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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산리대첩 독립군의 국내진입 유격전, 봉오동전투 등으로 큰 타격을 받은 일제는 서북간도의 독립군 활동을 저지하지 않고서는 한국을 완전하게 지배하기 어려울 것으로 판단해 이 지역에 대규모의 일본군을 침입시켜 독립군을 탄압하려는 계획을 세웠다. 1920년 10월 초 일제는 중국마적을 매수해 북간도 훈춘의 일본영사관 분관을 습격토록 했다. 일제는 중국인들에 의해 일본영사관이 피해를 입었다고 주장하고 이를 구실로 일본군을 중국영토인 서북간도로 침입시키고자 함이었다. 이 사건 이후 일제는 약 2만명의 일본군을 서북간도로 침입시켜 이곳의 한인사회와 독립군기지를 공격했다. 그러나 이런 일제의 의도를 사전에 간파한 독립군들은 일본군이 독립군기지에 도착하기 전에 백두산록 서쪽으로 이동하기 시작했다. 청산리대첩은 이동 중이던 여러 독립군단의 독립군들이 청산리계곡에 도착했을 때 일본군이 공격해 와 일어났다. 10월 21일부터 약 10여일 동안 청산리계곡 일대의 백운평, 완루구, 어랑촌, 천수평, 맹개골 등에서 독립군과 일본군 사이에 대전투가 전개되었다. 김좌진, 홍범도, 지청천, 안무, 이범석 등 뛰어난 독립군 지휘관들의 작전아래 독립군들은 목숨을 바쳐 싸웠다.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발표에 의하면 청산리대첩 결과, 일본군 전사자는 1,200여 명이며 부상자는 2,100여 명이었다. 독립군측은 전사자 130여명, 부상자 200여 명뿐이었다.