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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1년 10월, 서울로 상경하여 경성제국대학 법문학부 사환, 체신국 경성보험관리소 직원으로 근무하는 한편, 야간에는 덕수공립상업학교에 재학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 1943년 6월경부터 동 근무지의 대우가 한국인과 일본인 사이에 차별이 있음을 알고, 이 때부터 한국역사에 관한 서적을 탐독하여 민족의식을 고양하였다. 그 후 1944년 4월 중순경 같은 학교 동료인 김익설에게 소기 조선총독의 민족차별정책을 비난하였으며, 5월에는 보험관리소 사무실에서 동료들을 대상으로 "미국·러시아·상해 방면에서 조선인이 활발하게 독립운동을 전개하고 있다. 조선이 독립하면 나는 일본인을 쫓아 버릴 작정이다. 이번 전쟁에 일본이 패한다 하더라도 조선에는 아무런 관계가 없고 오히려 못 이기는 편이 행복하다고 생각한다"고 말하는 등 민족정신 고취에 노력하였다. 또한 동년 5월 초순 보험관리소 대변소의 판자 벽에 연필로 "반도 2천 6백만 동포여. 자 일어서라! 조선 독립의 때가 왔다. 지금 와서 지원병이니 징병이니 하고 있다. 아아! 가련하도다"라고 써 붙이는 등 민족정신 고취에 진력하다가 소위 치안 방해 혐의로 일경에 피체되었다. 1944년 12월 14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1년 6월을 받고 옥고를 치르던 중 1945년 4월 3일 옥중 순국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5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출처 : 보훈처 공훈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