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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30 - (2) 광주 잔존 시설 활용 방안 ① 임동 방직공장 : <광주 식민지 수탈 전시관>(가칭) 조성 ○ 역사적 근거 - 광주‧전남은 조선시대부터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면직(綿織)산업 중심지 였음 • 세종실록지리지에 의하면 당시 전라도 56개 고을 중 48%에 해당하 는 27곳에서 목화재배가 성행. 기후조건상 전라도에서도 노령산맥 이남 인 광주‧전남 지역에 목화의 주산지였음 • 19세기 초 서유구의 완영일록 : “남원과 광주, 옥과는 전라도에서 도 목화재배가 가장 성행하는 곳이다. 이들 고을엔 산이고 들이고 목화 밭 없는 곳이 없을 정도다.” • 19세기 말 일본인 기록 한국에서의 면작사항 : “1895년 당시 광주 에서는 20호를 뺀 5,600여 호가 목화농사를 지었다. 그리고 목화농사만 큼이나 무명베를 짜는 일에도 열성이었는데 광주에서만 연간 78,000여 필의 무명베가 생산됐다.” - 일제 강점기 전국 최대의 육지면 산지 • 일본 내지의 면산업에서 필요로 하는 목화 수요가 급증함에 따라 한 국, 특히 전라도에 재래면보다 수확량이 20~30% 늘어난 육지면 재배를 강요. 다른 작물 재배하면 무단으로 뽑아 버리는 일도 비일비재 • 목포 앞 고하도가 육지면을 처음 재배한 시배지. 1904년 면작시험장 설립 • 생산량이 늘수록 일본으로의 수탈도 확대됐는데, 목포가 전국 최대의 목화반출 항구 • 광주에서도 1906년 두암동에 채종포(採種圃) 설립, 1909년 임시면화재 배소와 종묘장 설립 • 1913년 육지면 재배 확대를 위해 광주에 면작조합 결성 • 1913년 광주교 근처 도모타 조면공장, 1914년 광주대교 근처 광주조면 공장 설립 → 광주에서 양조장과 함께 가장 먼저 생긴 근대식 공장으로, 광주조면공장은 광주 최대 제조업체였음 - 일제 강점기 양잠과 견직업 • 일제강점기 당시 나주를 중심으로 아래쪽은 목화를 많이 재배 하였고, 북쪽으로는 누에를 많이 길렀음 • 호남은 ‘쌀’‘목화’‘누에고치’등 3백(白)이 유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