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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96 - 경생후생실내악단은 1942년 5월 1일 전시하의 국민들에게 건전한 음악을 보급 하고 음악 자체의 예술성을 바탕으로 국민음악 정신대(挺身隊)로 활동하기 위해 중진 음악가들로 결성 경성후생실내악단은 현제명이 이사장으로 취임한 후 함경북도 일대 광산과 공 장, 강원도 삼척 지방을 중심으로 어촌과 광산지역, 남선(南鮮) 지역, 충청남도 지역, 전라북도 지역의 생산현장를 직접 방문해 위문공연을 하는 한편 화북지역 장행 연주회도 펼침 1944년 6월 지방순회공연을 마치고 귀성공연에 출연했고, 8월 호남지방 산업전사 위문 공연을 가졌고, 10월 제11회 연주회에 출연 1945년 5월 경성후생실내악단은 ‘결전 음악의 수립과 활발한 공연 행동의 공적’으로 일본 신태양사(新太陽社)가 주는 제5회 조선예술상 음악상 받음, 이때 부 상으로 받은 상금 500원을 현제명이 대표로 해군 휼병부를 방문해 헌납 1944년 4월 조선연극문화협회 회원자격심사회에 이면상(李冕相) · 조택원(趙澤元) 등과 함께 심사위원으로 참여, 심사회는 전시하 민중계몽의 도구로서 문화적 무기를 내세워 연극문화협회원 가운데 전문 지식과 황민 상식이 모자란 부적격자를 정 리하는 것이 목적 1944년 7월을 전후해 조직을 개편한 조선음악협회의 이사에 선출 조선음악협회는 1941년 1월 ‘음악의 건전한 발달과 음악가의 질적 향상을 도 모해 신체제 문화의 발전향상에 이바지하자’는 목적으로 결성된 조선총독부의 대표적인 외곽단체로, 해방될 때까지 일제의 식민통치에 부응하는 ‘신체제 음 악’과 ‘음악보국’ 등을 주장하고 음악을 통해 ‘미영격멸’ 의식과 침략전쟁 에 참여할 것을 선전 · 선동했다. 조선총독부 학무국장을 회장으로 하고, 사무 소를 학무국 사회교육과 내에 두었다. 조선음악협회는 음악이라는 직능으로 체 제에 협력하고자 하는 ‘음악보국주간 연주회’ 같은 연주회의 주최와 후원, 징 병제 실시 축하음악회 개최, 국민개창운동 전개, 국가(國歌)봉납대회 개최, 음악 기예자 증명서 발급심사시험 등을 주관 1944년 8월에는 조선음악협회가 실시한 음악기예자 자격시험의 심사위원으로도 활동 이 자격시험은 작문 · 상식 · 전공 능력에 대한 자격 심사로 일정 자격을 갖 추지 못하면 기예증을 발급하지 않는 회원 숙정작업의 일환 1945년 9월 고려교향악단을 조직해 1948년까지 이사장으로 교향악단을 운영, 한국민주 당 발기인 및 중앙위원회 문교부 위원에 선임 1946년 2월 경성음악연구원이 경성음악학교로 인가를 받으면서 교장에 취임 경성음악학교가 그해 8월 국립 서울대학교 예술대학 음악학부로 편입되면서 초 대 음악부장을 맡았고, 1952년 학장에 취임 1948년 12월 시공관에서 열린 ‘민족정신앙양 전국문화인 궐기대회’에서 각계 준비위 원 500명 가운데 한 명으로 선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