 찬모관(贊謀官) 3월에 사립 강화육영학교(江華育英學校)에 찬성금 50원을, 10월 국민교육회 (國民 敎育會)에 찬성금 100원을 기부 1905년 7월 중추원 찬의 1907년 6월 중서동(中署洞) 상업전문학교(商業專門學校) 교장 1907년 9월 군대해산으로 전역 1908년 8월 국채보상지원금총합소 소장으로 있으면서 보상금 중 3만 원을 영국인 베델 이 사취했으므로 반환을 요청한다는 반환청구서를 제출하고, 소장직을 사직 1908년 8월 기호흥학회 회장 1909년 4월~6월 일본관광단의 일원으로 일본을 시찰 1910년 10월 「조선귀족령」에 따라 남작 작위 1910년 12월 보관하고 있던 국채보상금 4만 2000여 원을 경무총감부에 이관 1911년 1월 은사공채 2만 5000원을 받고, 2월 총독 관저에서 열린 작기본서봉수식 (爵記 本書捧受式)에 예복을 갖추어 참석 1911년 9월 22일 사망. 작위는 장남 윤치호(尹致昊)가 이어 받음 [참고문헌] 『承政院日記』 ; 『日省錄』 ; 『高純宗實錄』 ; 『舊韓國官報』 ; 『朝鮮總督府 官報』 ; 『大韓每日申報』 1908.8.11, 1909.6.4 ; 『皇城新聞』 1905.3.22, 10.25, 1907.6.18 , 6.20, 1908.3.10, 8.4, 8.11, 12.24 ; 『新韓民報』 1910.11.2, 1911.10.18 ; 『新韓 國報』 1910.10.25. ; 『韓民』 1936.8.29 ; 『每日申報』 1910.10.8, 12.15, 1911.1.14, 2.23, 9.2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